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이 아닌 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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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이 아닌 義다
  • 김홍한
  • 승인 2017.09.18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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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통치자와 백성간의 신뢰에 근거

2017년 9월 16일 181호 김홍한목사의 이야기 신학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여름이 시작되면서 글쓰기를 멈추었는데 어느덧 가을입니다. 그 동안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국제정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만큼 정치의 중요성이 실감 되는 때입니다.

정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이제까지 이야기 신학을 통해서 신학적인 문제나 성서해석의 문제를 가지고 시비를 건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견해에 대해서는 강하게 시비를 거는 이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글을 썼을 때 어떤 이는 “장로 대통령께서 하시는 일을 목사들이 도와야 되는 것 아니냐?”며 항의했습니다. 어떤 이는 정 반대로 항의했습니다. “대통령을 비난 하더라도 예의를 지켜 비난해야 한다.” 했더니 그게 불만이었습니다. 예의를 지키자는 것을 그는 아첨으로 여겼나 봅니다. 종교적 간극보다 정치적 간극이 더 멀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정치는 우리 삶입니다. 가깝게는 부모자식 관계도 정치요 부부관계도 정치입니다. 그리고 국가정치, 국제정치는 우리 서민들의 삶에 너무도 크게 영향을 미치기에 무관심 할 수는 있어도 무관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호는 논어를 중심으로 정치에 관한 이야기로 채웠습니다.

법치와 덕치

공자는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은 형벌이나 제도로써 하는 것이 아니고 덕과 예로써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공자가 덕치주의를 주장한 것은 法治主義에 대한 우려에서이다. 법치주의란 매우 합리적이기는 하지만 한편 통치자의 지배수단에 불과하다. 본래 법이란 (안연 7장 에서도 말하였듯이) 질서유지를 위한 것이지 결코 정의구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공자는 이런 점을 염려하여 “제도로 정치하고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형벌을 피함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덕으로 다스리고 예로서 제도하면 백성들은 부끄러움을 알고 바른길을 간다.”(위정 3장)고 했다.
법치는 강력한 법집행을 해야 하니 통치자도 매우 힘들다. 반면 덕치는 백성이 자발적으로 바른 생활을 하니 그 노력이 훨씬 덜 든다. 이를테면 순임금은 덕치를 했기에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바른생활을 하여 무위(無爲)로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이다.

정치는 먼저 자신이 발라야

공자 왈 “자신이 바르면 비록 명령을 하지 않아도 명령이 실행되고 자신이 바르지 못하면 비록 명령한다 하더라도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 - 논어 자로 6장 -

한국전쟁 동안 모택동의 아들 모안영이 당시 신혼임에도 불구하고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미8군 사령관의 아들도 공군조종사로 참전하여 전사하였는데 시체도 찾지 못했다.
이에 반하여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조국의 미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국가에서 제정한 특별법에 의하여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징집이 연기되었다. 이 나라 지도층 자녀들의 병역회피용으로 만들어진 법이었다.
중국군과 미군의 지도자들의 아들들은 남의 나라 전쟁에 까지 와서 전사를 하는데 정작 우리나라 지도자들의 자녀들은 병역회피를 위하여 대학에 다니고 있었으니 황당한 일이다. 형편이 이러하니 우리나라의 병사들은 돈 없고 힘없어서 전장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불평과 불만이 가득했던 것이다. 특권층의 책임의식(노블레스 오블리제) 여하에 따라서 백성들은 따르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한다.

통치자의 말

자로가 물었다.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이 정치를 하도록 준비하고 기다린다면 선생님은 먼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공자 왈 “필히 正名 하겠다.” 자로 왈 “그러신가요 선생님은 현실과 멉니다. 正名이라구요?” 공자 왈 “야만인 같구나 유야, 군자는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다. 名(직분)이 바르지 못하면 지시에 순종하지 않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흥하지 못한다. 예악이 흥하지 못하면 형벌이 공정하지 못한다. 형벌이 공정하지 못하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다. 고로 군자는 직분을 얻으면 필히 말을 할 수 있고 그 말은 필히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군자는 그 말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논어 자로 3장 -

공자의 정명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 대목이다. 정명이란 “君君臣臣父父子子”로 이름값 하는 것이다. 제 직분에 맞는 말을 해야 사람들이 그 말에 순종하고 일이 성취된다. 일개 장관이 대통령이나 할 수 있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한다면 그 말을 믿을 수 없으니 나라와 백성간의 신뢰가 깨어지고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는 일이다. 생각이 짧은 자로가 이렇게 간단하고도 명료한 뜻을 알지 못하고 무례하게 나섰다가 선생님으로부터 호되게 책망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직분이 바로서고 직분에 맞는 말이 나올 때 권위가 서고 세상에 질서가 잡힌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말은 참말이 될 수도 있고 거짓말이 될 수도 있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실행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대통령이 할 수 있는 말이 있고 군수가 할 수 있는 말이 있다. 말이라고 다 같은 말이 아니다.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천하에 有道(유도)하면 말과 행동이 다소 과격하더라도 괜찮으나 천하에 무도하면 행동은 과격해지고 말은 숨는다.” - 논어 헌문 4장 -

세상에 정의가 살아있고 민주화된 세상에서는 광장에다 단을 세우고 그 위에 올라가 큰 소리로 정치를 비판하고 대통령을 비판해도 제재함이 없다. 자신의 뜻을 적은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해도 그 시위가 보장되고 보호받는다. 위정자가 당당하니 두려울 것이 없고 또한 백성들도 판단능력이 있으니 염려될 것이 없다. 그러나 독재와 같은 무도한 시대에는 권력자가 떳떳하지 못하니 힘으로 억압한다. 권력자가 백성을 마치 적처럼 대하고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가 없으니 권력에 저항하는 이들의 시위도 투쟁적이고 폭력적이다.
무도한 시대에는 말이 사라진다. 무도한 권력은 말에 논리가 없으니 힘으로만 억압한다. 저항하는 이들도 말이 없다. 말을 하면 드러나니 은밀하고 과격한 행동만 있다. 심지어 뒷골목 포장마차에서 속삭이는 소리까지도 조심해야 한다. 과거 군부독재 시대에 그러했다.

법 만 강조하는 이는 폭군이다.

계강자가 정치에 대해서 묻자 공자께서 대답하시길 “정치란 바로잡는 것입니다. 선생께서 바르다면 누가 감히 바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논어, 안연 17장 -

계강자가 정치에 대해 물으면서 말하기를 “무도한자를 죽여서 道로 이끌면 어떠하겠습니까?” 공자께서 대답하기를 “정치를 한다하면서 살인이라니요? 선생께서 선하고자 한다면 백성들도 선해질 것입니다. 군자의 덕이 바람이라면 소인의 덕은 풀과 같아서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필히 쓰러지기 마련입니다.”) - 논어 안연 19장 -

무도한 자가 권력을 가지고 있으니 도가 서질 않는다. 큰 도적이 나라를 도적질했으니 백성들이 죄를 짓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억울하다, 재수 없어 걸렸다”한다.
권력자가 스스로 무도하니 덕으로 백성들을 순복시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그러니 통치 방법도 무도할 수밖에 없다. 가혹한 형벌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군자는 바람이고 소인은 풀이라.” 소인은 군자의 치리함에 따라 그대로 반응한다. 혹 군자의 자리에 군자가 앉지 않고 소인이 앉아 치리한다면 소인들은 순리로 반응하지 않는다. 즉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맹자에게 제나라 선왕이 묻기를 “탕임금이 걸왕을 쫓아내고 무왕이 紂王(주왕)을 정벌했다는데 신하가 임금을 살해해도 되는 것입니까?”하고 묻자 맹자는 “인을 해치는 자를 흉포하다 하고 의를 해치는 자를 잔학하다고 하는데 흉포하고 잔학한 자는 필부에 지나지 않으니 필부인 紂(주)를 살해했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맹자 양혜왕 하 8)했다. 맹자의 정치사상은 매우 과격하다. 왕답지 못한 왕은 이미 왕이 아니라는 것으로 혁명을 정당화 하고 있다.

▲ 글쓴이 김홍한님은 대전의 작은교회 새교회 목사이자 목수이다.

중요한 것과 급한 것

위영공이 군대배치법에 대하여 공자에게 물으니 공자 왈 “禮器를 다루는 일은 들었어도 군대 배치법에 대해서는 배운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길을 떠났다.
- 논어 위령공 1장 -

조선말 월남 이상재 선생이 미국에 외교관으로 갔었을 때 미국이 부국강병한 것을 보고 그 비결을 궁금해 하던 바 어떤 이가 말하기를 “미국이 부국강병한 비결은 성경에 있다” 하여 성경을 열심히 보았으나 아무리 보아도 戰艦(전함) 만드는 법, 군대를 조직하고 훈련하는 법, 상공업을 발전시키는 법 등이 없어서 크게 실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예수, 석가, 공자 어느 누구도 이러한 부국강병책을 말씀하신 분은 없다. 예수와 석가는 아예 관심조차 없었고 현실정치에 큰 관심이 있었던 공자조차도 부국강병책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공자에게 富國策(부국책)도 아니고 强兵策(강병책)도 아닌 軍陣(군진)에 대하여 물으니 공자께서는 아예 상대하지 않고 그 나라를 떠난다. 맹자도 그러하니 양나라 혜왕이 맹자를 만나 자기 나라에 利가됨을 말하자 맹자는 “어찌하여 利益을 말씀하십니까? 義가 있을 뿐입니다.”하고 일축한다.
위영공 입장에서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매우 급하고 실질적인 문제로서의 국방문제에 대한 자문을 구했는데 공자는 엉뚱하게 俎豆(禮器)밖에 모른다고 한다. 종묘에 제사지내는 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할까? 오늘날에도 공자 같은 이를 중요하게 등용하는 정치지도자는 없을 것이다.
급하고 또 급한 것이 국방을 든든히 하는 것이요 경제를 활성화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급한 것이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람이 급한 것을 쫓다보면 정작 중요한 것은 항상 뒷전으로 밀리게 되어 항상 그 모양 그 꼴이다. 나라를 다스림에는 더욱 그러하니 군주는 모름지기 급한 것 보다는 중요한 것으로서의 義와 信을 먼저 생각하고 챙겨야 할 것이다.

정치는 통치자와 백성간의 신뢰에 근거한다.

자공이 정치에 대하여 물으니 공자 왈 “식량을 풍족히, 병사를 풍족히, 백성의 신의가 있어야 한다.” 자공 왈 “부득이하여 하나를 버린다면 세가지중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공자 왈 “병사를 버려라” 자공 왈 “부득이 하여 하나를 더 버린다면 둘 중에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공자 왈 “식량을 버려라. 옛 부터 죽음이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만 백성이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설수 없다.” - 논어, 안연 7장 -

나라를 다스림에 세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면 국방, 경제, 信(군주와 백성간의 신뢰)이다. 셋 다 꼭 필요하지만 이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공자는 信을 들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信보다는 法이 더 중요할 것 같다. 그러나 공자가 법을 이야기 하지 않고 信을 이야기 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찌 보면 信이 제도화된 것이 法이다. 법은 질서유지를 위한 구성원 모두의 약속이다. 법이 제대로 지켜지는 한 그 사회는 유지된다.
그러나 법이 단지 질서유지의 수단이라면 그 사회는 원시사회이다. 법은 상식에 부합해야 한다. 상식에 부합하는 법이 시행되는 사회가 근대사회이다. 그러나 법이 상식에만 머물러서도 안 된다 법은 정의로워야 한다. 정의로운 법집행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복지사회다.
어느 시대든지 법은 강자가 만든다. 강자가 만들기에 강자에게 유리하다. 법의 목적은 정의 구현이 아니라 질서유지임이 분명하다. 질서유지란 미래지향적이 아닌 현 체제 유지이다. 그래서 법은 항상 보수적이다. 법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재산을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법은 빈부의 차를 제도적으로 정당화 하는 것이다.
법은 강자가 만들고 또 보수적이기에 법 스스로 발전하여 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끊임없는 투쟁을 통하여 법은 상식화 되고 조금씩 정의로워 질 수 있다.
이러한 법의 한계성 때문에 공자는 법을 이야기 하지 않고 법의 근거가 되는 信을 이야기한다.

성장보다 분배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듣기로는 나라나 가문을 가지고 있는 자는 그 적은 것을 염려하지 않고 균등치 못함을 염려하며, 가난한 것을 염려하지 않고 불안한 것을 염려한다. 대개 균등하면 가난이 없고, 평화하면 적지 않고, 안정되면 기울지 않는다.” - 논어 계씨 1장 -

不患寡而患不均(적음을 염려하지 않고 균등하지 못함을 염려한다.) 공자께서 경제문제의 중요한 열쇠를 제시한다. 필자는 이 말을 공자의 경제관으로 받아들인다.
재물로 인한 어려움은 절대빈곤만 벗어난다면 그 다음부터는 상대적 빈곤의 문제이다. 재물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그 재물이 한곳에 몰려 있으면 굶주리는 사람이 있어 나라 전체가 굶주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성장이냐 분배냐”로 의견이 분분하지만 공자는 확연이 분배에 비중을 둔다. 세상에 재물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풍부하게 주셨다. 씨 한 알을 심으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주심으로 세상에는 결코 모자람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굶주리는 사람이 있는 것은 나눔이 없어서다. 통치자는 그것을 잘 조절하여 재물이 지나치게 몰려서 굶주리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이 정치이다. 오늘날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하는데 아무리 경제를 활성화해서 재물을 풍부히 한다 하더라도 재물이 한곳으로 몰린다면 그 많은 재물은 오히려 썩어서 악취만 풍기고 사회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질 뿐이다. 무엇보다도 분배에 신경을 써야한다. 이제까지의 것이 모자라다면 더 생산해야 하겠지만 충분히 넘치고 있으니 분배를 합리적으로 하는 것이 지도자의 경제철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더 이상의 제조업 중심의 경제성장은 안 된다. 그것은 자원을 더욱 낭비하는 것이고 환경을 더욱 파괴하는 것이고 쓰레기를 양산하는 것이다. 경제성장의 방향은 서비스업, 문화, 예술, 교육, 종교 등에서 일어나야 한다.

不患貧而患不安(가난을 염려하지 않고 불안을 염려한다.)고 했다. “安”이란 아기 밴 여인이 집안에 있음이다. 아이 밴 여인이 집이 없어 떠돈다면 그것만큼 불안한 것이 없다. 먹을 것이 있고 거할 집이 있어야 편안한 것이다. 오늘날 가난이란 거할 집이 불안한 것이 가난이다. 특히 오늘날 우리나라의 경우 먹거리는 충분하지만 주택의 문제가 심각하다. 그러나 주택도 부족하지 않다. 소수의 사람들이 많은 부동산을 소유해서 그만큼 집이 없는 이들이 가난을 겪고 있는 것이다.

蓋均無貧(균등하면 가난이 없다)고 했다. 위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절대빈곤만 벗어난다면 가난이라는 것은 상대적이라 했다. 그러니 재물과 주택이 골고루 나누어진다면 가난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느끼지 못할 것이다.

和無寡(평화하면 적지 않다)고 했다. “和”는 禾(화/ 벼, 곡식)를 口(구/ 먹다)하는 것이니 平和는 공평하게 밥 나누어 먹는 것이다. 공평하게 나누어 먹는다면 결코 굶주리는 사람이 없다. 1800년대 우리나라의 천주교가 많은 박해를 받았을 때 일부 천주교인들이 산에 들어가 화전을 일구어 힘들게 살았다. 세상에서는 굶어 죽는 이가 있었지만 그들은 소출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굶어 죽는 이가 없었다. 나누어 먹었기 때문이다.

安無傾(평안하면 나라가 기울지 않는다)고 했다. 平安은 글자 그대로 공평하게 집 나누어 갖는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부동산 시장이 안정되었다는 것이다. 자기 집이 있으니 떠도는 이들이 없다.

이익이 아닌 義다.

맹자가 양나라 혜왕을 만났다. 왕이 물었다. “선생께서 천리를 멀다 않고 찾아오시니 장차 우리나라에 이익이 되겠습니다.” 맹자 대답하기를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인과 의가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어찌하면 나라에 이익이 될까?’ 하시면 대부들은 ‘어찌하면 내 집안에 이로울까?’ 할 것이며 선비나 서민들은 ‘어찌하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 할 것입니다. 위아래가 서로 이익만을 추구하면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맹자 양혜왕장 1장 -

오늘날, 국제사회의 움직임을 보면 그 가치판단의 기준이 오로지 國益에 있다. 개인이라도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면 이익을 생각하기 전에 의로움을 생각하는데 국가가 국익을 먼저 계산한다면 불행한 일이다. 개인이나 기업은 이익을 생각할 지라도 국가는 그래서는 안 된다. 맹자 말대로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최근 미국이 북핵문제로 인한 한반도의 안보위기를 빌미로 대량의 무기판매, FTA 문제 등을 거론하는 것은 참으로 천박한 모습이다. 미국의 장래가 보인다. 공자는 말했다.

“내가 자색을 싫어하는 것은 붉은 색을 빼앗기 때문이요 내가 정나라 음악을 싫어하는 것은 아악을 혼란케 함이요 내가 이익을 말하는 소리를 싫어하는 것은 나라와 집안을 뒤집기 때문이다.” -논어 양화 18장 -

대기업 상품 보다는 중소기업 상품을 이용합시다.
대형유통회사 보다는 동네 가게를 이용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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