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작은이들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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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작은이들의 기적
  • 양재성
  • 승인 2017.11.27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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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이들의 기적
마태복음 25장 31~46절.

▪ 작은 자
진정한 종교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그 중심에 품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지극히 작은 민족이었습니다. 아니 그 이전엔 이집트 제국의 노예들이었습니다. 외관상으로는 정말 볼품없는 떠돌이 유랑민 등 허잡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왜 그런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 마음이니까요. 추측하기는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들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할 때도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들에 비하면 작디작은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중에서도 고아와 과부, 어린이들을 더 없이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아예 공동체의 강령에 고아와 과부를 환대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을 고아와 과부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세상에서 별 볼일 없는 자들을 귀히 여기고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신앙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반전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하나님 앞에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성공할수록 하나님 앞에선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니 세상에 성공하려고 애쓰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성공하는 자들이 되십시오.

▪ 예수 없는 교회
아주 어린 시절에 들었던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흑인 사업가가 사업차 멀리 길을 나섰다가 주일을 맞았습니다. 당시는 아직도 흑인교회와 백인교회가 따로 있었던 터라 흑인 사업가는 그 도시에서 흑인 교회를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흑인교회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신실한 흑인 사업가는 백인교회를 찾아와 이곳엔 흑인 교회가 없으니 여기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다며 간청하였지만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배시간은 되었고 그는 예배당 밖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예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과 비슷하게 생긴 분이 가까이 오더니 왜 안 들어가고 여기에 있냐고 묻기에 사실 대로 이야기하니 자신이 예수라고 말하더니 나도 사실은 이 교회에 못 들어가고 있다고 말하더랍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 없는 교회가 많겠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가 없는 교회, 아니 예수가 들어가 수 없는 교회도 있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교회당을 짓고, 멋진 성가대의 찬양이 있고 은혜로운 설교가 있어도 그 교회당에 예수님이 안 계시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얼마 전, 한겨레신문 만평에 보니 교회당에 앉아 있던 예수님이 서둘러 그 교회당을 빠져나오는 장면을 그렸더군요. 그 교회는 종교세 과세 때문에 포항에 지진이 발생했다고 설교하고 있었고 예수님은 여기가 교회인줄 알고 들어왔는데 교회가 아니었다며 빠져나오는 장면입니다. 유력 일간지가 교회와 기독교를 풍자 비판하고 있습니다.
명성교회의 세습으로 초대형 교회 시대는 끝났습니다. 아니 그 이전에도 기독교는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세월호 진상규명 반대집회, 성조기 집회가 그것입니다. 그 배후엔 초대형교회들이 포진되어 있었고 그 초대형교회엔 국정원, 검찰청 등 최고의 권력기관원들이 신도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배후에는 자본, 맘몬이 있습니다. 국정원 댓글이나 통치자금 불법 유통이 바로 그것입니다. 언론의 배후에도 권력이 있었고 그 권력의 배후엔 역시 자본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나를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나를 움직이는 것이 돈이라면 과감히 가치 수정을 해야 합니다. 돈의 굴레에 들어가는 순간 거대 자본집단의 통제에 들어가고 세계금융권의 제재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되면 거대 국가도 붕괴됩니다. 아주 꼼짝을 못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신자본주의 즉 신제국주의의 방식입니다.

▪ 하나님과 자본
지난 주 금요일 예수살기 마을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용인에 있는 고기교회입니다. 안홍택 목사는 27년째 그곳에서 목회를 하고 계셨습니다. 어떤 목회를 할까 고민하며 기도하던 중 어느 날 찾아온 예수님은 교회를 둘러보더니 교회당으로 들어가셨고 강단 앞으로 나가시더니 춤을 추시더랍니다. 그 뒤 안홍택 목사는 놀이목회를 지향했습니다. 교회는 늘 거기에 그냥 있으면 되었습니다. 그러면 필요해서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냥 잘 놀고 있으면 지역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자고 제안해왔습니다. 그 때 함께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경험한 가장 무서운 것이 자본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방식대로 자본을 넘어서는 것은 더 큰 자본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의 방식을 찾았습니다. 자본을 넘어서는 길은 가난하게 사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과 자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단언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가난한 자들이 천국의 주인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결국 기독교는 가난한 종교이며 가난을 지향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니 성공하려는 자는 부자가 되려는 자는 기독교인이 되면 안 됩니다. 혹시 세상에서 성공한 교회가 있다면 그건 가짜일 확률이 높습니다. 여러분 중에 부자가 되고 싶고 성공하고 싶은 사람은 기독교를 떠나십시오.

▪ 심판과 구원
추수를 마쳐가는 늦가을 정취가 좋습니다. 여름내 땀 흘려 만든 알곡을 모두 주인에게 바친 빈들은 텅 빈 충만을 삽니다. 자신이 기른 것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우기지 않고 모두 다 내어주는 빈들, 그래서 빈들은 성스럽습니다.
농부는 추수를 하면 반드시 알곡과 쭉정이를 가릅니다. 알곡은 곳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웁니다. 이와 같이 마지막 날에 우리도 행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네 삶은 반드시 언젠가는 하나님과 셈을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복음서의 말씀은 예기치 않은 때에 내 삶을 하나님 앞에 펼쳐놓고 시시비비를 가리며 셈 즉, 심판을 받을 것임을 가르칩니다. 그 심판의 기준이 놀랍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어떻게 대했느냐가 심판의 기준입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은 천사들과 같이 강림하실 것이고 그 때 사람들을 불러내어 심판하십니다. 당신의 오른편엔 의인들을 세우고 왼편엔 불의한 자들로 나눕니다. 그리고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겐 당신이 가난하고 헐벗고 고난을 받을 때 함께 해 주었다고 칭찬하십니다. 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신이 가난하고 헐벗고 아픈 때에 외면했다고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칭찬을 받은 자도 책망을 받은 자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두 진영 모두 주님께 그렇게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서야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당신에게 행한 것이고, 나아가 하나님께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신앙의 선언입니다. 이 선언이 예수가 죽을 수밖에 없는 계기가 됩니다. 기득권 종교는 이 예수의 선언을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권력과 야합하여 다져진 종교입니다. 불의한 금전으로 지지되고 있는 종교권력입니다. 자신을 부정하는 이 엄청난 선언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가장 작은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 행하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은 가장 작은 자들의 모습으로 이미 와 계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고 볼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모든 존재를 지으신 창조주이지만 정작 당신은 누구에 의해 지음 받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이 지극히 작은 자들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는 게 예수님의 깨달음이었고 그 선포는 기독교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 사회적참사특별법
사회적 참사의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사회적참사특별법) 수정안이 24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습니다. 표결 결과는 216명이 출석해 찬성162명, 반대 46명, 기권 8명으로 가결됐습니다. 당초 어려울 수도 있다고 염려했지만 가결되는 모습을 보면서 국회도 많이 바뀌고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특조위의 활동기간은 ‘기본 1년, 위원회 의결로 1년 연장’으로 최장 2년까지 가능합니다. 특조위는 필요시 특별검사 수사를 국회에 요청할 수 있고, 해당 상임위원회인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90일간 의결을 하지 않으면 본회의에 자동 상정돼 표결에 부치게 됩니다. 또 진상조사 방법과 관련해 1기 세월호특조위와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가 조사를 완료한 사안에 대해서는 조사기록, 재판기록 등의 열람·등사·사본 제출 요구 등의 방법으로만 조사할 수 있습니다. 조사관의 동행명령에 응하지 않은 조사 대상자에게는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세월호 진상 조사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늦었지만 다행입니다. 바라기는 그간 궁금했던 것들, 은폐했던 사실들이 모두 소상히 밝혀지길 기대합니다. 법이 통과될 때 세월호 어머니들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마음이 짠했습니다. 아직도 이분들을 울리는 사회가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벌써 진실이 규명되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분들이 아직도 거리에서 호소하고 있는 모습은 차라리 거룩해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작은 자들이 대한민국을 새롭게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대한민국을 구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 구원과 메시야
모든 종교의 핵심은 구원론입니다. 기독교의 구원론은 메시야론입니다 이 메시야 교리는 유대교의 유산인 구원의 주체로서의 메시야 기대를 예수에게 적용하여 만든 교리입니다. 예수의 고난을 토대로 삼았고 후기유대교의 부활사상을 예수에게 적용하여 예수의 부활을 선포했습니다. 부활과 연동하여 예수를 승천, 예수의 재림 설을 제시하여 구원사건에서 역사성을 제거하고 초자연적인 환상과 기대로 만들었습니다.
70년대에 다가설 때까지만 해도 한국의 신학자들은 서구신학과 그것의 메시야 기대에 안주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서울 평화시장에서 전태일 사건이 발생하면서 일부 신학자들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군사 독재와 경제적인 착취 속에서 짓밟힐 대로 짓밟히고 죽어가면서도 다시 살아나서 성장해가는 민중의 사회 전기를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신학과 민중의 전기 사이에서 마음의 평정을 잃고 괴로워하던 신학자들은 기득권자들에게 정죄당하고 있는 민중들의 투쟁을 과감하게 옳다고 인정하면서 그들의 편에 섰습니다. 그 결과 해임과 투옥으로 이어지는 고난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감옥 안에서 그들은 서구신학이 기득권자들의 억압과 착취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짜 맞추어진 논리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변적인 기득권자들을 위한 논리 대신 사람대접도 못 받는 민중들의 경험에 신학의 안테나를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고난 속에서 새롭게 출발한 민중 신학자들은 민중의 눈으로 성서를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성서가 민중 오클로스의 경험을 이야기 하고 있고 그 민중의 경험이 바로 우리 민중의 경험과 일치하며 따라서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가 곧 민중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때부터 신학자들은 민중이 메시야라고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전통적인 메시야 교리가 작업해 놓은 개인적인 영웅주의적인 요소가 집단개념으로 환원되었습니다. 외부적이고 타력에 의한 구원관이 자력에 의한 구원관으로 원상 복귀했습니다. 초자연적이고 환상적인 요소가 역사성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의 고난성은 그대로 유지되고 예수 개인의 고난이 예수를 포함한 모든 민중의 고난과 동일시되는 방향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민중의 고난이 구원의 힘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민중메시야 론이 성립이 됐습니다. 민중 메시야 론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반전을 가져왔습니다. 제국을 대변하고 기득권을 옹호했던 초월적인 기독교를 민중의 종교로 땅에 끌어내렸고 인권, 민주화와 촛불혁명에 기여하게 하였습니다.

▪ 진정한 앎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상에 대한 지식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우리를 지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운행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권능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통해 이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며 구원자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구원이 예수를 통해 실현되었음도 알게 됩니다. 그분은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때로는 머리가 몸을 따르지만 대부분은 몸이 머리를 따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의 삶은 분명해집니다. 예수의 길을 따라 걷는 자들입니다.

당신의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고 끝까지 찾아내시어 돌보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기르시는 목자이십니다. 우리가 위협에 처해 있을 때 결코 모른 체 하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당신의 백성을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모든 일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선 분들에겐 실패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나타나야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구원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은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당신의 이웃으로 삼으셨고 그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믿음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보여져야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지극히 작은 자들을 외면한다면 그 속에 예수를 향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 초대하기
어느 수도원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우리 중에 이미 와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를 섬기십시오. 그분은 지극히 작은 자들 속에 숨어계십니다. 그러니 작은 자들은 단순히 도와주어야할 대상을 넘어 섬겨야할 분들입니다. 우리도 서로를 그리스도로 여기고 섬겨야 합니다. 고난 받는 자들을 그리스도로 여기고 섬겨야합니다. 그 길에 이미 주님께서 걷고 계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을 하나님처럼 섬기기로 결단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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