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교회의 뿌리를 찾아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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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교회의 뿌리를 찾아서(3)
  • 조헌정
  • 승인 2018.07.20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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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불선의 영향들

“유불선(儒佛仙)의 영향과 그 폐해” 행 9:1-8

[미국 선교사와 장로교단의 첫 번째 분열]

한국기독교장로회는 1953년 6월 당시 조선신학교 학장으로 계시던 김재준목사를 중심으로 태동한 교단입니다. 1939년 일제강점기 말 김재준목사는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시고 돌아와 서양선교사들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민족자주적인 신학교 운영과 교회 지도자 배출을 꿈꾸며 김대현장로의 재산 헌납을 받아 서울에 조선신학교를 세웁니다. 김재준목사의 신학은 ‘자유혼’이라는 한마디로 정리가 되듯이 그는 성서를 문자 그대로 믿는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을 비판하고 성서를 학문적으로 탐구하는 성서비평 학문을 받아들였습니다. 학문의 자유야 말로 예수가 추구한 참 신앙이요, 이를 통해서 만이 참 진리의 길에 도달할 수 있음을 믿은 것입니다.

그러자 이에 위협을 느낀 주로 미국 장로교의 선교사들과 평양신학교 출신의 교권주의자들은 그를 자유신학자로 정죄하고 목사 파면을 하기에 이릅니다. 그리하여 기장이라는 교단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1952년도 대구에서 모인 장로교 총회에서 김재준목사를 파면하는 표결이 6표차로 통과되었는데, 당시 김재준목사를 반대하는 미국선교사 총대 숫자가 13명이었다는 사실은 기장과 예장의 최초 장로교단 분열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한 일이었음을 충분히 증명하는 것입니다. 물론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회 총회장으로 미국선교사 마포삼열목사가 선출되었다는 점에서 그 출발부터 미국 선교사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것인데, 지금까지도 남한의 대형교회들이 미국의 신학과 목회를 추종한다는 점에서 변함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남한의 장로교단은 200개 이상으로 갈래갈래 찢어지고 말았는데, 이 모든 교단들이 한결같이 9월에 총회를 갖으면서 “103회 총회”라는 현수막을 내어 겁니다. 설사 작년에 출발한 장로교단이라 하더라도 103회 총회라는 간판을 내걸게 되는 것은 마치 방금 시작한 가게가 ‘원조’라는 간판을 내어 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음식의 맛과 질에 있어 진짜 원조에 밀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만, 진정 미래 세대의 주역인 젊은 세대의 목소리를 끌어안으면서 통일조국을 준비하는 역사 의식이 살아있는 교단이 별로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현재 남북통일의 가장 큰 저해 집단은 교회입니다. 북의 형제들을 모두 빨갱이로 몰아버리는 행위는 통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도 새로운 시대에 맞춰 자신들의 주장을 바꿔가고 있는데, 남한의 기독교는 점점 더 과거에 귀착하는 근본주의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조선 기독교의 아버지]

그런데 이렇게 기독교가 보수근본주의 일변도로 나아가게 된 연유에는 오늘 언급하고자 하는 길선주목사에게 그 뿌리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길선주목사는(1869-1935)는 조선기독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입니다. 장로교 최초의 7명의 목사 가운데 한사람으로 당시 3천 오백명이나 모였던 평양 장대현교회의 담임목사로 일제 강점기 초기 조선교회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목사였습니다. 현재 한국교회가 자랑하는 새벽기도회가 그로부터 시작하였고, 집단적인 회개와 거듭남의 영적 체험을 강조하는 1907년 대각성운동의 핵심인물이었습니다.(대각성운동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보다 자세히 언급함.)

그에 대한 선교사 게일의 인물 평가입니다. “그는 만사에 지혜롭고 갈등하는 상황을 화해하는 능력이 있으며, 두려움이 없고 온유하다. 그는 평양교회의 장로로 선출되었고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즐거이 무릎을 꿇고 경청한다. 그는 비록 지성적인 경력은 대단하지 않지만, 심령을 감동시키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위해 하느님이 사용하시는 미묘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 설교자로서 그는 청중을 웃기는 법을 알고 있다. 사역자로서 그는 믿음의 대상인 하느님을 강철같이 강력하게 붙잡는 법을 안다.”(<길선주목사의 목회와 신학사상> 허오익 대한기독교서회 2009. 7쪽에서 재인용) 그리하여 그의 뛰어난 설교로 인해 월남 이상재선생과 남강 이승훈선생같은 사회의 거물 인사들이 신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목회자로서의 이런 탁월함 배후에는 젊은 시절의 독특한 경험 때문입니다. 그는 무과에 급제한 부친으로부터 4살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당시의 풍습에 따라 11세 때에 16세 되는 아내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께서 첩을 두는 일로 어머니가 심히 괴로워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게 됩니다.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열 살이었을 때부터 난 세상에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마음은 슬펐고 참 많이 울었습니다. 서당에서 계속해서 어떤 새로운 진리를 찾았습니다. 나를 좀 더 밝은 빛 가운데 인도해 줄 분의 제자가 되기를 갈구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열 살 때부터 어머니의 고통을 통해 가부장적인 유교사회의 모순을 보았고 더 나아가 조선이 서구와 중국, 일본의 침략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지는 현실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청년 길선주와 도교]

그러다가 17세 때에는 형님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던 불량배 집단의 습격을 받아 거의 죽을 뻔하였고 이후 평양으로 이주하여 잠시 상점을 운영하다 실패를 하자 세상을 싫어하여 절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시작합니다. 이때 중병에 걸립니다. 그때 꿈에 한 도사가 나타나 을밀대에 가보라는 얘기를 듣고 거기서 한 도인(道人)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부터 그는 선도(仙道)에 깊이 빠져들어 차력을 행하는 일종의 도사가 되었고 불교에도 깊이 입문을 합니다. 19세부터 29세까지 10년간을 수시로 입산하여 수도하였는데, 21일, 49일, 때로는 100일동안을 눕지도 않고 자지도 않는, 불침불휴의 기도에 전념하면서 선교의 주문을 외웠던 것입니다.

그의 경지가 어디까지 이르렀는가 하면 선술(仙術)에 통달하여 결가부좌로 앉아 주문을 암송하면 몸이 뛰어 오르는 초약(超躍)을 하였습니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둔갑술을 배우던 한 친구에게 주문을 알려주자 이 친구는 사나흘이 되자 격렬하게 떨면서 초약을 하기 시작하여 급기야는 절간 천정을 머리로 들이받기까지 하였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런 것을 직접 본적은 없지만, 길선주목사님의 일대기를 적은 목사인 저자도 약 50센티미터를 뛰어 오르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하고, 목사 아들이기도 한 제 친구 또한 한때 이런 것을 배운다고 산에서 산 적이 있는데, 자기 스승 또한 그러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하여간 길선주목사는 청년시절 상당한 수준의 차력과 도술을 행하였고, 이를 성서에 나오는 삼손과 같이 하느님이 주시는 힘으로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길선주는 배에 힘을 주면 사람들이 주먹으로 그의 배를 아무리 힘껏 후려쳐도 끄떡도 하지 않았으며 통나무 목침을 주먹으로 부수고 망치를 손으로 끊을 만큼 괴력을 보여주었으며 웬만한 개천은 단숨에 뛰어넘어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다가 같은 도인이자 친구였던 김창섭이 모펫 선교사를 만나 개종을 합니다. 이 김창섭은 길선주목사와 같이 후에는 평양 장대현교회의 초대장로가 되고 또 목사가 된 사람으로 길선주를 비롯한 많은 도인 친구들을 기독교로 개종하게 만든 인물입니다. 그리하여 평양에서 처음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주로 신흥 중산층에 속하는 상인들과 객주들이었으나 두 번째로 개종한 이들은 도교인들 일명 도사들이었던 것입니다.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기까지 교회가 급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바로 선술과 도교의 영성으로 무장한 이들의 강력한 영적 지도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기도의 사람이 되려면 ‘산에 올라가 소나무 한 뿌리는 뽑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기도방식은 바로 이들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남한교회 안에 방언과 병 고침에 대한 은사운동이 매우 강한데, 이 또한 기독교로 개종한 도교인들의 영향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처럼 장수에 대한 관심이 높은 민족이 별로 없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선술과 도교에서 출발한 불로장생에 대한 희구 때문입니다. 이 불로장생의 염원이 자연스럽게 기독교의 부활과 영생 교리에 접목을 하게 됩니다. 그래 처음 기독교가 전파되던 1890년대에 가장 애송된 찬송가에는 불로장생을 염원하는 찬송가사가 들어 있습니다. “하늘엔 곤찬코 장생불로/ 신뎨가 쾌야 장생불로/ 괴롭고 힘드러 세상사 짐졌네/ 하늘엔 즐거워 장생불로”(61쪽) 게다가 성서를 구분 짓는 ‘구약’ ‘신약’의 이름 또한 장생불로의 약 이름으로 곧잘 오해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초문제가 교회의 중심 교리로 자리 잡은 나라는 남한이 거의 유일한데, 이는 물론 당시 나라 잃은 설움으로 인해 술 담배가 너무 심하여 선교사들이 이를 금하게 한 것이 주요한 이유이지만, 동시에 불로장생을 염원하는 선술 도교 출신의 기독교인들의 영향이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20대 중반에 길선주는 한방 연구를 하여 한약국을 개업하고 동시에 양약국을 겸하였다고 하는데, 평양에서 한방과 양방을 겸한 것은 길선주가 효시였다고 합니다. 그가 주로 취급했던 양약품은 당시 만병통치약으로 불리던 금계납과 회충산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많은 도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는가? 이 이면에는 청일전쟁이 있습니다. 당시 청일전쟁을 목격한 스크랜톤 의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2만 명의 오합지졸인 중국 군인들이 두 달 간 평양을 점령하면서 가옥을 약탈하고 쌀과 솥을 빼앗아 갔으며 부녀자들까지 겁탈했다. 일본군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 8만 명의 주민 가운데 남은 자는 수백 명에 불과했다.” 청일전쟁이 평양시민에게 가져다 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 기사입니다. 그런데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에게 패한 것은 길선주와 같은 도교인들에게는 그 이상의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신봉하던 유불선이 모두 중국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 스피어 선교사는 말하기를 “중국의 패배는 조선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남겼고 서양 문명과 기독교를 한층 더 높이 평가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또한 귀신 숭배의 사기를 저하시켰고, 중국 신들의 숭배를 죽였으며, 남아 있던 불교의 일부 버팀목들도 잘라 버렸다.”(허호익 저 45쪽에서 재인용) 결국 서양 문명을 수용한 일본의 승리는 조선인들이 가진 전통종교에 대한 한계를 각성시켰고, 서양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없애고, 이를 적극 수용하게 하는 ‘일종의 정신적 혁명’으로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길선주는 처음 친구 김종섭의 전도에 완강하게 반대하였으며 그의 개종은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도에 대한 7년 동안의 탐구과정을 거쳐 회심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게일 선교사가 전하는 그의 고백입니다. “옛날 기도하던 방식을 의지하는 것 이외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마는 이번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했다. 점차 나는 그렇게 완강히 붙잡고 있던 밧줄을 놓기 시작했고, 밧줄은 한 가닥씩 풀렸으며, 내 영혼은 심연 위의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이어 상실의 늪 속으로 빠져들었는데, 그 고뇌는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었다. 일곱째 되던 날 지치고 절망한 나는 반 홍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나는 갑자기 ‘길선주야’라고 크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깨어났고, 그 소리는 반복해서 울렸다. 어리둥절한 채로 일어나 앉아 있는데 내 앞에 신비한 무엇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를까? 방 자체가 변형되었고 영광스러운 빛이 내 주변을 환하게 비추었다. 내 영혼에 안식과 용서와 애정이 자리 잡았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이를 증명했다. 지금 와서 뒤돌아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 얼마나 기뻤던가! 모든 기도가 응답되고, 내가 수년간 고뇌하며 찾았던 하느님을 드디어 발견하게 되었다. 내 아버지의 집에서 죄 사함을 받고 용서받은 자가 되어 마음이 편했다.”(55쪽에서 재인용)

이는 마치 사도 바울의 다메섹 신비 체험과 비슷합니다. 바울이 유대교라는 밧줄에 매여 있었듯이 길선주 또한 유불선이라는 밧줄에 매어 있었던 것이고, 구원의 밧줄을 놓아버렸을 때의 상실감과 절망감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바, 이를 누가는 사울이 사흘동안 시력을 상실한 것으로 사도행전에서 말하고 있는 반면, 길선주는 이를 칠일동안의 혼수상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은 함께 자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영광스러운 빛이 환하게 비추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길선주는 예수교의 도를 세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일이요 두 번째는 부활을 통해 영생에 이르는 길이요 세 번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고백과 예수 십자가를 통한 죄사함의 도를 발견한 것입니다. 지금도 이 세 가지는 지금까지도 남한교회의 불변하고 있는 구원의 근본 교리입니다. 물론 이것이 예수 믿음의 기본이긴 하지만, 여기에서 머물고 만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가 헤롯왕을 여우라 부르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 정치적 갈등이 부재할뿐더러, 예루살렘 성전숙청과 같은 교회개혁, 사회개혁의 모습은 전연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조선기독교의 아버지라고 존경받는 길선주목사의 한계만이 아닌 오늘의 남한 기독교의 한계를 보여주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부정적인 면]

남한교회의 새벽기도회는 세계가 알아주는 열성적 신앙의 모습입니다. 세계 어느 교회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예배입니다. 수도원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새벽기도회가 이렇게 자리잡게 된 연유는 바로 길선주목사에게 있고, 길선주목사 자신이 이런 새벽기도회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그가 오랫동안 도교와 불교에 심취하면서 가졌던 새벽기도 습관입니다. 불교의 새벽 예불은 3시에 갖습니다. 그건 석가모니께서 깨달음을 얻은 시간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새벽기도회의 호불호를 떠나 그 근원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저도 새벽기도회를 오랫동안 했던 사람입니다만, 모든 기도회나 예배의 목적은 하느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며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믿음을 진작시키는데 있습니다. 그 믿음의 최종목표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그런데 새벽기도회로 유명한 남한이 그렇지 못한 나라보다 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나요? 아니면 이는 자기만족의 율법적인 행위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요? 20여 년 전 어느 미국인 목사가 새벽교회로 소문난 강남의 한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새벽기도회가 끝나고 나서 육교로 건너지 않고 횡단보도를 무단으로 건너가는 수많은 교인들을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남한 교회는 열은 있으나 빛은 없다.”

길선주는 장대현교회의 목사가 되기 전, 장로와 조사로 사역하면서 신앙생활과 교회행정 체계를 토착적으로 정립하였습니다. 그중 안수집사직 외에 서양교회 전통에나 성서에도 없는 일년 직 서리집사 제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유학에 물든 조선인들의 명예심을 이용한 것인데, 현재 서리집사 제도는 교회 내에 불필요한 폐해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이외 그는 제1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부총회장직과 전도국장이라는 공직을 맡아 기미년 독립선언문에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여 1년 6개월의 징역을 살긴 하였지만, 이후 다른 사람들과 달리 무죄 판결을 받아 독립에 대한 의지에 대해서는 문제시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요한계시록에 몰입하여 ‘말세론’을 주창하여 현실 도피 신앙을 심어준 책임을 면하기 또한 어렵습니다.

[긍정적인 면]

길선주목사가 활동하던 시절은 중국이 물러나고 일본의 지배가 가시화되는 시기로 자연히 미국을 중심한 서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시기였습니다. 그래 길선주목사 또한 서양문화 도입에 앞장선 사람이었지만 동서의 문화적 갈등을 누구보다 슬기롭게 해결하고 민족문화의 주체성을 확보하려고 시도한 사람입니다. 그는 서양종교인 기독교를 수용하였고 조선 최초의 교회 성가대를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당시 성가대는 모두 남자였고, 남녀의 좌석이 ㄱ자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중앙에 있는 성가대가 노래 부를 때에도 여성 좌석이 보이지 않도록 칸막이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길선주목사는 유교의 가부장적인 전통에 맞서 이런 구별의 휘장을 없애 버렸고 여전도회를 창설하여 여성들의 교회활동을 적극 장려했습니다. 당시 여성들이 돈을 자유로이 다룰 수 없는 가정 현실을 감안하여 성미를 드리도록 하였고, 이를 팔아 전도인들의 생활비로 지급하였습니다.

그는 조선의 교회가 서양문화의 산실이 되어서는 안 되며 조선의 전통적인 문화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민족은 외국문화와의 갈등이 시작된 현실에 살고 있다. 이는 후진 민족이 당하는 가장 무서운 싸움의 시작인 것이다. 총칼의 승리는 외적인 모든 것을 약탈하고 그 민족을 포로로 하지만, 문화 싸움의 패배는 민족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외국문화와 우리의 문화의 교차로가 된 오늘의 교회가 외국 문화의 그림자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우리 문화 위에 꽃을 피우는 기독교가 되는 때에 우리 민족의 종교가 될 것이다.”(97, 9쪽) 또한 신학적으로도 반만년을 키워 온 우리의 민족 철학 ‘홍익인간’의 시대적 해석이 나와야 하고 오는 새 세대들이 이해할 수 있고 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선교사들이 가르쳐 준 대로 서양찬송을 따라 부르던 당시, 국악으로 찬양을 연주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전통악기인 단소의 명인으로 1909년부터 “교회의 행사와 절기 때마다 조선의 전통음악을 연주하여 교회음악의 토착화에 대한 관심을 부추겼으며, 저명한 국악 악사 한 사람을 초빙하여 그의 집에 거주하게 하면서 교회 의식에 맞는 가락과 성경구절을 선택하고 연주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찬송가를 ‘청북수심가’ 가락에 맞춘 시조창으로 부르게 하였고, 당시의 찬송가 여러 장을 국악찬송으로 편집하여 국악을 통한 민족적인 기독교정신문화를 세워가기 위해 애쓴 당시로서는 드문 목회자였습니다.(10쪽)
현재의 남한교회는 지나치게 서구화되어 있어 자기 것에 대한 자긍심이 너무 부족할뿐더러 민족전통음악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합니다. 바라기는 남한교회들이 민족통일과 민중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내적으로는 우리 가락을 살리는 국악예배의 진작을 위해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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