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설교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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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설교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 박철
  • 승인 2018.06.15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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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생각하도록 자극하는 것

설교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초점이 있다. 하나는 하느님 말씀, 곧 영원한 진리에 그 초점이 있어야 하며,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의 실정, 상황 곧 현실 위에 그 초점이 있어야 한다. 만일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빼거나 무시한다면 그것은 설교가 되지 못하고 만다. 가령 성서의 진리가 인간의 현실과 관련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서 주해는 될지언정 설교는 될 수 없으며, 인간의 현실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어도 그 문제가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해답을 찾지 못하면 그것은 시사 해설이거나 시국 강연은 될지언정 설교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설교는 영원한 것을 끄집어내어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이 되도록 통역을 해 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뒤집어서 우리가 오늘 당면하고 있는 가지각색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끌고 올라가 영원자의 무릎 앞에서 해답을 얻도록 해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신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설교는 하느님과 사람, 영원과 시간, 절대와 현실을 만나게 하는 중보자의 역할을 그 사명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오늘의 설교에 대하여 일종의 식상(食傷)함을 느낀다. 세상에서 제일 흥미 없는 일이 설교라고 말한다. 설교를 듣고 앉았기보다 차라리 재담이나 코미디 같은 것을 듣고 보는 것이 오히려 정신 건강에 더 좋다고 빈정대기도 한다. 설교는 일종의 관념의 유희에 불과하여 인간의 삶의 현실과는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현대사회는 설교의 위기를 맞고 있는가?
설교란 원래 설교자의 말을 통하여 듣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일으키며 기쁨을 전달해 주는 일이라고 독일의 설교학자 루돌프 보렌(Rudolf Bohren) 교수가 말한 바 있다. “만군의 주 하느님, 저는 주의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주께서 저에게 말씀을 주셨을 때에, 저는 그 말씀을 받아먹었습니다. 주의 말씀은 저에게 기쁨이 되었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웃으며 떠들어대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즐거워하지도 않습니다. 주께서 채우신 분노를 가득 안은 채로, 주의 손에 붙들려 외롭게 앉아 있습니다.”(예레미야 15:16~17) 이 기쁨과 흐뭇함은 설교자의 인격에서 오는 것이 아니요 말씀 자체에서 오는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한편 보렌은 현대 설교의 위기를 지적하고 있다. 설교는 많으나 말씀은 희귀하다고 그는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설교한다는 사건에서 일종의 크나큰 곤혹과 회의를 느낀다고 그는 지적하고 있다. 아무런 깊음도 없고 실효성도 없으며 이치에도 맞지 않은 낡아빠진 방법의 설교에서 설교하는 자나 설교를 듣는 자가 다함께 권태와 무의미성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라고 보렌은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래서 결국은 설교 무용론까지 나오게 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 까닭은, 우리 시대가 지니고 있는 언어 상실이라는 공통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언어란 그 역할이 사상과 감정과 뜻의 전달과 교류를 통하여 인격과 인격이 결합하고, 그래서 문제를 야기, 혹은 극복하는 계기를 만들며 따라서 삶의 변혁을 가져오게 하는 일인데, 현대의 언어가 과연 그러한 결합과 극복과 변혁을 일으켜 주고 있는가? 차라리 삶의 기계화, 인격의 상품화, 사회생활의 규격화 등으로 인하여 언어의 신비성이 사라지고 그 감화력이나 깊이 있는 영향력이 소실되어 가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언어 상실에 대한 솔직한 견해이다.

칼 바르트의 유명한 명제가 떠오른다. “신학자로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기에 하느님에 대하여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알고 있다. … 그리고 바로 그 일 때문에 하느님께 영광을 돌린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할 수 있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주일 아침마다 강단에서는 뜻도 모르는 말들이 지껄여지고 있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청중들은 앉아서 듣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주일이면 입을 다물기로 하였다.” 이것은 자못 익살스럽게 표현한 브레쉬 교수의 말이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그의 교황 비판에서 “그들은 혀를 잃었고 우리는 혀를 가졌다.”고 했으나, 현대에 와서는 이미 양자 모두 혀를 잃었다. 이것이 현대의 언어 상실의 아픈 현상이다. 그러니까 화자(話者)와 청중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어 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독백으로 남아 결국 허공에 사라지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만다. 이는 화자가 듣는 자의 입장 곧 그들의 문제나 고민 등을 옳게 파악하지 못하고 일종의 독재자로 청중 앞에 군림하려는 자세에 기인하는 수가 많다.

설교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설교자의 임무란 어떤 의미에서 감추어져 있는 사건의 발굴 작업, 그리고 그 의미의 파악과 전달이라고 볼 수 있다. “감추어져 있다.”는 말의 이해가 중요하다. 나는 설교라는 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보고 싶다. 시인이 시를 쓰듯, 소설가가 소설을 만들듯, 무용가가 안무를 하듯, 연출가가 무대 예술을 형상화하듯, 설교자는 설교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이해하고 준비해야 한다. 시나 소설을 쓰는 분들의 말을 빌린다면, 그들은 시나 소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해산(解産)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해산이란 곧 자기의 분신인 새로운 생명을 낳기 위하여 굉장한 진통을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설교자들이 설교라는 하나의 향기로운 작품을 이루기 위해 해산의 진통을 겪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착상, 구상, 문장화, 강단화의 과정 속에서 설교자는 격심한 아픔을 경험해야 한다.

설교의 극적 요인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말씀과 상황, 복음과 현실, 신적 사실과 악마적 사실 등이 설교 안에서 대결하여 극적인 과정을 거쳐 신의 승리(십자가의 승리)로 클라이맥스에 이르게 되는 일을 이름이다. 일본의 어느 유명한 설교가는 그의 옷 주머니에 언제나 작은 사전을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사전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가 “가장 좋은 말을 고르기 위해서”라고. 때로는 우리가 어떤 감정(느낌)이나 체험된 사실을 표현하려 할 때 무슨 말이 가장 적절할까를 몰라서 애쓰는 경험이 있다. 평소에 우리가 구사할 수 있는 어휘(語彙)가 너무도 부족한 탓이다.
풍부한 어휘의 구사, 그것은 독서의 양(量)과 정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말이 부족하니까 가끔 케케묵은 진부한 상투어가 튀어나와 식상을 일으키기도 하며, 남의 말을 흉내내는 앵무새 놀음도 곧잘 해서 거부 반응을 일으켜 주기도 한다. 때로는 시대적으로 효력을 잃은 죽은 말들을 사용하는 과오를 저지르기도 한다. 할 수 있는 대로 참신한 말을 값있게 또는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를 위한 독서의 주된 목적과 역할은 무엇인가?
존 웨슬리가 다음과 같은 말로 설교자들에게 도전을 준 적이 있다. “책을 읽지 않으려면, 사역을 그만두십시오.” 이 글에서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즉 어떻게 독서를 통해서 설교를 향상시킬 수 있을까? 독서는 어떻게 설교에 영향을 미칠까? 다양한 독서가 설교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 이런 질문에 답은 이와 같다.

첫째, 독서는 우리를 삶과 연결시킨다. 설교자들은 고립된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위험에 직면해 있다. 설교자는 기도를 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며, 성경 말씀을 연구하면서 설교를 준비한다. 그러나 만약 그 설교가 사람들이 실제 살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달과정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놓쳐버릴 것이다. 독서는 이러한 실제 삶의 모습들을 밝게 비추어 보여준다.

둘째, 독서는 창의성을 향상시켜 준다. 독서는 성경연구와 설교에 도움이 되는 그림들을 만들어 준다. 창의성을 통해서 설교자는 말씀을 가지고 그림을 그린다. 이러한 그림들을 통해 -그는 청중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개념들을 공중으로 보내는 대신에- 사람들이 복음의 좋은 소식을 이해하게 돕는다.

셋째, 독서는 ‘나눌 이야기’를 제공한다. 독서를 하다보면 자신의 설교가 향상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독서는 설교의 질을 향상시킨다. 독서를 통하여 설교는 새롭고 활기찬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풍요롭고 감동적인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온갖 잡다한 책이나 잡지, 또는 이상한 출처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독서의 주된 목적이 아니다. 그렇다면 독서의 주된 목적과 역할이 무엇인가? 정보를 제공하는 것(to provide information)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목적과 역할은 일반적으로 가장 좋은 자극을 주는 것(the best general stimulus)이다. 설교자에겐 언제나 자극이 필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책을 읽어서는 안 된다. 책의 임무는 우리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to make one think)이다. 우리는 레코드처럼 읽은 내용을 그대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독창적으로 소화해야 한다. 물을 흘려보내는 수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수로보다 샘에 더 가까운 사람이다. 독서의 역할은 일반적으로 우리를 자극하는 것이다. 생각하도록 자극하는 것, 스스로 생각하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가급적 내가 읽은 책의 내용을 철저하게 소화하도록 하라. 읽은 그대로를 되풀이 하지 마라. 내가 읽고 소화한 내용을 내 방식대로 전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학문의 주된 역할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레코드나 녹음기처럼 같은 내용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은 비극이다. 그런 사람은 얼마 못 가서 고갈될 것이며 난관에 봉착할 것이다. 그리고 본인보다 교인들이 훨씬 먼저 그 사실을 알아챌 것이다.

나의 독서는 주로 저녁 시간이고, 설교 작성은 주로 아침에 하는 편이다. 책은 주로 정독하는 편이고, 설교 준비는 꼼꼼히 한다. 그리고 설교 준비의 노하우가 있다면 나의 설교는 독서와 사색과 아침산책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아침산책과 설교 준비’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 싶다. 최근 내가 주로 읽은 책은 다음과 같다.

안식의 여정(헨리 나우웬)/ 당신은 무엇을 믿는가(더글라스 부아우어)/ 간디 자서전(한길사)/ 아름다운 산(대문사)/ 예수, 우리의 복음(헨리 나우웬)/ 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자(라로슈푸코)/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E.스탠리 존스)/ 고백(켈리 제임스 클락)/ 이 사람을 보라(강성모)/ 아름다운 동행(김학영)/ 예수의 의미(마커스 보그)/ 새 역사를 향한 순례(김경호)/ 기로에 선 그리스도교 신앙(로이드 기링)/ 장미나무 아래의 죽음(에리스 피터스)/ 파우스트(괴테)/ 우언산책(김영)/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윌터 윙크)/ 슬로우 라이프(쓰지 신이치)/ 경제세계화와 아가페운동(KNCC)/ 토스토예프스키 세계관(N. 베르쟈에프)/ 하느님의 모략(달라스 윌라드)/ 나누면 남습니다(한희철)/ 로마인 이야기(시오노 나나미)/ 자유인의 풍경(김민웅)/ 기도(오강남)/ 우리를 위한 하느님(캐서린 모리 라쿠나)/ 예수 없는 교회(한완상)/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드니 로베르, 베로니카 자라쇼비치)/ 말이 인격이다(조항범)/ 장자산책(이현주)/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법정)

당신의 설교가 지금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가? 그것을 알고 있는가? 닥터 수스의 유명한 말대로 “아! 당신이 갈 그곳!”(Oh, The Places You Will Go!)을 기대하라.

글쓴이 박철 목사(좁은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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