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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이후 정부의 국책사업은
새만금의 내일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2017년 06월 01일 (목) 16:23:05 박병상 brilsymbio@hanmail.net

어제 '바다의 날'을 맞아 새로운 정부는 새만금 간척사업 현장에서 해양강국으로 갈 것이라 선언했습니다. 바다의 소중함을 인식하는 내용이리면 환영하지만 그 소중한 바다를 매립해 개발하는 내용이 강조돼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 헛된 신기루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새만금 현장을 여전히 안타깝게 보면서, 촛불의 뜻을 먼저 묻는 국책사업을 바라는 마음을 <작은책>에 기고했습니다. 그 글을 제 블로그 링크로 잇습니다.

새만금의 내일을 기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인천의 송도신도시의 모습과 비교하고 싶어합니다만, 송도신도시의 내일은 여전히 휘황찬란할까요? 지구온난화 시대에도 막대한 석유가 지원되지 않으면 유지는 불가능한데,저는 그저 신기루라고 생각합니다. 송도신도시보다 규모가 큰 새만금을 국책사업으로 송도신도시 이상의 규모로 개발한다고요? 국책사업으로 지정돼 국구에서 막대한 예산이 쏟아지면 그 돈에 춤을 출 일부 개발세력 이외에 누가 이익을 챙길까, 우리 후손의 삶은 어찌될까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새 정부의 출범에 가슴이 벅찬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마음 한컨에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는데, 어제 그 모습을 보는 거 같았습니다. 촛불 이후 국책사업은 어떤 절차로 진행되어야 할까요? 그 기준은 돈벌이를 염두에 두는 개발보다 다음세대의 행복과 생존이어야하는데, 이제까지 국책사업은 신기루를 앞세우며 이권을 탐하는 개발세력이 주도했습니다. 어제도 그 냄새를 맡았습니다. 밑빠진 독에 또 국가예산이 퍼부어지는 건가요?

(환경일반) 촛불 이후 정부의 국책사업은

1990년대 중반이었다.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운동이 시민의 승리로 마무리되는데 기여했던 인천의 한 환경단체가 본격적인 시민운동에 나설 즈음이었다. 활성단층이 지나가는 굴업도에 거주민이 적다는 이유로 밀어붙이던 핵폐기장을 막아내는데 기운을 다 바친 그 환경단체는 태동하자마자 전열을 다시 가다듬어야 했다. 핵발전소 규모에 버금가는 화력발전소를 영흥도에 세우려는 정부에 저항해야 하므로.

국책사업이라고 했다. 국책사업이므로 지방은 얌전히 있으라 했다. 시민들은 그저 던져주는 떡이나 받아먹으면 그만이라고 했다. 발전소만이 아니다. 강의 유구했던 흐름을 틀어막는 다목적댐과 4대강 사업, 갯벌을 막대하게 사라지게 한 새만금 간척과 인천공항도 국책사업이므로 반대는 불필요하다고 다그쳤다. 국가에 중앙과 지방이 나눠지는 게 아닌데 중앙정부가 계획하고 예산을 부담하니 지방은 참견 말라 했다. 시민 없는 정부가 없건만 가타부타하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고고도 방어체제라 일컫는 사드는 아니 그랬나?

사진: 당초 식량공급을 위한 농경지 개발이었으나 산업과 도시용지로 계획이 수정된 새만금 간척.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감강할 수 없는 예산이 들어가는 신기루가 될 것이 분명하다.

군사독재의 관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 뿅망치 게임처럼 지겹게 고개를 드는 국책사업은 하나 같이 개발독재였다. 누가 왜 계획하고 어떻게 실행하는지 지방이나 시민은 알 필요 없었다. 그저 반대하면 국가발전을 저해하는 불순세력으로 몰아붙이며 공권력을 제멋대로 동원했다. “, 옛날이여하며 그때를 그리워하는 자들이 밀어붙이는 요사이의 국책사업도 납득할만한 설명을 함부로 생략하며 애국을 독점하려 든다.

반대는 물론이고 문제점을 제시하기만 해도 눈을 부라리는 개발독재 세력에 맞서는 일은 무척 고단하다. 온갖 제도가 막대한 자본과 권력을 독점하는 그들 편이다. 제도를 만든 이들이 군사독재 시절부터 개발독재 세력과 끈끈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제도를 내세우는 자에게 저항할 방법은 옹색하다. 개개인으로 불가능하다. 군사정권 이후 시민단체로 모였지만 약했다. 돈과 권력은 물론이고 시민단체에 허용된 시간마저 부족하니 믿는 건 오로지 양심인데, 시민의 환경과 행복권을 빼앗길 수 없다는 신념, 생태계와 다음세대의 지속 가능한 건강을 희생시킬 수 없다는 정의감은 짓밟히기 일쑤였다.

발전소? 반대하면 어떻게? 전기 없으면 우리나라의 산업이 마비된다는데, 산업이 마비되면 직장이 사라지고 우리나라는 다시 예전처럼 가난한 시절로 돌아갈지 모르는데, 발전소는 있어야지!”

어디 발전소뿐인가? 그런 프레임은 예나 지금이나 국책사업을 관통하는 무소불위의 힘이다. 고치 꿰듯 산을 뚫어내는 고속도로와 철도, 갯벌을 광범위하게 매립하는 공항과 공단, 그리고 군사시설은 아니 그런가. 매국노가 될 수 없기에 시민들이 참여를 망설이니 행동은 언제나 힘겨웠다. 시민단체의 연륜과 역사가 어느 정도 축적된 지금도 여전하다.

어려운 여건에서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은 시민운동이 없었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넓은 의미로 시민운동의 영역을 독립운동, 민주화운동까지 포함해보자. 지금 참 암울한 세상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예전처럼 목숨까지 내놓지 않았어도 핍박을 감수해야 했던 시민운동도 마찬가지다. 환경운동과 경제민주화운동, 여성운동, 노동운동, 문화운동 들이 없었다면 우리 사회의 다양성은 물론이고 질서와 정의는 요즘보다 형편없을 게 분명하다.

우리 시민운동이 성숙했다 평가하기 아직 이르지만, 맹아기였던 시절, 세련되지 않았어도 활동가와 시민들의 헌신이 있기에 영흥도의 석탄화력발전소는 전국 최고 수준의 오염 저감장치를 부착할 수 있었다. 발전당국과 환경협정을 맺고 실천을 감시하는 민간조사단을 출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발전소 자체는 막지 못했다. 법과 제도의 허점 탓에 현재 6기로 늘어난 발전시설을 감내하고 있다. 막았다면 수도권의 미세먼지는 지금처럼 심각하지 않았겠지.

발전소가 들어선 영흥도 해안은 어획고가 풍성할 뿐 아니라 경관이 빼어난 갯벌이었지만 건설업체는 무참하게 헐어낸 주변 녹지로 거침없이 매립했다. 후손들이 누려야할 생태적 풍요로움이 사라지는 현장을 방송사 다큐멘터리 팀과 접근할 기회가 있었다. 건설업체에 사전에 취재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구했다면 핵심을 고발하기 어려웠을 텐데, 방송 팀에 앞서 반대 주민과 낡은 소형차를 타고 현장으로 들어섰다 그만 폭력을 마주해야 했다. 건설업체가 고용한 듯 보이는 건장한 사내들이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퍼부으며 창을 꼭 닫은 차를 부수고 뒤집으려는 게 아닌가.

사진: 저녁 무렵 영흥화전 굴뚝에서 나오는 백연. 백연에 섞인 오염물질은 초미세먼지로 변해 대기로 확산된다. (출처: 대한뉴스, http://www.dhn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3427)

이윽고 방송 팀이 다가왔고 언론사 마크를 본 건설업체 간부의 만류로 폭력배들은 뒤로 물러섰지만 우리는 공포에 떨어야했는데, 그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사건이 최근 영종도 앞의 준설토 매립장에서 발생했다. 인천 환경단체의 중견 활동가 한 사람이 언론사 카메라 앞에서 얼굴에 선혈이 낭자하게 폭행을 당한 사건이었는데, 그 폭력도 국책사업이 제공했다. 암모니아 악취가 진동하는 토양으로 매립한 현장을 고발하지 않았다면 갯벌을 잃은 인천 앞바다는 어떻게 버림받았을까?

수많은 희생이 있기에 우리나라는 독립했고 어느 정도 민주화를 이뤘지만 단단하지 못했다. 독재에 의해 사회정의가 왜곡되던 시절을 그리워한 세력의 발호는 끔찍했고 결국 민중의 촛불을 불렀다. 그 결과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7개월 빨리 실행되었지만 선거 이후가 촛불의 요구가 진정성 있게 반영될 것인가? 당선 전부터 주변에 운집한 사람 중에 미덥지 못한 이도 보이지만 공약으로 내놓은 국책사업의 규모와 내용이 탐탁한 건 아니다.

촛불은 국책사업의 개발독재를 바꿀 계기를 만들 수 있을까? 이권을 먼저 생각한 사람들의 요구를 피할 수 없어서 동의한 국책사업 공약을 폐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새로 구성된 정부는 사업 결정 과정에 폭넓은 논의를 생략하면 안 된다. 지방이 국가와 동떨어진 게 아니고 중앙정부의 관료가 시민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민원의 목소리는 판단 잣대가 아니다. 경제정의만이 아니라 사회정의와 환경정의를 살피며 사업의 성격과 범위를 투명하게 논의해야 하겠지만, 촛불의 명령은 그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 다음세대의 건강과 행복을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 후손 없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작은책, 2017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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