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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꾸준히 성실하게 행동하는 것
주일설교문(18. 4. 29) 부활절 다섯 번째 주일
2018년 04월 29일 (일) 19:57:58 백창욱 baek0808@hanmail.net

주일설교문(18. 4. 29) 부활절 다섯 번째 주일
요일 4:7-21 “사랑해야 합니다”

남북정상회담이 무사히 성공리에 끝났습니다. 문재인대통령과 김정은위원장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악수하고 군사분계선을 넘어갔다 넘어오는 장면은 매우 큰 상징을 남겼습니다. 지금까지는 상호간 넘나들 수 없는 군사분계선이었지만, 두 정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들었듯이, 앞으로는 한민족 모든 겨레가 자유롭게 넘나드는 평화의 상징이 될 것입니다.

   

한겨레신문 토요일자는 신문 겉장 두 전면에 두 정상이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면을 사진으로 실었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신문 사진에서 이렇게 큰 사진은 처음입니다. 그만큼 어제 두 정상의 만남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언론이 판문점에서 일어나는 일거수일투족을 생중계하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작년에는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할 정도로 긴장과 대결이 팽팽했던 것과 비교하면 지금의 정세는 정말 하늘이 보우하사 입니다.

어제 소성리 현장기도소 1주년 행사 사회 본 박연미장로님이 그 날이 도둑같이 올 거라고 했는데, 정말 도둑같이 왔습니다. 전체 일정 중에서 관심이 간 부분은 도보다리에서 행한 공개밀담이었습니다. 정상회담에서 흔하게 보는 통역자나 배석자없이 정상 단 둘만의 자리였습니다. 두 나라 정상이 통역없이 대화한다는 것 자체가 분단된 남북현실의 특수한 사정을 보여줍니다. 김정은위원장의 말처럼, 우리는 하나의 핏줄, 하나의 언어, 하나의 역사, 하나의 문화를 가진 한민족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김정은위원장은 바깥세상에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했는데, 35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지도자의 품격을 잘 갖추었습니다. 다만 비만과체중으로 건강이 걱정입니다. 앞으로 남북합의를 계속 실행하기 위해서는 살을 좀 빼야합니다.

판문점 선언 3조 13개항은 앞으로 한반도평화를 열어가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그동안 쟁점이었던 남북간 현안을 모두 담았습니다. 양 정상도 말한 것처럼, 합의문으로만 그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합의문을 실천해서 현실이 되도록 정권 차원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계속 추동해야 합니다.

예수살기 총회 10주년 선언문에서 한반도평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한반도 평화는 생존문제가 됐다. 남북분단 극복은 무슨 체제로 무슨 주의로 정당화할 수 없는 민족의 절체절명 과제가 됐다. 임시협정인 정전협정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임계점에 달했다.” 그런데 이번 판문점 선언문 3조 머리말이 예수살기 총회 선언문 내용과 맥락이 거의 비슷했습니다. “남과 북은 한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하여 적극 협력해 나갈 것이다. 한반도에서 비정상적인 현재의 정전상태를 종식시키고 확고한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역사적 과제이다.” 예언자가 앞일을 미리 내다보는 점술가는 아니지만, 민족을 사랑하고 평화를 갈망하는 깨어있는 지각과 분별이 앞날을 미리 예측하게 합니다.

소성리 사람들의 바람은 딱 하나입니. 이 평화정세가 사드철회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성리에 닥친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4월 23일(월) 정권은 골프장 사드기지에 미군 숙소를 지어주기 위해 경찰 삼천 명을 동원해서 소성리 사람들 80여명을 강제 진압했습니다. 진압과정에서 스무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자동차 사이에 파이프를 연결하고 파이트 안에 팔을 넣고 고리를 걸어서 고정시켰는데, 경찰이 무지막지하게 고리가 떨어질 정도로 팔을 잡아당겼습니다. 사람이 다치는 것은 개의치 않습니다. 오직 진압, 진압 뿐입니다. 그날 하루종일 비가 왔는데 감금장소에 갇혀서 상황이 끝날 때까지 비를 쫄딱 맞았습니다. 그 뒤에도 계속 경찰병력을 주둔시켜서 마을입구부터 진밭교까지 공사인부를 호위하여 출퇴근시키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모든 곳이 따뜻한 봄인데, 오직 소성리만 차가운 겨울이고 계엄상태입니다. 지금도 주민과 지킴이들은 아침저녁으로 진밭교에서 평화행동을 합니다. 그러면 경찰은 그들을 끌어내고 감금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강정에서 지겹도록 겪은 일이 소성리에서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은 평화가 오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 이서, 삼서 모두 요한계 공동체 문서입니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유다계 그리스도교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유다교와 한 울타리에 있었습니다. 회당에서 같이 예배보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토라를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66-70년 1차 독립전쟁 때 악화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독립전쟁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그리스도교가 회당에서 나온 때는 85년경입니다. 이 때 바리새들은 18조 기도문을 개작했는데, 제 12조항에 이단자들에 대한 저주를 삽입했습니다.

나사렛사람들(유다계 그리스도인들)도 이단자에 들어갔습니다. 이 기도문을 회당 예배 때마다 바쳤습니다. 따라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85년경부터는 회당 예배에 참석할 수 없게 됐습니다. 자기 입으로 자신들을 저주하는 말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때의 상황, 즉 유다계 그리스도교와 바리새의 갈등이 요한복음의 배경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애제자가 썼습니다. 요한복음에 자주 나오는 표현,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바로 이 사람입니다. 그리고 요한일서는 예수님의 애제자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썼습니다. 1세기 말, 박해의 위기를 겪고 있는 소아시아의 요한계 신자공동체에 보낸 편지입니다.

종종 말씀드리듯이, 성경의 모든 책은 일차독자들이 절체절명의 신앙위기에서 나온 책입니다. 위기상황에서 하나님을 믿고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치열한 대안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감동과 영감을 주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저 한가로운 상황에서 나왔으면 결코 생명의 책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닥친 위기는 무엇인가요? 요한복음이 요한계 교회와 유다교의 대결이라면, 요한일서는 요한계 교회와 초기 영지주의의 대결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거짓 그리스도인들과 싸우는 변증을 주로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이단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적대자’(요일 2:18), ‘거짓말쟁이들’(요일 2:22), ‘거짓 예언자’(요일 4:1) 입니다. 그들은 어떤 거짓을 행하나요?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사람이 곧 그리스도의 적대자입니다.”(요일 2:22)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을 이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시인하는 영은 다 하나님에게서 난 영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은 다 하나님에게서 나지 않은 영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적대자의 영입니다.”(요일 4:2,3) 두 사례의 공통점을 볼 때, 그리스도의 적대자들은 예수가 육신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어째서 이들은 예수의 육신을 부인하나요? 여기에 영지주의 신학의 맹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철저히 이분법적 사조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론에 큰 오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성을 지닌 예수와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 양분했습니다.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는 강생하지 않았고 죽임을 당한 적도 없다고 합니다. 예수 가현설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지도 않았고 그러는 척 환각작용을 불러일으켰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택도 없는 이야기가 파급력이 있을까 싶은데,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인 에릭 엠마누엘 슈미트의 『빌라도의 복음서』라는 책을 보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기절상태에서 내려왔다는 설에 사람들이 현혹당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소설에서도 예수가 가사상태에 빠진 설정을 이야기소재로 삼는 것을 보면, 실제 1세기 영지주의자들의 가현설 주장도 사람들에게 꽤 널리 퍼졌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거듭거듭 강조하는 것은 “사랑해야 합니다”입니다. 이 말의 어감을 잘 생각하십시오. 사랑에 대한 의무를 강조합니다. 사랑할 수 없는 환경이고 상황이지만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존재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신데, 공동체가 사랑을 잃으면 존재이유가 실종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존재기반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공동체의 기원인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신 이유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요일 4:9)

하나님이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보냈습니까? 세상을 유람하라고?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통치술을 배우라고? 우리는 하나님이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에 대해 좀 무감각합니다.
그 다음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요일 4:10) 하나님이 외아들을 제물로 보내셨습니다. 제물로. 세상에 어느 왕이 자기 외아들을 제물로 삼나요? 백성을 제물로 삼지, 자기 아들을 제물로 삼는 왕은 없습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 하나님께서 자기 외아들을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제물의 명칭이 뭔가? ‘화목제물’입니다. 화목. 하나님과 세상을 화목시키고, 사람과 사람을 화목시키고, 사람과 자연을 화목시키고. 세상을 화목하게 하기 위해 외아들을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그 다음 말씀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요일 4:11)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요한일서가 말하는 사랑의 대상은 요한계 교회 형제들입니다. 그들은 외적으로는 유다인들과 세속적인 세상과 대결해야 하고, 내적으로는 영지주의 이단자들을 척결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요한계 교회의 사랑은 그들의 결속을 위한 배타적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사랑은 어떠해야 하나요? 요한계 교회는 그 사회의 소수였기 때문에 공동체 유지를 위해 자기들끼리의 사랑이 절실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교회의 상황은 다릅니다. 되레 교회는 여지껏 집단이기주의적으로만 사랑해 와서 문제였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눈감고 귀닫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만나서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갑니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갑니다. 그리고 상처를 싸매고 치료해 줍니다.

사랑하려면 일단 고통받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야 합니다. 피하여 지나가 버리면 절대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류교회는 자기들끼리만 사랑하느라고 정작 사랑이 필요한 곳은 피하여 지나갑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세월호 희생자와 부모를 모독하고, 반공이념에 쩔어있고, 미국만 쳐다보고, 도무지 예수가 평화를 위해 오셨다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밟히고 있습니다.

어제 소성리 현장기도소 1주년 행사에서 느낀 게 무엇인가요? 사랑은 꾸준히 성실하게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민대책위 이종희위원장 말씀이 기독교현장기도소가 조금 있다가 갈 줄 알았는데, 진정으로 있는 것 보고 마음이 달라졌다고, 자기도 소성리에서 받은 사랑의 빚을 다른 현장에 가서 갚겠다고 했습니다. 고통받는 사람에 대해 외면하지 않고 가까이 가서 같이 살고 같이 고통을 겪는 사랑을 사람들이 존중합니다. “자녀 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요일 3:18)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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