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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해야 하는가?
김홍한목사의 이야기 신학
2017년 06월 01일 (목) 14:55:23 김홍한 khhyhy@hanmail.net

변화해야 하는가?

세상이 온통 변해야 한다고 한다. 개혁해야 한다고 한다. 창조적이어야 한다고 한다. 한 두 번들을 때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변하지 않으면 도무지 살아남지 못할 것처럼 윽박지르는 듯하다.

   

그런데 내가 왜 변화해야 하지?, 살기위해서?, 출세하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나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고도 살 수 있는데 굳이 자신을 변화시킬 필요는 없다. 내 소신대로, 내 장점대로, 내가 좋아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고 또 그렇게 살 때 행복할 수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사에 나를 맞추어야 한다면 내가 없는 것이다. 또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이다.

변해야 할 때도 있다. 변화 하지 않고는 살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내 스스로가 변화 한다. 저절로 변화한다. 그러나 그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라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상황이다.

사람에게는 변해야 할 것이 있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변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변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개인뿐만 아니다. 국가와 민족도 그렇다.

현대사회는 급격하게 변한다고 한다. 그러나 급격하게 변하는 것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물질문명이다. 보편적 진리는 거의 변화가 없다. 보편적 진리는 2,000년 2,500여 년 전에 이미 다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짜라투스트라, 석가, 공자, 탈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있었다. 2,000여 년 전에 예수가 있었다. 이분들의 가르침 이후 새로운 것이 별로 없다. 이후의 인류문명이라는 것은 이분들의 가르침에 대한 재해석이라 할 수 있다.

변화해야 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변화해야 한다는 것인가? 변화에는 전제가 있다. 이제까지의 것에 잘못이 있을 때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즉각 바꾸어야 한다. 공자는 논어 학이 8장에서 말하기를 “過則勿憚改(허물이 있으면 즉각 고친다.)”했다. 술이 3장 에서는 말하기를 “좋지 못함을 즉각 바꾸지 못하는 것, 이것이 나의 걱정이다”고 했다.
“君子豹變 小人革面”이라는 말이 있다. 주역 革卦(혁괘)에 나오는 말이다. 표범이 털갈이 하여 그 무늬가 선명해 지는 것처럼 군자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바꾼다는 것이다. 그것이 “군자표변”이다. 그러나 소인들은 안면을 바꾸는 것에 그친다.

변화해야 하는 것

젊은이들은 현실적응능력이 뛰어나다. 아는 것이 적고 경험도 적어서 자기정체성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새로우니 열심히 배우고 공부해서 자기 것을 만들어야 할 때다.
늙은이는 어느 정도 자기 정체성이 형성된 사람이다. 세상사에 특별히 새롭게 배울 것이 없다. 늙은이들에게 변화해야 한다고 윽박지른다면 가혹한 일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잘못된 것이 있다면 죽을 날을 받아 놓은 늙은이라도 바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용기다. 그것이 거룩함이다. 그것이 회개다. 이러한 경우는 거의 없다. 정말이지 늙은이가 이제까지의 자기 철학, 자기 논리를 바꾼다는 것은 자기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불가능에 가깝다. 가죽을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뇌를 바꾸는 것이니 불가능하다.

잘못된 것임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인정도 하지 않으며 알면서도 그것을 고수한다면 그는 아무리 나이가 들고 학식이 많고 지위가 높아도 소인일 뿐이다. 주변과 사회에 걸림돌이 된다. 積弊(적폐)세력이다.

변화를 요구하지 말라.

나는 변화를 요구하는 이들의 속셈을 본다. “지금 네가 처한 어려움은 네가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는 이야기다. 모든 책임을 당사자에게 지우는 얄팍한 의도가 들어있다. 정치지도자가 국민에게, 기업주가 노동자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선생이 제자에게, 목사가 성도에게 책임을 돌리는 이야기다. 게다가 “네가 변화하여 나에게 맞추어라. 그러면 내가 너를 등용 하겠다”는 말이다.
일전에 부산에서 노숙자와 함께 하는 자칭 “거지대장” 김홍술 목사님이 방문하여 함께 밤을 새며 나눈 이야기 가운데 그가 말했다.

“사람들은 노숙자들을 자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할 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정말이지 노숙자의 입장에서 한 말이기에 가슴 깊이 다가왔다. 노숙자들에게 변화할 것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디 노숙자뿐이겠는가? 모든 이들을 그렇게 대해야 한다. 누구도 타인에 대해서 변화하라고 강요할 자격은 없다.

변화하는 세상, 변화하는 개인

양적 변화가 축적되면 어느 순간 질적 변화가 된다. 눈이 내린다. 눈이 쌓인다. 거듭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나무의 가지가 부러지고 지붕이 무너진다. 많은 액체에 한 방울 한 방울 화학 물질이 들어간다. 그러다가 어느 한 방울이 떨어지는 순간 많은 액체가 순식간에 질적 변화를 하면서 색이 변한다. 그것을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라고 한다. 사회적 모순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혁명이 일어나고 사회가 변한다. 개인도 그렇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형편과 처지에 닥치게 되면 개인은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다. 역시 지식과 경험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질적 변화를 한다. 변화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순식간에 어쩔 수 없이 변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세상의 법칙과 자연의 법칙, 인간의 법칙이 다르지 않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였다. 각종 개혁을 추진하는 모습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개혁이 티핑 포인트를 넘어야 한다. 그러면 당연히 그러한 것이 된다. 역사가 되고 전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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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일 서울소재 들꽃향린교회 예배 설교를 했는데 제목은 “왜 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고난 받을까?” 입니다. 그리고 동화를 한편 읽어 주었습니다. 이야기 신학 18호( 2009. 9. 16)에 실었던 동화입니다.

왜 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고난 받을까?

마을에 홍수가 났습니다. 논밭이 모두 물에 잠기고 가축들이 물에 떠내려갔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사람 둘이 물에 떠내려갑니다. 한사람은 교회 집사이고 그 마을에서 사람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그 마을에서 가장 못된 사람으로 인정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물에 떠내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을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진정 살아 계시다면 분명 저 착한 교회 집사는 구해주실 것이고 저 악한 망나니는 이번 기회에 죽어 마땅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착한 교회 집사는 떠내려가서 죽고 못된 망나니는 꾸역꾸역 살아 나왔습니다. 실망한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게 되고 결국 교회는 문을 닫게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왜 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고난 받을까?” 아주 오래된 질문이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질문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들은 많은 학살을 당했지요. 그 때 그들도 이와 비슷한 질문을 했습니다. “왜 우리 유대인들이 이토록 극심한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은 우리의 국가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우리를 보호해 준다”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이스라엘 이라는 국가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시오니즘입니다. 가톨릭 여신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시오니즘을 무신론 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국가를 택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하나님도 사람을 공짜로 구원하실 수는 없습니다.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기독론의 골자입니다.

“왜 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고난 받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나름대로 다음의 동화로 엮었습니다.

다시 살아난 명필이(김홍한 글)

옛날, 어딘지 모르는 어느 산골마을에 작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목사님도 없고, 전도사님도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 마을에 교회가 서게 된 것은 더 옛날 어떤 전도자가 그 마을에 와서 집집마다 다니며 열심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여 서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가르침이 해괴하다는 동네 어른들의 말씀에 마을 청년들이 그 나그네를 잡아다가 두들겨 패고 반쯤 병신을 만들어 마을에서 쫓아냈었답니다. 그 후 몇몇 사람들이 몰래 몰래 만나서 그 나그네가 주고 간 성경말씀을 읽고 기도하곤 하였지요. 그래서 교회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적어서 그 교회는 목사님을 모시지 못하였고 가끔 읍내에 있는 교회의 목사님께서 오셔서 설교해 주시곤 하였습니다. 목사님께서 오실 때는 교인들이 마치 임금님이라도 오시는 양 정성을 다하여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 마을에는 명필이와 덕배가 살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둘도 없는 단짝친구였습니다. 성격도 비슷하고 외모도 비슷해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치 형제간이나 쌍둥이처럼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명필이는 열심히 교회에 다녔고 덕배는 교회에 다니지 아니하였습니다. 아무리 명필이가 덕배 에게 교회에 가자고 해도 덕배는 그것에 대해서는 바윗덩이처럼 완고했습니다. 명필이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 다닐수록 덕배는 교회를 멀리했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덕배는 명필이가 교회에 가는 것을 방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명필이가 교회에서 예배하는 동안에 덕배는 밖에서 뻐꾸기 소리를 내면서 명필이를 불렀습니다. 그 소리는 덕배가 내는 소리라는 것을 명필이는 물론 동네사람들도 다 알았습니다. 명필이는 몇 번은 덕배의 부름에 못 이겨서 예배도중에 자리를 뜨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었습니다. 모처럼 읍내에서 목사님이 오셔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그날따라 덕배의 뻐꾸기 소리는 더욱 크고 집요하게 울어댔습니다. 명필이는 덕배의 호출을 무시하고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데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덕배는 드디어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명필이를 빨리나오라고 던진 작은 돌멩이에 그만 예배당의 유리창이 박살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 명필이와 덕배의 우정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덕배를 보는 눈초리도 곱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모두들 덕배가 너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덕배가 귀신들렸다고 까지 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덕배는 점점 더 이상하게 변하였습니다. 그 놀기 좋아하고 순박한 덕배가 점점 난폭해졌습니다. 술 마시는 횟수도 많아지고 술에 취하면 동네 어른도 몰라보는 망나니가 되었습니다. 주일날은 물론 평소에도 예배당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며 예배당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빈정거리곤 하였습니다. 처녀아이들은 무서워서 혼자서는 예배당에 출입하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덕배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는 명필이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시는지 안 들으시는지 ….

어느덧 덕배는 옛날의 그 순박하던 얼굴은 사라지고 지금은 험상궂은 얼굴로 변해 있었습니다. 명필이는 덕배의 악행을 속죄라도 하듯이 더욱더 열심히 교회에 다녔고 덕배가 저지르는 나쁜 일들에는 대신 사과하고 변상까지 하였습니다. 이렇게 여러 해가 흘렀습니다.

음력 6월 장마철이 되었습니다. 그해 장마는 참으로 지루하고 길었습니다. 어느 날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 있었습니다. 마침 주일날이 되었는데 개울물이 불어서 냇가를 가로지른 외나무다리 가까이 까지 물이 차올라 있어서 건너기에는 심히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날도 덕배는 한 손에는 술병을 또 한 손에는 지개 막대기를 들고 물가에 앉아서 예배당으로 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욕설을 퍼붓고 돌을 던지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앗!” 하는 사이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이 물에 빠져 떠내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름 아닌 명필이와 덕배였습니다. 둘이는 허우적거리면서, 사람 살리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가파른 계곡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사람이 물에 빠져 떠내려간다는 소리에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 나왔습니다. 그러나 누구하나 손 쓸 수도 없이 두 사람은 물에 쓸려갔습니다. 그때 온 동네 사람들은 교인이건 아니건 간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확신을 했습니다. 착한 명필이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날 것이고 저 못된 덕배는 물에 빠져 죽고 말 것이라고 ….
그러나 이게 웬 일입니까. 결과는 정 반대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명필이는 그냥 떠내려가 죽어버리고 덕배는 꾸역꾸역 살아서 올라온 것입니다. 온 마을 사람들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살아나온 덕배는 그 후로는 더 의기양양해서 소리쳤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어 하나님을 믿느니 차라리 내 주먹을 믿어라."

라고 말입니다. 마을사람들은 물론 교인들도 그 말에는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명필이가 죽고 덕배가 살아 나온 것은 하나님이 없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후로는 덕배가 교회 근처에서 어슬렁거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교인들이 하나 둘씩 교회를 떠나고 급기야는 아무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회는 문을 닫고 폐허가 되어버렸습니다.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명필이의 죽음은 사람들 기억 속에서 점차로 멀어져 갔습니다. 폐허가 된 예배당은 철없는 아이들에게는 유령의 집으로 알려져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덕배도 더 이상 못된 망나니가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싸울 교인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덕배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습니다. 10년 전 물에 빠져 죽어 가는 명필이에 대한 기억입니다. 덕배가 본 명필이의 모습은 마치 천사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덕배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참으로 안타까워하고 불쌍해서 어쩔 줄 모르는 바로 그러한 눈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눈빛이 덕배의 자존심을 건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에게도 그 이야기만은 하지 않은 채 10년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10년의 세월은 참으로 많은 것을 변화 시켰습니다. 덕배의 마음에 명필이에 대한 그리움이 싹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덕배는 명필이를 미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만 명필이가 자기보다 교회를 더 좋아하는 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사실 덕배는 교회를 싫어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명필이 말고 다른 사람이 강권하였더라면 그도 교회에 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명필이 외에는 모두들 지나가는 말로만 권했을 뿐 진심으로 그에게 교회에 다니라고 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덕배는 누군가의 강한 권면을 기다리며 예배당 주변을 서성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공교롭게도 유리창사건으로 불거져서 그 지경이 된 것이었습니다.

덕배는 가끔 명필이에 대한 그리움이 억제할 수 없는 슬픔으로 다가와서 굵은 눈물을 한없이 흘리기도 하고 나무하러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는 통곡하며 울기도 하였습니다. 물에 빠져 쓸려가면서 바라보는 명필이의 그 연민의 눈이 그대로 덕배의 눈이 되어 폭포수 같은 눈물을 쏟아 내었습니다. 덕배는 명필이가 믿던 그 하나님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하나님 왜 명필이를 죽이고 나를 살리셨습니까? 당신이 진짜 살아 계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마땅히 제가 죽고 명필이가 살았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덕배는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 있을 때까지 집요하게 하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그 답을 얻기 전에는 도무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덕배에게 운명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그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말소리인지 바람소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는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아직도 그것을 모르느냐 네 대신 명필이가 죽은거야."

그 말씀은 덕배와 명필이의 모든 수수께끼를 한꺼번에 풀어주었습니다. 아니 세상 모든 수수께끼가 다 풀리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후로 덕배는 명필이가 그리우면 폐허가 된 예배당으로 갔습니다. 덕배가 예배당에 드나들면서 예배당은 점차로 제 모습을 갖추어 가기 시작 하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화창한 봄날 주일 아침, 예배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일터에서 일하던 마을사람들은 모두 일손을 멈추고 예배당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 둘씩 일손을 놓고는 예배당으로 달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전에 교회에 다녔던 사람들은 벅찬 감격에 숨 차는 줄도 모르고 달렸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아니하였던 사람들도 호기심에 교회당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예배당 앞에는 어느덧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눈물이 범벅되어 종 줄을 당기는 덕배의 모습을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저건 덕배가 아니야 명필이야. 명필이가 다시 살아서 돌아온 것이야 …."

2017년 6월 1일 178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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