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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사람은 어디에 ?
성령강림 후 스물네 번째 주일, 추수감사주일
2017년 11월 20일 (월) 11:38:13 백창욱 baek0808@hanmail.net

주일설교문(17. 11. 19) 성령강림 후 스물네 번째 주일, 추수감사주일

누가 17:11-19 “아홉 사람은 어디에?”

11월 12일 명성교회 김삼환목사는 아들 김하나목사에게 명성교회를 물려줬습니다. 공식으로 세습을 완료했습니다. 매체를 통해 세습식을 보면서 특히 예배당을 가득 채운 교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일사분란하게 세습에 동참했습니다. 장신대 신대원 학생이 “세습반대”를 외치다가 현장질서일꾼들에게 무지막지하게 끌려 나갔는데, 한 기독교매체가 그 학생에게 심경을 물었습니다. 그 학생은 자기 주변의 분위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 대구 새민족교회 백창욱 목사

“내가 앉았던 자리가 대학청년부 자리였다. 내가 외치기 전에 누군가 일어나서 "교회 사유화를 반대한다"고 소리쳤다. 그 장면을 보고 청년들은 대부분 조롱하는 분위기였다. 명성교회 안에서 나름 고민하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긴 하겠지만, 내 주변은 대부분 냉소적이었다.”

청년들의 반응이 이정도이니 다른 교인들도 세습에 대해 아무 문제의식도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1980년 명성교회가 자리 잡은 강동구 명일동은 서울 변두리였습니다. 지금은 서울 전체가 도시화가 됐지만 80년대 명일동은 시골정취가 물씬 나는 동네였습니다. 그곳에는 중심지에서 소외된 가난한 서민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명성교회와 인연을 맺고 교회 사람이 됐습니다. 날로 번성하는 명성교회 다니는 보람을 잔뜩 누리며 살다가 오늘날 명성왕국을 이루는 밑거름이 됐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김씨 부자 교회세습의 공모자가 됐습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믿는다면, 또 오늘날 심각한 교회현실을 생각한다면, 명성교회의 영향력으로 교회를 개혁하는 디딤돌 역할을 해야 마땅할 텐데, 이 사람들은 단지 명성왕국의 십만 패밀리로 만족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율법학자와 바리새를 규탄하는 말씀 중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마태 23:15) 명성사람들이 지옥자식이 됐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보다는 김삼환목사의 똘마니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어째서 이런 모순과 오류가 발생하나요? 민중의소리 칼럼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문제가 뭔가? 신실한 목자도 거짓 목자도 쓰는 언어가 같다. 양자 다 똑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찾고 같은 신앙언어를 쓰고 같은 찬송을 부른다. 이렇게 참과 거짓이 섞여 있는 판국이니 명성교회 교인들이 열렬히 세습에 동참하는 것은 한숨 나오지만,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여러분,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또 강조하건대,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힘을 기르십시오. 그 분별력으로 온전히 하나님나라를 향해 투신하십시오. 기독교영성은 분별이 근본입니다. 물론 우리 인생에서 허물과 오류는 피부의 때와 같이 늘 붙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시로 목욕하여 때를 벗겨내듯이, 성령에 의지하여 영혼을 다듬어서 참과 거짓을 분간할 줄 아는 온전한 사람이 돼야 합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항상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지만 특별히 일 년의 노동과 수고의 열매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나병환자의 치유이적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가는 데 감사하는 마음이 어떤 사건을 만드는지 보겠습니다.

우선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평범한 서술입니다.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한 단순한 도입부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서술에 어떤 의도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왜냐면, 지나가는 지역을 너무 뭉뚱그려서 말했습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는 포괄적인 지명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충청도와 경기도, 영남과 호남 이런 말입니다. 자세한 지점은 도통 알 수 없는 지리표시입니다. 예를 들면, 복음서 다른 곳에는 ‘예수께서 사마리아 수가마을에 이르셨다, 여리고에 들어갔다.’ 이렇게 어딘지 알 수 있는 특정 지명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는 중부고, 갈릴리는 북부입니다. 이렇게 넓은 두 지역 사이에서 어디로 지나갔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주석을 보니,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경계지역에서 이동했다”라거나, “누가가 잘 쓰는 전형적인 문체라고 설명합니다. 제 해석은 이렇다. 사마리아, 갈릴리를 묶어서 예루살렘과 대조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 의도로 길 안내를 뭉뚱그려서 한 것으로 보입니다.

두 지역을 예루살렘과 대조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주류 예루살렘에 대한 거부감입니다. 예수 시대 사마리아와 갈릴리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철저히 배제와 착취를 당했습니다. 유다인은 사마리아를 민족 감정으로 차별했습니다. 이방인과 피를 섞었다는 이유로 아예 상종을 안 했습니다. 이방인보다 더 원수시했습니다.

갈릴리는 어떤가요? 갈릴리 민중은 경제로 착취당했습니다. 남부 유다 땅은 황량, 삭막한 반면에, 갈릴리는 풍요한 땅입니다. 이스라엘의 먹거리는 대개 갈릴리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땅 주인은 거의 예루살렘 부재지주입니다. 성전세력이나 산헤드린이 그들입니다. 갈릴리 민중은 소작인입니다. 갈릴리 민중은 소작료 내고 간신히 땅을 부쳐 먹다가 가뭄이나 재해 때문에 농사가 안 됐을 때도, 소작료는 똑같이 내야하고 세금에 눌리다가 결국은 집과 그나마 있는 땅뙈기를 빼앗기고 암하레츠(땅의 사람들, 근거지를 빼앗긴 사람들)가 됐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주요무리입니다. 즉 11절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이 두 지역이 주류에게 철저히 핍박받은, 민중의 땅이라는 사실을 배경에 두고 싶은 겁니다. 누가저자는 바로 그런 소외된 땅이지만, 그 땅에서 일어난 인간 자유와 해방의 역사를 증언합니다 곧 예수가 일으키는 하나님나라 운동입니다.

그런데 숱한 역사변혁 운동이 수많은 장애를 만나듯이 이 마을의 해방역사도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는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났습니다. 이 나병은 지금 한센씨병은 아닙니다. 즉 천형의 질병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각주에 있듯이 온갖 악성 피부병입니다. 그래도 공동체에서 격리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율법의 정결례 때문입니다.

나병환자들은 소문을 들어서 예수의 능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서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 했습니다. 왜 제사장에게 보이나요? 레위기 13,14장을 보면 악성피부병에 걸린 사람이 다시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제사장이 검증합니다. 제사장이 나병환자의 생사여탈권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문제는 병자들이 병을 고침 받은 후에 일어났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만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리고 예수께 되돌아와서,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누가 17:16) 이 때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되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 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

예수님의 반문은 무슨 뜻인가요? 오지 않은 아홉 명에 대한 실망입니다. 고침 받았으나, 돌아와서 감사를 표하지 않은 아홉 명이 보여주는 현실은 어떤 현실입니까?

첫째, 열 사람 중 한 사람만 사마리아 사람이고, 나머지 9명은 갈릴리 사람입니다.
둘째, 이들이 나병환자였을 때는 민족 간 적대감정 없이 한 데 어울렸습니다. 그런데 병이 나은 후에는 아홉 명은 다시 갈릴리 사람으로 돌아갔습니다. 즉 사마리아를 적대하는 옛 세상 질서 속에 묻혔습니다.
셋째, 그들이 돌아간 곳은 조금만 흠이 생겨도 사람을 억압하는 율법 세상입니다.

이상 세 가지를 근거로 아홉 사람의 행보를 풀이해 보겠습니다.
나병에서 나았다는 것은 기존체제, 기존 질서에서는 손도 못 대는 깊은 모순에서 벗어나서 자유와 해방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감동과 기운으로 계속 새 세계에 머물러야 합니다. 즉 하나님나라의 길에 들어서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 과거를 벗어버리고 새 세계로 들어서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대개는 도로 과거의 굴레로 돌아갑니다. 돌아와서 예수께 감사를 표한 사람이, 열 명 중 한 명이니 확률로 따지면, 꼭 10%에 불과합니다. 소수입니다. 한국의 허다한 교회들이 성경을 볼 때, 근본주의와 문자주의 딱지를 떼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여기서 또 다른 진실을 대면합니다. 참된 길은 소수자만이 걷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다수, 주류는 참 신앙과 상극입니다. 원수입니다. 신앙언어가 같듯이, 처음에는 다 같은 나병환자이듯이, 다 같아 보이지만 결정적일 때 딴 길로 갑니다.

소수자 신앙으로 사는 길은 외롭고 쓸쓸합니다. 주류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 기대기 좋은 인맥, 커넥션, 카르텔에서 배제돼 있습니다. 그래서 옳은 길을 가고 싶지만, 아예 엄두를 못 내는 사람도 있고, 가다가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머리로만 관심있는 척 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소수자로 사는 게 손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데 기댈 데가 없기 때문에 진실로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고, 또 자기가 가는 길이나 믿는 바에 대해 “이게 맞는가” 하고, 더 명료하게 생각합니다. 거기서 참 믿음이 나옵니다. 소수자가 얻는 유익입니다.

우리는 모두 나병환자입니다. 피부는 깨끗하지만, 우리 내면에는 매우 오래된 온갖 악성병이 나를 통제하고 있습니다. 최우선으로는 거짓 자아가 평생 나를 지배해 왔습니다. 거짓 자아가 부추기는 여러 이야기에 휘둘렸습니다. 그래서 심령이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실존은 늘 불안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상황과 조건에 따라 요동쳤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육체의 행실이라는 고질병이 나를 포위했습니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분노, 분쟁, 파당, 원수맺음으로 내 영혼은 짓눌렸습니다. 경험으로 절감하듯이 육체의 행실은 사람의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나의 실존을 수렁에 빠뜨립니다.

그러나 과거 육신의 통제를 받았던 내가 하늘은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병에서 고침받았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 생명, 새 영을 영접했습니다. 새 영을 통하여 내 안에 거짓 자기가 있음을 분별하고 참 자기를 찾는 길에 나섰습니다. 예수가 걸어가신 길이 하나님나라임을 믿고 그 길 위에 섰습니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이런 자리라는 인식이 있다면 굳세게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겪을 고군분투가 두려워서 “나 돌아갈래” 해서는 결코 정의평등평화생명세상을 맛볼 수 없습니다. 자신의 해방을 확인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표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십시오.

예수가 사마리아 사람에게 해 주신 말씀을 보십시오.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일어나라는 말씀은 무엇인가요? 앞으로 길을 가다보면, 수많은 장애물을 만나겠지만, 그래서 넘어지기도 하겠지만, 현실에 좌절하지 말고 끊임없이 다시 일어나라는 부활선언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무엇인가요? 이스라엘 사회가 부여한 사마리아사람이라는 천형에 체념하지 않고 사람은 그 자체로 평등하다는 신념으로 자유하고, 또 율법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결단과 고백이 너를 해방하였다는 선언입니다.

우리도 이미 이 사회가 어떤 모순에 처해 있는지 잘 압니다. 흔한 말로 대통령 한 사람 바뀌었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욱 사람사는 세상을 향해 분투해야 합니다.

또 나라는 인간은 어떤가요? 나의 내면은 각종 악성 질환에 오랫동안 길들여져 왔습니다. 그러나 새 길을 안내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과거 질서로 가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습니다. 맘몬은 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승자독식, 양극화체제에서 살아남으려고 나를 소모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안정과 인정은 안개와 같습니다. 깨우쳤으면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됩니다. 나의 실존이 자유하고 하나님의 현존이 충만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리고 그 길로 계속 가는 것입니다. 가난하지만 예수님의 팔복 은총이 있습니다. “천국이 너희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독하지만 같은 길을 가는 동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현존이 항상 내 안에서 충만합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 구원의 완성이 있습니다. 이 길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십시오. 기쁨이 충만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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