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우리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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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우리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
  • 박철
  • 승인 2017.05.11 1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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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의 아침산책 이야기

아침산책 135.

오늘도 나는 길을 걷는다. 비온 후 숲은 청신하다. 저절로 몸과 마음이 편안해 진다. 오랫동안 산책을 하다보면 항상 고갯마루에 서게 되는데, 이때 또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무진 애를 써서 높은 곳에 올라간 우리의 몸이 돌아서는 순간, 발밑에 드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혹은 길을 돌아서면 경치가 바뀌어 산맥이 나타나기도 한다. 장엄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도취된 전망에, 다른 발견되는 최후의 탄성에 새로운 풍경 같은 비밀에 그것에 동반되는 환희에 근거하여 많은 금언들이 만들어진다.

나도 아름다운 고갯마루에 서고 싶다. 환하게 펼쳐지는 세계를 조망하고 싶다. 양희은의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을 흥얼거리며 길을 걷는다.

이봐 고갯마루에 먼저 오르더라도
뒤돌아서서 고함치거나 손을 흔들어 댈 필요는 없어
난 바람에 나부끼는 자네 옷자락을
멀리서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말야
또 그렇다고 괜히 허전해 하면서
주저앉아서 땀이나 닦고 그러지는 마
땀이야 지나가는 바람이 식혀 주겠지 뭐
혹시라도 어쩌다가 아픔 같은 것이 저며올 때는
그럴땐 바다를 생각해
바다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구...
(2017.5.11)


아침산책 134.

가는 비가 내리다 그쳤다. 나는 오늘도 길 위에 있다.
걷기는 차라리 사람이 참여한다고 느끼게 한다.
즉 식물과 광물, 동물을 내 안에서 느끼는 것이다.
심지어는 필수품조차 없이 걷는다는 것은 자신을 자연 요소에 맡기는 것이다.
이렇게 하고 나면 더 이상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
더 이상 계산도 필요 없고 자신감도 필요 없다.
그 대신 세계의 관대함에 대한 완전하고도 충만한 신뢰가 생겨난다.
돌들과 하늘과 땅, 나무들, 우리에겐 이 모든 것들이 보조자가 되고 자연이 준 선물이 되고 스승이 된다. 나는 오늘도 영원을 품고 자유인이 되는 길을 향하고 있다. 한줌 바람처럼 아무 것에도 메이지 않고 터벅터벅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자유인이란 이름으로!
(2017.5.10.)


아침산책 133.

치통이 좀 가라앉아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오늘도 나는 길을 걷는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햇볕조차 들지 않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보다 걸으라고 조언했다. 우리는 책에서만, 책을 읽어야만 사상으로 나아가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장자는 ‘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발은 그 자체로서의 공간의 작은 부분에 속하지만 임무(걷는 것)는 이 세계의 공간을 연결하는 것이다.” 그렇다. 큰 면적을 차지하지 않는 두발로 우리는 거대한 행위, 세계와 개인을 연결하는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내면은 되레 가난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예전보다 걸을 기회가 줄어서이지 않을까? 오롯이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 온전한 자기를 발견하는 시간, 바로 걸을 때의 시간일 것이다.

-어제보다 미세먼지가 훨씬 덜하지만 저 멀리 황령산이 뿌옇게 보인다. 숲은 여전히 내밀하고 친숙하다. (2017.5.8.)


아침산책 132.

오늘도 나는 길을 걷는다. 오른발을 내밀고 다시 왼발을. 또는 왼발을 내밀고 다시 오른발을. 이 반복, 이 단순한 행위에 ‘앞으로’라는 시공간에 들어선다. ‘앞으로’의 방향이 생긴 순간 ‘미래’라는 시공간에 들어선다. 대부분 미래를 곧 닿을 곳이라고 생각하지 끝내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생각하지 않는 척 한다.

걷는 다리는 간명하다. 단호하지도 않다. 걷는 모습을 전체적으로 보고 있으면 허술하다. 걷는 것에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다. 욕망도 없다. 다리는 그저 어긋나는 행위를 반복할 뿐이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얼굴을 떼어내고, 다리만을 쳐다보면, 일종의 호소처럼 보인다. 이렇게라도 반복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게 될 거라는.

시간에게 역사의 알리바이를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길은 끊임없이 자신으로부터 탈주하는 방식으로 제 존재를 증명한다. 길의 이 기이한 자기 증명놀이. 공간을 사라지게 하는 방식을 통해 다시 공간에 들어서게 하는 방식, 시간이 사라지게 하는 방식을 통해 시간이 들어서게 하는 방식, 걷기, 오른발과 왼발 사이, 당신과 나의 사이.

-비는 그치고 햇살은 부드럽고 새소리는 예쁘다. (2017.5.5.)

아침산책 131.

오늘도 나는 숲에 들어섰다. 숲에는 태어난 자리를 억울해하는 생명이 없다. 나무와 바람과 공기와 새와 온갖 생명체가 어울림의 신비를 만들어준다. 숲은 타자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숲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오직 자기 자신과의 경쟁이요, 새로운 영역의 창조임을 보여주고 있다.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핏빛 대지에서 영혼을 고갈시키며 앞을 다투는 경쟁이 아니라 나만의 푸른빛이 가득한 공간에 서는 것, 감히 추한 욕망이 넘보지 못할 자기만의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타자를 파괴하여 내 하늘을 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낡은 나날을 부숴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것이 경쟁의 요체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천박함으로 가득한 세상을 보내고, 아름다운 경쟁으로 더욱 푸르러지는 세상을 그리워한다.

오늘도 나는 이 숲에서 그날을 그리워한다. 내게 주어진 길을 뚜벅뚜벅 가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시원하고 햇살은 눈부십니다. 돌아보면 행복 아닌 것이 없다.

-유선정에서 점심으로 김밥과 시래기된장국을 먹었는데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산뽕잎을 좀 뜯어서 내려갈 생각이다.
(2017.5.3)

아침산책 130.

오늘도 나는 길 위에 있다. 지금 계절은 봄을 지나 여름을 향하여 성큼성큼 가고 있다. 걸으면서 '나답게 산다는 것'에 몰두한다. 나답게 산다는 것, 숲에서 사는 것이 나다운 것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길을 잃어봤기 때문이다. 나로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길을 잃을까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생명 모두는 언제나 길을 잃음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길을 찾기 때문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처럼, 길을 잃어 보기 전에는, 다시 말해서 세상을 잃어버리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찾아내지도, 자신이 지금 서 있는 위치와 자신이 맺고 있는 무한한 관계를 깨닫지도 못하는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모색이 필요하다. 길을 잃어봐야 내 길이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징표는 그것이다. 그 일로 기쁘고 행복하고 창조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에 아름답게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뚜벅뚜벅 걸어봐야 한다.
(2017.4.29)

아침산책 129.

나는 오늘도 오솔길을 걷는다. 길에게 나를 맡긴다. 숲길을 걸으면서 다짐한다. 나는 이제 나답게 살 것이다. 그런데 나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인가?

그것은 돈이나 출세 때문에 비굴해짐이 없는, 자존과 자립으로 가득한 삶이다. 나의 편리를 도모하고자 타인의 이익을 빼앗지 않는, 죄짓지 않는 삶이다.

숨 막히는 도심에 갇힌, 자연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 놓고 채울 수 있는 고삐 풀린 삶이다. 모색하고 싶으면 싶은 대로, 그만두고 싶으면 싶은 대로, 그렇게 가슴이 시키는 대로 창조의 자유를 벅차게 누리는 삶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음이 두어 뼘 더 자유롭고 평화로워지는 삶이다. 이 모든 것으로 조금 더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삶이다. 내가 나답게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삶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지금 내 발걸음은 한없이 경쾌하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2017.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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