지난 11월 20일 영성순례가 있었다. 서대문 경찰청 앞에서 모여 서소문 아파트, 서소문 순교지, 약현성당, 양정교보, 손기정 기념관, 만리현고개를 넘어 정교회까지 순례였다. 안내는 한국교회사를 전공한 홍승표박사가 맡았다. 이웃종교와 개신교의 정신을 만날 수 있어 큰 배움의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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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의 본명은 돈의문이며 원래 위치는 금화터널 위쪽에 있었으나 경향신문 자리로 옮겨 신문, 새문이라 불렀다. 새문안이나 신문로는 그렇게 생긴 이름이다. 서울은 고종황제의 정책으로 아시아에서 교토에 이어 두 번째로 전철이 생겼다고 한다. 그 출발점이 서대문이었다. 기차도 서대문역이 종점이었다.
이어서 서소문 순교지를 방문하였다. 공사 중이라서 가까이 가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바라보며 이야기를 들었다. 천주교의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고 103인의 성인으로 위임된 분들 중 절반이 여기에서 순교를 당하였단다. 그리고 이곳은 동학도들의 순교지이기도 했고 개신교도들의 순교지이기도 했다. 전봉준도 여기에서 처형되었다. 이곳이 서소문 시장이 있어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어서 처형장으로 애용되었다. 국가에 항거하면 이렇게 처형당하는 본을 보여줌으로 겁을 주려는 행태였다.
다음에 찾은 곳은 약현성당이었다. 미사 중이어서 내부는 문을 빠꼼이 열고 보았지만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라고 하였고 언덕 위에 지어져 순교지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천주교는 순교지를 매입하여 그 위에 성당을 세웠다. 개신교가 학교와 병원을 세울 때 천주교회는 순교지를 매입하여 성당을 짓는 일에 몰두하였다. 개신교회가 조선의 정서를 감안하여 평지에 교회를 지은 것과는 달리 천주교는 언덕에 성당을 지어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명동성당은 종현성당이라고 이름을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는 명동을 종현이라 불렀고 종이 있는 언덕이란 뜻이다. 약현은 약초가 많이 자라는 언덕이란 뜻이다.

우린 양정교보터를 둘러보고 손기정 동상과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손기정은 어린 시절부터 달리기를 좋아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손기정을 발굴하여 기른 분은 무교회주의자이며 교육학자요 독립운동가였던 김교신 선생이었다. 김교신은 성서조선을 지어 사상운동을 전개하신 민족 지도자였다. 일제는 독립운동은 지금 시대를 구하지만 김교신의 성서조선은 500년 뒤에도 독립이 가능한 정신적 기반을 만들었다고 두려워했다고 한다. 김교신은 손기정에게 마라톤을 지도하면서 민족혼을 가르쳤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었다.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올림픽을 구성했지만 손기정이 1등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손기정은 기뻐할 수 없었다. 그것이 한 없이 슬펐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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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장기를 달고 승리한 손기정을 소개할 때 방송은 그를 일본인으로 소개하지 않고 조선인으로 소개하였다고 한다. 우승 선수에게 히틀러는 나무를 한그루 선물했는데 다행히 그 나무로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가릴 수 있었다며 손기정은 슬픔을 넘길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나무는 지금 손기정 기념 공원에 큰 나무로 자랐다. 당시 우승컵을 들고 선 손기정 선수의 가슴엔 일장기가 그려져 있었지만 동아일보 등 국내언론은 일장기를 지우고 싣는 바람에 무기 정간되는 수모를 당했다. 아니 그 수모를 알면서도 일장기말소사건을 일으켰다.
이어서 찾은 곳은 정교회였다. 마침 지인의 동생이 있어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정교회의 이콘이란 성화에 대한 설명과 성전 내부의 구성에 대해서도 들었다. 기독교는 천주교와 정교회, 개신교로 나눌 수 있다. 한국에 정교회는 러시아를 통해 들어왔지만 일제와 해방으로 이어지면서 소련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받았다. 70년대에 그리스 정교회가 들어오면서 제 모습을 갖게 되었다.

성화는 그 너머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란 말에 공감했다. 지나치리만큼 성화가 많았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 글을 모르는 민중들이 성경의 이야기를 성화를 보며 알게 되었다는 말에 성화가 그런 작동을 하였다니 고마웠다. 날씨도 좋았고 미세먼지도 약했고 적당한 분들이 함께 길을 걸어 참 좋았다.
점심은 얼마 전에 따님을 출가시킨 김기원 목사가 대접하였다. 황금두부집이다. 두부가 참 맛있었다. 아주 옛날 어머니가 만들어 준 그 두부 맛이었다. 영성 순례의 맛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고마운 일이다. (지리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