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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의 적폐
연구재단 관료적 명령 학문 기여 못해
2017년 11월 13일 (월) 10:03:37 강명관 dasanforum@naver.com
세월이 흐르니 어느 결에 이런저런 학회에 회원이 되어 있다. 정식으로 가입한 학회는 다섯 개 정도다. 간곡한 부탁에 이름만 올리고 활동하지 않는 학회도 몇 있다. 이 외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회원으로 이름이 올라 있는 학회까지 합치면 열 대여섯은 될 것 같다.

학회와 연구기관에서는 논문을 투고해 달라고 이메일을 보낸다. 친절하게 마감 날을 알려준다. 고마운 일이기는 한데, 최근 논문 투고기간을 연장한다는 메일을 거의 매일 받다 보니 절로 짜증이 난다. 거의 모든 학회가 예외 없이 투고 기간을 연장하는 원인은, 논문지면은 많아졌지만, 논문 생산량이 적기 때문이다. 10년 전만 해도 학회는 1년에 한 차례 논문집을 발행했다. 그러던 것이 1년에 두 차례 발행으로 바뀌더니, 이제는 1년에 3, 4번씩 발행한다고 한다.

학회 논문집, 관례가 된 ‘투고기간 연장’

연구자들이 갑자기 논문을 3, 4배씩 써서 그런 것이 아니다. 대학에서 인문학의 쇠퇴는 역력하다. 대학의 인문학 학과와 교수 자리가 줄어든 것은 물론이다. 또 다른 논문 생산 축인 비정규교수나 각종 연구소에 소속된 연구원이 연구환경이 좋아져서 논문을 3, 4배씩 써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논문집을 1년에 3, 4차례나 발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도 투고 기간을 한두 차례씩 연장하면서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연구재단의 명령에 가까운 요구 때문이다. 연구재단은 학술지를 평가하여 등재지와 비등재지를 구분한다. 등재지는 한국연구재단의 평가기준을 통과에 연구재단에 이름을 올린 논문집이라는 의미다. 등재지와 비등재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복잡하지만, 결국은 형식적인 것이다. 연구재단이 논문의 질을 평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형식적인 조건이란 대개 숫자놀음이다. 논문집 발행 횟수 역시 그 형식적 숫자놀음의 하나다. 1년 1회보다는 2회, 2회보다는 3회, 3회보다는 4회 발행이 좀 더 큰 점수를 받게 되어 있다. 그러니 등재지에서 탈락하지 않으려면, 또는 등재지가 되려면 논문집의 발행횟수를 늘리는 수밖에 없다.

논문을 쓰는 사람이 갑자기 3, 4배로 늘어나지 않았는데, 논문집의 발행횟수가 3, 4배로 늘어났다면, 결과는 빤하지 않은가. 투고기간 내에 충분한 논문이 들어오지 않아 기간을 늘릴 수밖에 없다. 나아가 논문집을 채우기 위해서는 질이 떨어지는 논문도 그야말로 형식적인 심사과정을 거쳐서 실을 수밖에 없게 된다. 내가 심사하여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하여 불합격을 준 논문인데, 어느 날 다른 논문집에 버젓이 실린 경우도 보았다. 물론 거의 아무것도 고치지 않는 채로 말이다. 쏟아져 나오는 논문집을 보면, ‘이게 논문인가?’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것이 수두룩하다.

논문집 발행횟수, 무리하게 늘리는 까닭은

등재지는 연구재단에 등재된 논문집이란 의미일 뿐이다. 그런데 대학이나 기타 연구기관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등재지의 논문 수로만 연구업적으로 인정하고 평가한다.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범람하는 등재지에 싣기만 하면 무조건 연구업적이 되는 것이다. 등재지는 저질 논문이 연구업적으로 둔갑하는 수단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서론, 본론, 결론을 갖추고, 영문초록까지 덧붙이고 있어 겉으로야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사실 아무것(‘쓰레기’라고 쓰고 싶지만 참는다!)도 아닌 그런 글을 보호하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등재지란 칭호를 단 논문집은 모두 동등하기 때문에, 권위 있는 논문집도 권위 없는 논문집도 이제 구분할 수가 없다.

1년에 3,4차례 학회지를 발행할 형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학회 나아가 학계는 왜 연구재단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는가. 연구재단이 갖는 권력에 밀리기 때문이다. 그 권력의 원천은 연구재단이 공여하는 ‘연구’란 관형어를 달고 있는 돈이다. 그 돈을 받기 위해 아무리 무리한 요구라도 머리를 조아리고 ‘예, 예’ 하면서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도 학계에 몸담고 있는 분들은 나의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아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물어보자. 한국연구재단에서 ‘연구 돈’을 받아가면서, 시키는 대로 따른 결과 학문이 발전하고 있는가? 연구의 자유와 자율성이 신장되었는가? 나는 학계의 현실을 몰각한 연구재단의 관료적 명령이 학문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것이 아니라, 학문의 저질화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학계에 한마디 하고 싶다. 등재지와 연구재단의 돈에 목을 매고 그저 시키는 대로 맹종하는 행위야말로 학계 내부의 청산해야 할 적폐가 아니겠는가. 이런 말을 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도 알지만, 매일 같이 이메일 함에 쌓이는 ‘투고기간 연장’ 메일을 보고 울화가 치밀어 한 마디 내뱉지 않을 수 없다.

글쓴이 / 강명관

·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신태영의 이혼 소송 1704~1713〉, 휴머니스트, 2016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 휴머니스트, 2015
〈이 외로운 사람들아〉, 천년의상상, 2015
〈홍대용과 1766년〉, 한국고전번역원, 2014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천년의상상, 2014
〈그림으로 읽는 조선 여성의 역사〉, 휴머니스트, 2012
〈조선풍속사 1,2,3〉, 푸른역사, 2010
〈열녀의 탄생〉, 돌베개, 2009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푸른역사, 2007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 길, 2006
〈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역사, 2003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푸른역사, 2001
〈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 소명출판, 1999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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