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참 묘한 구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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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참 묘한 구석이 있다
  • 김홍한
  • 승인 2018.03.15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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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유적지 돌아보러 제주도 간다

4.3 유적지 돌아보러 내일 제주도에 간다. 그래서 글 한 꼭지.....


조선 말 외세로 프랑스 신부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포교의 목적으로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조선과 프랑스가 수교한 이후 그들은 그전의 박해를 만회라도 하듯이 치외법권 이상의 특혜를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고종임금으로부터 ‘如我待’(국왕처럼 대우하라)는 신표를 가지고 있었다. 狐假虎威(호가호위)라 천주교 신자들도 그들의 힘을 배경삼아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그들 앞에 공권력은 무력했다.
아관파천이후 친러파에 의하여 주도된 광무개혁을 위하여 조정은 돈이 필요하였다. 조정은 전국각지에 징세관을 파견하였다. 제주도에도 그들이 들어왔다. 천주교인들이 그들과 손잡고 징세에 나섰다. 당연히 제주인들의 반발이 있었다. 다른 여러 요인, 이를테면 프랑스 세력을 견제하고자한 일본의 역할, 자신들을 징세관들로 부터 보호하려는 지방 토호들의 반발, 외래종교에 대한 반감 등도 있었다. 결국 1901년 5월 전쟁과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분노한 민중들은 천주교신자들을 포함하여 700여명을 살해하였다. 그 민중들의 지도자가 이재수여서 “이재수의 난”이라 하고 천주교인들은 자신들이 수난을 당하였다고 하여 “신축교난(辛丑敎難)”이라고 한다.

나라가 온통 일본에게 넘어간 이후, 특히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 제주에는 6만 명이나 되는 대규모의 일본군대가 주둔했다. 당시 제주인구가 20여만 명 일 때이다. 그리고 들어온 일본인만큼이나 되는 약 6만 명의 제주 인이 일본으로 돈 벌러 갔다. 제주는 본토인 한반도 보다 일본열도에 더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남양군도에서 일본군이 패전을 했다. 그 이후 미군의 공격으로 제주도가 초토화 될 것이라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파다하게 퍼졌다. 그리고 육지로의 피난이 이어졌다. 실제로 제주를 떠나는 피난민의 배가 피난중 미군어뢰에 맞아 폭파되기도 하였다.
해방이 되었다. 온 한반도가 해방의 기쁨으로 들떠 있었지만 제주의 경우는 좀 달랐다. 6만 여명에 달하던 일본군이 떠나고 대신 6만 여 명의 제주인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다. 대부분의 경제를 일본에 의지하고 대부분의 생필품을 일본으로부터 들여왔던 제주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실업자는 넘쳐나고 물자는 한없이 부족했다. 또한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이들은 대부분 젊은이들이었고 일본으로부터 새로운 사상, 즉 공산주의 사상에 자극을 받은 이들이 많이 있었다. 일본군이 돌아간 그 자리에 1945년 11월 10일 미 6사단 20연대가 주둔하고 군정이 시작되었다.
미군, 이데올로기, 민족주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 제주인들의 감당할 수 없는 극심한 가난은 그 어느 폭풍보다도 큰 폭풍을 예고하고 있었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이 시위 군중에게 발포 6명 사망 8명 중상, 2,500명의 청년이 구금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일 년 후에 일어날 4.3항쟁의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결국 1948년 제주도에서 4.3항쟁이 일어났다.

“미군은 즉시 철퇴하라!”
“망국적 단독선거를 절대 반대한다!”
“투옥중인 애국자를 무조건 즉각 석방하라!”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은 즉시 돌아가라!”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
“응원경찰대와 테러집단은 즉시 철수하라”
“조선통일독립 만세”

할 말을 한 것이 죄다. 너무 당연한 말을 하는 것이 때로는 크고도 큰 죄이다.
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유격대 총사령관 김달삼의 회담이 성공되어 전투가 중지되었는데 피에 굶주린 극우인사들은 그것이 못마땅했다. 공산당과 회담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토벌전이 벌어졌다. 집단 학살이 자행되고 169개 마을 중 130개 마을이 불태워졌다.

제주도를 바람 많고 돌 많고 여자가 많은 삼다도라 했던가. 왜 여자가 많을까? 삼신할머니가 딸만 점지해 주셔서 그럴까? 여자가 많다니 호색한들이 군침을 흘린다. 참으로 역사를 모르는 바보들이다. 그 여자들은 허리가 버들가지 같은 아가씨가 아니다. 남편 잃은 과부들이고 자식 잃은 할머니들이고 아비 잃은 고아들이다.

제주 4.3항쟁은 1954년 9월 21일에 한라산금족지역을 전면 개방함으로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사람은 참 묘한 구석이 있다. 제주의 청년들로 해병대를 조직하여 전쟁터에 보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인민군에 대해서 적개심에 불탔다. 그래서 그 어느 부대보다도 용감하게 싸웠다. “나는 빨갱이가 아니다”는 것을 그렇게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부모형제를 죽인 대한민국에 그렇게 항거했다. 그들의 싸움은 적과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폭도로 몰렸던 것에 대한 명예회복이었다. 다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고, 자신들은 그런 학살을 당할 이유가 없다고 그렇게 항거한 것이다. 해병대 신화는 그렇게 만들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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