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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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을 버려라
  • 김홍한
  • 승인 2017.07.08 11: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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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살아야

매일 매일 똑같은 삶이면 산 삶이 아니다. 오늘은 어제와 달라야 오늘이다. 어제도 그제도 오늘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말을 하면 고루한 사람이다. 소위 선생이라 하는 이들 중에 그런 이들이 참 많다. 되지도 않는 고루한 생각을 가지고 평생을 우려먹는다.

   

샘을 파야 한다. 샘을 판다는 것은 생각을 하는 것이다. 자신을 찾는 것이다. 학문하는 것이다. 샘이 터질 때 까지 파야 한다. 샘이 터지면 그것이 제 생각이고 그것이 제 말이다.

어설피 판 샘물은 맑지 못하다. 그나마 가뭄이 들면 말라버린다. 샘을 파려면 깊이 파야한다. 맛이 좋고 마르지 않는 샘을 파야 한다.

샘물이 터진다는 것은 입장을 가진다는 말이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그것을 꿰어서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다. 물줄기가 터져 나오지 못한다. 말이 터지지 못하고 글이 이어지지 못한다.

입장을 갖는 것이 먼저인지 많은 지식을 쌓는 것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어느 것에 조금 더 강조점을 둘 수는 있어도 어느 하나를 무시할 수는 없다. 입장 없이 지식만 쌓을 수는 없다. 아무리 지식을 쌓아도 남는 것이 없다. 자기 말은 한 마디도 할 수 없다. 역시 지식 없이 입장이 설 수 없다. 지식 없는 입장은 매우 위험하다. 간혹 입장은 섰는데 그것이 학문으로 검증받지 않은 이들이 있다. 그들이 홀로 즐기면 소위 “道士”소리는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쩌다 추종자들이 있다면 邪敎(사교)집단을 이루기 십상이다.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이다.

목적이 있는 학문은 학문이 아니다. 그것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자격증 따기다. 취업하기 위한 학문, 판검사가 되기 위한 학문, 의사가 되기 위한 학문, 학위 따기 위한 학문 등은 학문이 아니다.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학문은 아무리 많이 해도 진리와는 관계가 없다. 인격과도 관계가 없다. 진정한 학문은 목적이 없다. 학문 자체가 목적이다.

언제까지 학문을 할 것인가? 배우는 학문, 지식 쌓기 학문만을 하다보면 영원히 쌓아도 이루는 것이 없다. 학문의 양은 한계가 있고 우리가 모르는 세계는 무한하기에 그렇다. 무한한 무지의 세계에 비한다면 유한한 학문의 세계는 없는 것과 같다. 그러니 유한한 학문의 길은 아무리 쌓아도 무지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고백만이 나온다. 그러니 쌓은 학문이 질적 변화를 해야 한다. 道가 되어야 하고 信仰이 되어야 한다.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의 길을 가고자 하는 이들은 덜어낼 줄 알아야 한다. 아직 나이가 어리고, 학문이 덜 쌓이고, 수행이 덜되었을 때는 쌓아야겠지만 어느 정도 쌓이게 되면 그 다음으로는 필요 없는 것들, 군더더기들, 비본질적인 찌꺼기들을 제거해 나가야한다.

노자는 “덜어내고 또 덜어내라(損之又損)”고 한다. 장자는 “잊고 또 잊으라.” 한다. 도대체 노자가 버리라는 것은 무엇이고 장자가 잊으라는 것은 무엇인가? 노자가 버리라는 것은 학문이고 장자가 잊으라는 것은 존재다.

내가 기껏 학문하여 노자를 배웠더니 노자가 말하는 것이 학문을 버리란다. 내가 학문하여 장자를 배웠더니 장자 하는 말이 지식을 폐기하라고 한다. 육체를 벗어나라고 한다. 바울선생도 비슷한 말을 했다. “내 안에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산다.” 고 했다. 내가 성경에서 길을 찾고자 성경을 꼼꼼히 살폈더니 바울선생이 하는 말이 죽으란다.

잊으라는 것, 버리라는 것, 죽으라는 것, 그것은 머리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수없이 들어서 이미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러니 이제 몸에 퍼져 삶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것이 신앙이다.

신앙의 세계, 도의 세계에서는 학문을 버려야 하는 것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잊고 버려야 할 것은 학문과 지식, 존재가 아니라 욕망이다. 욕망이 이끄는 학문을 버리라는 것이고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지식을 버리고 욕망을 추구하는 자기 존재를 버리라는 것이다. 돈에 팔리는 학문과 지식을 버리라는 것이다. 명예를 높여주는 학문과 지식을 버리라는 것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학문과 지식을 버리라는 것이다.

소위 신심이 강하다는 이들이 자주 금식을 한다. 금식이란 가장 원초적인 욕망인 식욕을 금하는 것, 금식은 욕망을 없애는 훈련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금식의 목적이 욕망을 채우고자 함이다. “내 욕망을 채워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굶어 죽겠습니다.”가 금식이다. 금식을 하면서 욕망까지 버릴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과연 그러할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음식을 금할 것이 아니라 욕망을 금해야한다.

버려야 할 것은 학문과 지식만이 아니다.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도 그렇다. 우리의 신앙은 진실이라는 예리한 칼 앞에 검증받아야 한다. 진실하지 못한 믿음은 아무리 깊어도, 아무리 간절해도 가짜다.

진실의 칼날 앞에 선다는 것은 두려움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나의 소신, 신앙, 삶이 송두리째 부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예 시도하지조차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진실의 도전을 받게 되면 심히 당황하고 벌컥 화를 내고, 매우 불쾌해 하고 철저히 자신을 방어한다. 그래서 진실의 칼날은 그 누구도 들이댈 수 없다. 오직 자기 자신과 성령님만이 진실의 칼날을 겨눌 수 있다.

“진실해라”하면 좀 막연하지만 “거짓을 버려라”하면 좀 수월하다. 거짓을 버리자, 좀 초라해지면 어떠랴? 그래야 바울선생의 말씀대로 “내 안에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는”것이 아닌가?

살자, 살아보자, 진짜 살아보자. 거짓된 내가 죽자. 거짓된 지식, 거짓된 욕망을 떨쳐 버리자. 거짓된 신앙을 포기하고 진실한 신앙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 산다.

- 이야기 신학 163호(2016. 10. 16)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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