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논평 환경/기술 지역/농업 전통/문화 미디어/사람 정보/게시판
  편집: 2018.10.18 목 14:07
> 뉴스 > 시사/논평 > 칼럼 | 종교영성
     
하나님을 지향하는 존재로
주일설교문 대림절 두 번째 주일
2017년 12월 12일 (화) 10:59:15 백창욱 baek0808@hanmail.net

주일설교문(17. 12. 10) 대림절 두 번째 주일

벧후 3:8-15a "하나님을 지향하는 존재로”

대법원 판결을 받은 지난 주 화요일 저녁, 발언요청을 받아서 김천촛불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작년 8월에 시작해서 하루도 안 쉬고 날씨와 기후에 관계없이 472일째 사드철회 촛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이 477일째입니다. 대구에서 기차타고 김천으로 가는 중, 전날 집회를 소개하는 글을 읽었습니다. 첫머리에 올린 글이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버티는 것만으로도 잘하고 있다.” 촛불을 밝히는 김천시민들을 위해 올린 글이지만, 딱 내 심정을 표현해 주었습니다. 2012년 9월 20일 압수수색을 당한 날부터 햇수로 6년 동안 잘 버틴 내 자신을 위로하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잘 버티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제일 위기는 일심에서 유죄선고를 받을 때였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다 무죄나오는 판결이 유독 대구에서 유죄 나온 것도 기막혔고, 또 항소심과 대법까지 이 지겨운 싸움을 계속 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까마득하고 지겨웠습니다. 만사가 귀찮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항소를 포기하고 이 고역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기도하고 생각하면서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결의를 다시 했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만약 내가 항소를 포기하면, 국가보안법으로 장난치는 공안에게 계속해서 정당성을 부여하는 일이 되고, 또 민간차원의 통일운동이 족쇄를 차는 일이 되기 때문에, 공안이 좋아하는 결과가 돼서는 결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검사놈들이 이겼다고 득의양양할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그냥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해 보자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오늘 이런 결과를 맞이해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국가보안법이 왜 나쁜가요? 국가보안법은 양심을 침해합니다. 양심은 사람의 지성소입니다. 누구도 건드려서는 안 되는 고귀한 영역입니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은 사람의 지성소를 막무가내로 침탈하고 괴롭힙니다. 추궁합니다. 너는 왜 그런 양심을 가졌냐고. 그러면 할 수 없이 변명해야 합니다. 내 양심은 죄가 없다고. 이런 과정 하나하나가 사람을 구차하게 만듭니다.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언론출판, 집회결사의 자유, 이런 게 다 소용없도록 합니다. 분단시대를 악용하는 가장 못 쓸 적폐입니다.

어제는 박근혜가 국회에서 탄핵가결된 지 일 년 되는 날입니다. 오늘은 유엔이 정한 세계인권의 날입니다. 노무현정부 때까지는 국가보안법이 거의 사장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정권 때부터 다시 국가보안법이 되살아났고, 박근혜정권 때도 활개치는 세상이 됐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나요? 악한 정권일수록 인권감수성이 형편없고, 권력유지를 위해 시민을 옥죄는 악법실행을 남용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유엔은 국가보안법이 인권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악법이라고 폐지할 것을 한국정부에 여러 번 권고했습니다. 이번 정권은 과거정권과 다르다는 표시로 무엇보다 국가보안법을 철폐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대림절을 지내는 우리에게 매우 적절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이유에 대해 궁극적인 내용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말씀 계기는 3,4절입니다. “여러분이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자기들의 욕망대로 살면서, 여러분을 조롱하여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어디 갔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 때부터 그러하였듯이 그냥 그대로다."(벧후 3:3,4)

악한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이루어지겠냐고 조롱합니다. 하나님말씀을 우습게 여깁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베드로후서가 말하는 조롱이 비단 이 때만은 아닙니다. 지금도 이와 똑같이 말하는 사람이 허다합니다.

조롱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만물이 창조 때부터 그대로 있지 않느냐, 무수한 세월이 흘렀지만, 그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즉 너희가 말하는 재림이니 심판이니 종말이니 이런 말, 다 부질없는 말 아니냐’ 그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조롱에 대한 변증입니다. 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대체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요? 그리고 이 말씀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주님의 시간개념은 사람의 시간개념과 차원이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가요? 사람의 시간개념은 직선입니다.

해와 달의 자전과 공전활동에 따라, 초, 분, 시간, 하루, 한 달, 일 년 이 년... 이렇게 시간이 흘러서 년 수가 쌓이고 사람 인생 칠십, 팔십이 됩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그런 세월이 쌓이고 싸여서 천 년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일생과 비교하면 천년은 까마득한 시간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고 오직 현재만 삽니다. 과거나 미래는 사람의 영역이 아닙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고, 미래를 미리 살 수 없습니다. 해의 공전활동을 임의로 조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과거나 미래를 탐구하는 것은 오직 상상으로만 가능합니다. 여기까지가 사람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유추가 가능합니다. 사람이 비록 상상으로나마 과거나 미래 여행이 가능할진대, 하나님은 실제로 과거도 미래도 주관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성경은 시간흐름 따라 이야기가 쭉 진행합니다. 그건 하나님이 사람의 시간개념에 눈높이를 맞춘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성경도 시간개념을 벗어나는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여호수아 10장과 열왕기하 20장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기브온과 화친을 맺고나서, 기브온을 침략한 예루살렘왕을 비롯한 이방연합군을 추격할 때, 시간이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외쳤습니다. “태양아, 기브온 위에 머물러라! 달아, 아얄론 골짜기에 머물러라! 백성이 그 원수를 정복할 때까지 태양이 멈추고, 달이 멈추어 섰다. ‘야살의 책'에 해가 중천에 머물러 종일토록 지지 않았다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수 10:12,13) 해와 달이 공전과 자전활동을 멈추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예는 왕하 20장에서 히스기야가 병들어서 죽게 되었을 때입니다. 히스기야가 주님의 자비를 구하자,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다시 살려주기로 합니다. 그 때 히스기야가 병 나을 징조를 구하자, 주님은 해 그림자를 십도 앞으로 나아가게 할지, 십 도 뒤로 물러나게 할지를 택하라고 하자, 히스기야는 앞으로 가는 것은 쉬우니, 뒤로 물러가게 해 달라고 구합니다. 그 때,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 기도하고 해 그림자를 뒤로 십 도 물러나게 했다.(왕하 20:1-11)

이 두 사례는 무엇인가요? 해와 달은 자전과 공전을 통해 시간이 가게 하는 결정적인 자연체입니다. 사람도 예외없이 이 시간흐름의 법칙 따라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해를 멈추게 하거나 또는 뒤로 가게 했다는 것은, 하나님은 사람의 시간개념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표시입니다. 시간의 주권자이고, 그 위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시간을 초월하는 개념에서는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세월이 무수히 흘렀지만 아무 일도 없지 않느냐고 하는 사람들의 판단이 틀렸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시간개념에서 시간이 무수히 흘렀을 뿐, 하나님의 시간개념에서는 하루 이틀 같은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시편에 똑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시 90:4)

그렇다면 약속이 쉬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주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시므로.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오래 참으심을 모르고 사람이 자기 욕망대고 살면서 말씀을 조롱하는 세태에 유혹돼서 말씀을 의심하거나 떠나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우리를 보고 회개해야지, 우리가 그들에게 넘어가는 일은 배교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주님의 날, 곧 세상 종말에 대해 독특한 표현이 나옵니다.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진다. 원소들은 불에 녹아버린다.”(10절) 12절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반복합니다.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버린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요? 베드로후서 저자는 어떤 근거로 종말현상을 말하나요? 무슨 계시를 받았나요? 그 날에 대한 환상을 보았나요? 단서는 6,7절입니다.

“또 물로 그 때 세계가 홍수에 잠겨 망하여 버렸다는 사실을, 그들이 일부러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있는 하늘과 땅도 불사르기 위하여 그 동일한 말씀으로 보존되고 있으며, 경건하지 못한 자들이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할 날까지 유지됩니다.”(벧후 3:6,7) 하나님이 노아 때 이미 물로 세상을 끝낸 일이 있듯이, 이번에는 불로 세상을 끝내실 거라는 상대적인 예언입니다.

주님약속이 디디게 보이는 것은 오래 참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회개에 이르기를 기다리는 것이고, 세상종말은 불로 끝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날을 기다리는 우리는 어떠해야 하나요?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벧후 3:11,12) 또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13절)

우리가 기다리는 하나님의 날, 새 하늘 새 땅은 우리에게 어떻게 올까요? ‘예수천당’ 구호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하늘 새 땅을 형상화한 그림을 보면, 저 우주 공간 어디쯤에 우리를 위한 처소가 마련돼 있습니다. 말하자면, 전혀 다른 영역에 있는 새 하늘 새 땅으로 우리가 들어가든지, 아니면 다른 공간에 있는 새 하늘 새 땅이 우리에게 올 것(떨어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새 하늘 새 땅은 우리가 다른 데로 들어가거나 다른 데서 오지 않습니다. 내가 발붙이고 사는 하늘과 땅이 새롭게 변모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됩니다. 근거가 무엇인가요? 노아 때와 비교해보십시오. 하늘과 땅이 홍수 심판 이후 새 하늘과 새 땅이 됐습니다. 그렇다면 불의 심판으로 오는 종말 이후 하늘과 땅도 그럴 것입니다. 다만 차이는 노아 때는 배교자들이 모두 멸망했고 신실한 사람들만 남았고, 다가올 종말세상은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13절)이 됩니다. 즉 새 하늘 새 땅은 자연의 물리적인 변화도 있겠지만,(신음하는 피조물의 해방도 있으므로) 더 중요한 변화는 그 안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지향하는 사람으로 존재가 변하는 세상입니다. 그 날을 앞당기라고 했으므로 하나님의 날을 기다리는 우리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으로 이 땅에 정의가 깃들게 해야 합니다. 이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잊지 않고 지향하고 살면, 우리는 이미 새 하늘 새 땅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새 하늘 새 땅이 주는 감각은 바로 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내 존재가 변하면 그전까지 지겹고 떠나고 싶었던 사람도 공간도 일도 전혀 새롭게 다가옵니다. 즉 지금 내가 있는 공간에서 하나님을 충만히 모십시오. 새 하늘 새 땅의 요체는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과 함께’ 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지향하는 존재로 변화돼서 대림절이 더 풍성하기를 기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백창욱의 다른기사 보기  
ⓒ 새마갈노(http://www.eswn.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곡기를 끊은 하느님
폐허의 고향
온전한 따름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분단역사 사생아 국가보안법 철폐하라
나갈까 말까
숲이 심장처럼 펄떡이고 있다
행복,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나를 하늘에 드려야 한다
플라스틱 프리 카페 방문 서포터즈 모
인류, '호모 데우스'를 꿈꾸다
<유전자 정치와 호모 데우스>는 1부 맞춤아기와 유전자 편집 ...
로컬미식라이프, '배려의 식탁' ...
노동자의 이름으로
한국교회 지붕 햇빛발전소 설치를 ...
9월 3일(월) 오후2시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교...
신재생에너지로 90% 전력공급 가...
독자 설계 잠수함 건조
포천 평화나무농장 생명역동농업 산...
온생명살림 기행팀과 함께 평화나무 농장을 방문한 내용을 정리하...
쓰레기를 줄이고 재활용
'호국대성사 서산대제'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서대문구 북가좌동 384-19, 성도빌딩 5층 | 전화 : 02-747-3191 | 편집인 010-8413-1415 | 제호 : 새마갈노
등록번호 : 서울 아03061 | 등록일 2014.03.24 | 발행인 : 양재성 | 편집인 : 류기석 | 청소년보호책임자 : 류기석
Copyright 2009 새마갈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esw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