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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찌와 첫째
편견과 아집을 넘어서
2017년 09월 25일 (월) 12:18:53 조헌정 choshalom@gmail.com

[꼴찌와 첫째]  요나 3:10-4:11, 빌 1:21-30; 마 20:1-16

첫째 단락

[평등주의자 농장주]

포도원 일군과 품삯의 비유 말씀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아주 특이한 그러면서도 예수가 추구했던 하느님 나라 운동과 그 핵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명료한 말씀입니다. 한 포도원 주인이 추수 때가 되자 이른 아침 아마도 6시경 일꾼들이 모이는 장터로 갔습니다. 일할 사람을 찾자 몇 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나서자 한데나리온의 품삯을 주기로 하고 그들을 고용했습니다. 그리곤 9시경 다시 공터에 나가서 또 사람을 고용했고, 열두시, 세시, 심지어는 오후 다섯 시에도 나가 일꾼을 고용했습니다. 주인으로서는 추수 때를 놓치면 손해가 되니 한 두 시간이라도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긴 했습니다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대로 주인의 속셈은 딴 데 있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전연 엉뚱한 곳에서 터집니다. 여섯시가 되자 주인이 하루 일과가 끝났음을 알리고 모두를 모이게 한 다음, 하루 품삯을 주기 시작하는데, 늦게 온 사람부터 주기 시작합니다. 그래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성서에는 그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당시 한 가족의 하루치 식량의 값어치가 한 데나리온이었으니, 그들은 한 시간을 일하고 하루치를 받았으니 감지덕지(感之德之) 했겠지요. 이어 세 시간 일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그들도 세 시간 일하고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니 감사했겠지요. 정오에 와서 여섯 시간을 일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과 자신들을 똑같이 취급한 일에 대해 불만은 있었겠지만, 절반만 일하고 하루치를 받았으니 그들도 어찌되었든 감사했을 것입니다.

이제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9시간을 일한 사람들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설마 자신들에게는 조금 더 주겠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데나리온만 줍니다. 아마 돌아서서 투덜거렸을 것입니다. 이거 뭐야? 한 시간 일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주다니 이거 뭐 잘못된거 아니야? 불만이 머리끝까지 올라왔지만, 자기보다 더 먼저 온 친구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기에 일단 참습니다.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루 꼬박 열 두시간을 일한 저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그러자 바로 불만이 터져 나옵니다. ‘아니 한 시간 일한 사람과 새벽부터 지금까지 12시간을 일한 사람을 똑같이 주다니 이게 말이 되는 법입니까?’ 그러자 주인이 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정하지 않았소? 내가 늦게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 무슨 잘못이라는 말이요? 내 것을 갖고 내 마음대로 처리한 것이 잘못이라는 말이요? 당신은 당신 몫이나 받아 가지고 가시오.”

[개인 경쟁 사회에서 공동체 생명 사회로]

오늘 어떤 농장에서 이렇게 했다가는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고 주인은 법정에 고소를 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히 이는 일한만큼 대가를 지불하는 자본주의 경쟁 원칙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모두에게 똑같이 주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원칙임을 주장하면서 이어 덧붙이기를,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라고 천명합니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려면 사회가 뒤집어지는 일종의 혁명이 일어나야 하는데, 여기서 사회 혁명을 논하는 것은 우리의 대화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니 그 논지를 낮추어 ‘모든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하루를 살아갈 임금은 받아야 한다’는 사회복지를 주장하는 것으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 나라에서는 생명의 가치가 경쟁의 가치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이천년 전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이 비유의 말씀에서 시장에 늦게 나온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당시 80% 이상의 백성들이 모두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이 늦게 나왔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늦게 나올 수밖에 없는 그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늦잠을 잔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이건 논외로 하는게 좋겠습니다. 우선은 그때는 다들 걸어 다녔으니 마을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은 늦게 나왔을 것입니다. 우리도 60년대 달동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네팔에 가보면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산꼭대기에 올라갑니다. 물 한번 기르는 일만도 반나절이 너머 걸립니다. 산꼭대기에 사는 사람들이 일거리를 찾아 마을 중앙까지 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입니다.

또 누가 있을까요. 신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장애인들이나 나이든 사람들 자연히 늦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오후 3시, 5시에 나온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게으른 사람들이었을까요? 주인이 그들에게 핀잔조로 말합니다.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그러자 그들이 답하기를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일거리를 찾고 있는데, 쓰지 않는다는 겁니다. 전 한국에서 이런 고용시장을 별로 가보지 못해 잘 모릅니다만, 미국에서는 도시 몇몇 장소에 고용시장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주로 스패니쉬 사람들로 불법체류자들입니다. 저도 가본 적이 있는데, 하루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서 경험 있는 사람을 먼저 찾고 경험 있는 사람이 없으면 건장한 사람을 데리고 갑니다. 힘이 없고 나이가 어리면 쓰지를 않습니다.

여기 두 종류의 일군이 있습니다. 하나는 늦게 나올 수밖에 없는 사람들, 일찍 나왔지만, 데려가지 않아 빈둥거리는 사람들. 우선 늦게 나올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아마도 아이 여럿을 키우는 홀어머니가 아니었을까요? 남편이 병으로 일찍 죽었든지 아니면 전쟁터에 나가 죽었든지 거기에 노부모님을 모시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침 식사를 비롯한 빨래 등 집안일을 대강 치우다보면 남들보다는 댓시간 늦게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쓰지 않아 빈둥거리는 사람들은 어쩌면 손 하나 다리 하나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아니었을까요?

노동 시장에 늦게 나온 사람들 결코 게으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약자들입니다. 이런 약자들을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복지를 얘기하면, 예전 장로대통령께서는 이를 복지포플리즘이라고 공격을 하였지요. 이는 예수를 인기영합주의자라고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고 장로가 된 것 같습니다. 이를 비롯하여 정적 국정원 공작정치를 한 일로 말미암아 법적 고소를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장로가 예수님 말씀을 좇았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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