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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지다
시와 이야기가 있는 노트 3편
2017년 11월 09일 (목) 10:29:33 양재성 hfmc1004@hanmail.net

시와 이야기가 있는 노트, 기다림의 등불하나 걸어두고

박성철

준다는 것이 받는다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임을 깨닫게 되는 날 있으리
떠나는 것이 반드시 미워서만은 아니라는 것을
더러는 사랑하기에 떠난다는 말을
믿게 되는 날 있으리
살다 보면 간혹은
떠나는 사람의 한 치 에누리 없는
완벽한 쓸쓸함을 지켜봐야 하는 날이 있는 법

사랑은 이별했을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기했을 때 끝나는 것이란 걸 알게 된 지금
비로소 나 그대 기다림을 생각합니다
지금 내게 남겨진 급선무는
그대를 잊는 것이 아니라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를 그대를 위해
가슴 한켠에
내 기다림의 등불을 걸어두는 일입니다

시인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기를,
이 가을에 간절히 기도한다
그리움에 사무친 기다림은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적갈색의 등불을 단 나무들이
모든 존재는 기다림의 등불임을
온 몸으로 증언하는 가을이다
누구 가르쳐 주지 않아도
가을은 거룩하다

(1106, 가재울에서 지리산)

   

시와 이야기가 있는 노트, 가을 지다

정명성

햇볕이 옅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바람이 차가워졌기 때문이 아니다
강물이 줄었기 때문이 아니다
풀벌레 소리가 그치고
서리가 내리기 때문이 아니다

물들면서 마르고
시들어 떨어지는 것은

사랑이 식어진 까닭이 아니다
희망이 사라진 까닭이 아니다
길이 끊어진 까닭이 아니다
찬 겨울이 가까이 오고
밤이 길어진 까닭이 아니다

지는 것은
온 힘을 다해 살았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서 피어나 무엇이 되어
얼마의 시간 동안 어떻게 피었었건
당신은 다하여 산 것이고
남김없이 다했기 때문에 지는 것이다

소멸하는 계절이 이토록 장엄하고
지는 순간 마침내 평화로운 까닭은
다하고 돌아가는 생명에게 보내는
하늘의 찬사 때문인 것이다

성심을 다해 제 길을 걸어간 후에
소멸하는 생명은 아름답다
제 삶을 다 살고 저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생명은 거룩하다

늦가을에 천지를 뒤 흔드는 장엄한 소멸,
자신의 전 존재를 바치고 난 후에 오는
우주의 평화를 본다

(1106. 가재울에서 지리산)


시와 이야기가 있는 노트, 거룩한 믿음

주님, 우리 믿음에
이해를 주시는 분은 당신이오니,
저로 하여금
우리가 당신을 어떤 분으로 믿으면,
당신이 그런 분이심을 알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화가의 자리와 같습니다.
화가가 처음 무엇을 그리고자 할 때,
그는 먼저 그것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봅니다.
그러나 아직 그것을 그리지 않았기에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일단 그림을 그리고 나면
비로소 그것을 소유하게 되지요.
마찬가지로,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보다
더 큰 것이 있을 수 없는 어떤 무엇이 있음을,
비록 그것을 이해하진 못해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이해를 초래합니다.
그런즉, 주님, 그보다 더 큰 것이 있을 수 없는
바로 그 무엇이 당신입니다.
누구든지 이를 참으로 이해하는 자는
당신의 실존을 믿는 것이
당신의 실재를 증명하는 까닭에,
당신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이해할 것입니다.
좋으신 주님,
저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믿음이 저에게 이해의 빛을 가져다주니까요.
지금 제가 당신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먼저 당신의 존재를 제가 믿었기 때문입니다.

(1106,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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