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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깨어있으라
등불과 기름 늘 유지하는 삶
2017년 11월 13일 (월) 18:00:59 백창욱 baek0808@hanmail.net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지난 주일 오후, 교제시간 주제는 “문재인정권 어떻게 볼 것이냐?” 였습니다. ‘과거정권과 달라진 게 없다’와 ‘시간이 걸리니 기다려야 한다’가 팽팽했습니다. 아마 촛불집회에 나간 민주시민들 사이에서도 양쪽 입장이 팽팽할 것이라고 봅니다.

   

노동자 교우가 볼 때, 문재인정권의 노동정책은 답답하고 지지부진합니다. 민주노총 위원장은 감옥에 있고 사무총장은 여전히 수배중이어서 집에도 못 가고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계속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정대화를 하자니, 들러리서는 것 같아서 가지 않았습니다. 노동정책이라는 것도 이벤트나 대국민 선전용일뿐 실제 노동자들 피부에 와 닿지 않습니다. 문대통령이 취임 후 첫 번째로 발표한 노동정책이 ‘공공기관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정책이었습니다. 인천공항공사를 찾아가서 뒤에는 ‘공공기관 비정규직 제로시대’라는 커다란 현수막을 걸고 대국민발표를 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들뜨게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다릅니다. 인천공항공사가 직고용하는 정규직은 수백 명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9천여 명 비정규 노동자는 인천공항운영관리(주)라는 자회사가 고용합니다. 자회사 초대 사장도 노조파괴혐의를 받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2001년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당시 노무 담당 총괄 임원이었고, 2007년에는 노조 파괴 전문업체인 창조컨설팅과 계약해 노동자를 공격한 바 있습니다. 그런 문제인물을 등용한다는 것은 아직 자본가 중심의 카르텔이 견고하다는 뜻입니다.

어제밤과 오늘 새벽에는 건설노조 노동자와 금속노조 노동자들이 고공농성에 들어갔습니다. 과거정권때 끝날줄 알았던 고공농성을 계속 하는 것만 봐도 노동현실은 바뀌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다른 교우들은 의회에서 여당이 과반수가 못 되는 실정이고, 자유한국당이 자신들의 과오를 도통 반성하지 않고 무조건 반대만 하니, 적폐청산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국정원 댓글수사같은 것을 보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김관진을 구속하고, 박근혜정권 때 국정원장 세 명을 모두 조사하는 것은 정권교체를 실감나게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거라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이 정권의 정당성이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난 주 화요일, 예수살기 전국대회를 마치고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으로 갔습니다. 트럼프 방한을 맞이하여, ‘전쟁반대! 사드 철회! 북미·남북 대화 재개! 한미정상회담에 즈음한 삼보일배 평화기도 및 고 조영삼님 49일 추모기도회’에 참가했습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삼보일배를 시작했습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출발해서 정부종합청사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경찰이 막았습니다. 법원이 청와대 집회와 행진을 허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원의 결정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막은 것입니다. 우리는 경찰의 행태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서, 경찰이 앞을 막고 있지만 삼보일배를 강행했습니다. 어떻게 되겠나요? 신부님, 교무님, 목사님이 경찰 발밑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또 길을 열기 위해서 격심한 몸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서 겨우 십 미터 전진했습니다. 사람들이 방패 앞에 땀범벅이 된 몸을 기대고 저지선을 형성한 채 앉아 있는 모습은 처연하고 처절했습니다. 간신히 십 미터 전진해서 있는 형태를 보니 한 상징이 떠올랐습니다. 즉 문재인정권의 민주주의 척도가 박근혜 때보다 고작 십 미터 전진했다는 상징입니다. ‘십 미터 이론’이 문재인정권의 전반을 설명하는 척도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어떤 일이 있다고 해서, 법원의 결정도 무시하고, 그냥 힘으로 밀어붙이는 정권과 경찰이라는 것입니다. 9월 7일 소성리에 사드를 강제침탈한다고, 트럼프를 맞이한다고 등의 이유로 법근거도 없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이딴 식으로 할 것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입니다. 이건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하늘나라에 대한 열 처녀 비유입니다. 신부의 들러리로 나온 열 처녀가 있는데, 그 중 슬기롭다는 다섯 처녀는 혼인잔치에 참여하고 미련하다는 다섯 처녀는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들어가지 못한 결정적 이유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11,12절 말씀이 야박하고 섬뜩합니다.

“그 뒤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신랑이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였다.”(마 25:11,12)

혼인잔치에 들어간 슬기로운 처녀들은 마냥 좋겠지만 문전박대당한 미련한 처녀들로서는 천추에 한입니다. 그런데 사실 비유에 나오는 이야기 소재들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무리한 내용들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도 미련한 처녀들도 무엇이 슬기롭고 무엇이 미련한 것인지, 막상 캐 들어가면 지적할 거리가 많습니다.

이야기신학을 쓰는 김홍한목사님이 2016년 4월, 예수살기 영성수련회 시작 예배 설교에서 25장 비유이야기를 하면서, 비슷한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평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 오리를 같이 가자하면 십리를 같이 가 주라는 말씀, 속옷을 가지려거든 겉옷까지도 내주라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행위를 칭찬할 수 없습니다. 열 처녀들은 모두 신부의 들러리들이니 잘 아는 친구들일 것입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마땅히 미련한 다섯 처녀에게 기름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가 기름을 사러간 사이에 신랑이 옵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동안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매우 애타게, 발을 동동 구르며 기름을 사러간 다섯 처녀가 신랑이 오기 전에 돌아오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랑이 먼저 왔습니다. 신랑에게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친구들이 기름을 사러 갔으니 오거든 같이 들어가자고 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신랑과 함께 잔치자리로 들어가고 문은 닫힙니다.

잔치자리가 아니라 치열한 경쟁을 치르는 것 같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패배의 쓴 잔을 마시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승리의 기쁨을 누립니다. 신랑은 매몰찬 시험관 같습니다. 서로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잔치자리에 참여하면 좋을텐데 경쟁사회에서 그러한 것은 오히려 무의미합니다. 탈락자 없는 승리는 승리가 아니요 지옥없는 천국은 천국이 아닌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천국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그런데 과연 미련한 다섯 처녀가 들어가지 못한 잔치자리가 과연 천국일 수 있을까요? 그리고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함이 천국에 가지 못할 조건이 될까요? 또한 그 미련한 다섯 처녀가 과연 미련해서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을까요? 어쩌면 형편이 여의치 못해서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가난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것은 더욱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소개하는 이유는 옳고 그름을 떠나서 성경에 대한 상상력을 키우라는 뜻입니다. 상상력만큼 나의 안목과 지각력이 성장합니다.

다행히 복음저자는 비유이야기 끝에 결론을 적시합니다. 비유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소재들로 인해 교훈이 뒤죽박죽 되는 것을 방지합니다.

열 처녀의 교훈은 무엇인가요?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마 25:13) 그 날은 인자가 오시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가 완성되는 날입니다. 다행히도 ‘열 처녀 비유’의 교훈인 13절과 비슷한 말씀이 앞에도 있습니다. 24장 36절과 42절, 44절, 50절이다. 네 절 모두 “인자가 언제 올지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생각하지도 않은 시각에, 인자가 온다” 입니다. 열 처녀 비유와 결론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깨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오늘 비유의 핵심 소재가 등불과 기름이므로 이 둘을 가지고 설명하겠습니다. 등불과 기름은 은유입니다. 등불은 뭔가요? 어둠을 밝히는 도구입니다. 비유말씀이 모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사람에게 적용하자면, 시대를 분별하고 밝히는 지각력, 신념,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둔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행동입니다. 역사는 진보해야 한다는, 노동자민중, 장애인, 소수자 등 사회약자의 삶의 질이 더욱 상승해야 한다는 신념입니다. 이런 신념이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돼서 세상을 진보시켰습니다. 얀 후스와 체코형제복음교회는 3백년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개혁신앙을 사수했습니다. 루터 대개혁의 디딤돌이 됐습니다. 왜 개신교를 프로테스탄트, 저항의 종교라고 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진보한 세상은 우리가 기다리는 완성된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와 가깝습니다. 저 천국에 간다는 믿음으로 세상진보에는 완전 무관심한 사람은 하나님나라를 기만하는 것입니다. 논리상으로나 이치상으로 생각할 때, 자신이 신봉하는 그 나라를 이 땅에서도 구현하려고 애쓰는 게 맞습니다. 그런 사람이 그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이 됩니다.

기름은 무엇을 은유했나요? 기름은 지각, 분별, 신념이 꾸준히 변치 않도록 아래를 지향하는 일관성, 성실성입니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사람이 변했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히 삶의 자리가 권력과 금력에 가깝게 바뀐 사람이 쉽게 말을 바꾸고, 전에 자신이 한 말이 있는데 뻔뻔하게 완전 반대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명성교회 김삼환목사는 여러 차례 세습에 뜻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아들이 명성교회 위임목사로 됩니다. 세습을 공식화합니다. 기름이 사람성품, 사상, 내면의 열매일진대, 나눠주거나 사러간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스스로 갖춰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는 무수한 자기갱신, 변화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와 노력을 발로 차버린 사람입니다. 역사와 세상의 진보에 참여하고 응답하라는 요청에 대해 눈과 가슴을 닫고 자기 고집과 욕망에 갇힌 사람입니다. 그러면 들여보내 주고 싶어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사회라도 자신의 본질과 완전히 다른 문화에 들어가면 우선 본인이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는 것은 등불과 기름을 늘 유지하는 삶입니다. 어둠을 밝히는 실천과 지각, 분별심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자기를 연단하는 일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각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렇게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인자의 완성된 세상이 온다는 믿음에 맞춰서 살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본 글은 주일설교문(17. 11. 12), 성령강림 후 스물세 번째 주일, 마태 25:1-13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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