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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으로부터 자유
탐욕을 조심하여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2018년 10월 23일 (화) 11:33:00 한현실 webmaster@eswn.kr

상지종신부: <나다움의 길 : 탐욕으로부터 자유>
2018. 10. 22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루카 12,13-21 (탐욕을 조심하여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그때에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나다움의 길 : 탐욕으로부터 자유>

‘나는 누구인가?’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입니다. ‘나의 것은 무엇인가?’ 내 이름, 내 가족, 내 친구, 내 책, 내 옷, 내 직장, 내 집. 그런대로 대답할만합니다. 이 두 물음은 언뜻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차원의 물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이 두 물음을 혼동합니다. ‘나의 것’을 ‘나’와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성장시키는 대신에 ‘나의 것’의 목록을 늘려가는 데에 집착하게 됩니다. ‘나의 것’에 집착하여 ‘나의 것’을 얻고자 하는 끝없는 욕망이 ‘탐욕’입니다. ‘나’와 ‘나의 것’을 혼동하고, ‘나의 것’을 ‘나’라고 착각한다면, 우리는 탐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예수님의 말씀을 ‘나의 것’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해방되어 ‘나의 생명’, 곧 ‘나’를 추구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탐욕에서 벗어나 ‘나’를 추구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나다울 수 있습니다. 나는 나다워야 하고, 너는 너다워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고유하고 존엄한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와 ‘나의 것’을 혼동하여 탐욕의 늪에서 헤맨다면, ‘나다움’과 ‘너다움’은 빛을 잃게 되고, ‘너 닮음’을 ‘나다움’과 혼동하게 됩니다. 오늘날 돈과 권력, 그리고 소비만능주의라는 사람들 스스로 만든 우상은 자신이 가진 것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내가 가진 것’과 ‘네가 가진 것’을 끊임없이 비교하라고 부추깁니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 부추김에 휘청거리는 사람은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깨닫지 못하여 자존감이 떨어지고, 자신과 자신의 것에 감사할 줄 모르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시기심으로 가득합니다.

나의 것이 늘어난다고 내가 더 나다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처럼 가지고, 다른 사람처럼 된다고 해서 더 나다워지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마태 6,31-32). 우리는 삶의 필요한 것을 대부분 선물로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직접 또는 누군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주십니다. 물론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촌에는 절대빈곤으로 사지(死地)에 내몰린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이들은 사람들의 이기적인 탐욕이 낳은 희생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우리다움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탐욕에서 해방되어야만 합니다.

여기에서 탐욕에서 해방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다양하게 각색되어 전해오는 우화 하나를 나누고 싶습니다.

엄청난 재산을 가진 사업가가 머나먼 섬으로 휴가를 떠났습니다. 치열했던 일상에서 벗어난 그는 매일 바닷가에서 수영이나 낚시를 즐겼는데, 그때마다 낚시할 생각은 않고 자그마한 배 바닥에 누워 햇볕을 즐기고 있는 한 원주민을 만났습니다. 어느 날 사업가는 놀고 있는 그 원주민이 한심스러워 물었습니다. “고기는 안 잡고 왜 그렇게 놀고 있소?” 이에 원주민은 웃으며 대꾸했습니다. “오늘 몫은 넉넉히 잡아 놨어요.” “그래도 더 잡아야 할 것 아니요?” “그래서 뭘 하게요?” 원주민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사업가를 바라보았습니다. 사업가가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지요. 그 돈으로 더 큰 배를 사면 더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당신도 나처럼 큰 부자가 되지 않겠소.” 사업가는 나름 열심히 원주민을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원주민은 “그리고는 또 뭘 하죠?” 라면 안쓰럽다는 듯이 되물었습니다. 이에 사업가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뭘 하긴요, 편안히 앉아 쉬면서 삶을 즐기는 거지요” 그러자 원주민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래요? 그럼 당신은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우리 모두는 자신을 위해서 재화를 모으는 데에 안달하기보다, 나다움을 추구함으로써 나를 온전히 빚으신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나요?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나요?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나요? 존엄한 ‘우리 자신’인가요? 아니면 이내 사라지고 말 ‘우리의 것’인가요? 이제 우리, ‘나의 것’이라는 껍데기를 벗고, ‘너 닮음’이라는 유혹에 맞서 나다움의 길을 걸어갑시다.

* 예수살기 한현실님께서 카톡에 올리신 상지종 신부의 글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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