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에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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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에게 바란다
  • 김홍한
  • 승인 2017.05.02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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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한목사의 이야기 신학, 선택외

선택

“영국의 과학자이며 우생학의 창시자인 골턴이 여행 중에 시골의 가축 품평회 행사를 보게 됩니다. 그 행사에는 소의 무게를 알아맞히는 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 정확하게 맞힌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800개의 표 중 숫자를 판독하기 어려운 13장을 제외한 787개의 표에 적힌 무게를 평균했더니 1.197파운드였습니다. 실제로 측정한 소의 무게는 1,198파운드 였습니다. 군중을 한 사람으로 보면 완벽한 판단력입니다. 우파 愚衆論者인 골턴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집단의 지적 능력과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신영복의 <담론> 17쪽 -

개인의 판단 능력은 충분히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의 판단능력은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비할 정도로 정확하다.

대통령 선거가 코앞에 다가왔다. 이제 국민은 여러 대통령 후보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 한다. 틀림없이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지난 시절 대통령 선택도 현명한 선택이었을까? 탄핵되고 구속 수감되어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선택도 현명한 선택이었단 말인가?
대중의 뜻이 조작될 때,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억압될 때, 선전 선동에 의하여 미혹될 때 대중의 선택은 잘못될 수 있다. 그러면 모두에게 불행이다. 대중뿐만 아니라 대중의 뜻을 조작한 이, 억압한 이, 선전선동으로 미혹한 이 모두에게 불행이다.

새 정부에게 바란다.
-경제정책에 대하여-

人口에 회자되는 말 가운데 큰 거짓말이 “경제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내 기억에 “경제가 좋아졌다”는 말은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항상 “작년만 못하다”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좋은 옷, 더 좋은 자동차, 더 좋은 집에 살고, 외식도 자주하며 여가 생활도 더 많이 즐긴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경제가 어려워졌다”는 말은 경제성장이 우리의 욕망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경제를 활성화해서 재물을 풍부히 한다 하더라도 재물이 한곳으로 몰린다면 그 많은 재물은 오히려 썩어서 악취만 풍기고 사회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질 뿐이다. 경제성장보다 분배가 더 중요한 이유다. 이제까지의 것이 모자라다면 더 생산해야 하겠지만 충분히 넘치고 있으니 분배를 합리적으로 하는 것이 우리나라는 물론 온 인류의 경제방향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공자는 말했다.

“나라나 가문을 가지고 있는 자는 그 적은 것을 염려하지 않고 균등치 못함을 염려하며, 가난한 것을 염려하지 않고 불안한 것을 염려한다. 대개 균등하면 가난이 없고, 평화하면 적지 않고, 안정되면 기울지 않는다.” - 論語 계씨 1장 -

우리나라에서 더 이상의 제조업 중심의 경제성장은 안 된다. 그것은 자원을 더욱 낭비하는 것이고 환경을 더욱 파괴하는 것이고 쓰레기만 양산하는 것이다. 경제성장의 방향은 문화산업으로 해야 한다. 예술, 교육, 종교, 철학 등 문화산업을 육성하고 문화를 소비해야 한다. 국민들의 물질소비 욕구를 문화소비로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대중의 끝없는 물질적 욕망을 채우기란 불가능하다. 그것을 채우려고 하다가는 인간세상 자체가 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대중의 욕망을 채우려 하기 보다는 부질없는 욕망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역할을 무엇이 할까? 철학이 한다. 문학이 하고 예술이 한다. 그 무엇보다도 종교가 한다.

-일자리에 대하여-

2008년 2월 25일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이다.”고 말했다. 매우 지당한 말이었다. 취임 연설에서 그런 말을 했으니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일자리라는 것이 허접한 일자리가 대부분이었다. 일자리를 만들기도 해야 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일자리를 나누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한 사람이 일해서 열사람이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노동의 효율이 향상된 사회다. 노동한다는 것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라 특권이다.
특권은 나누어야 한다. 소득만 나눌 것이 아니다. 일자리를 나누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주 4일, 주 3일 근무함으로 일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외교, 안보정책에 대하여-

북핵문제로 미국과 중국이, 일본이 외교적 만남이 빈번하다. 그런데 막상 당사자인 우리나라만 빠져있다. 그리고 대통령 탄핵이 진행되는 도중에 사드배치가 결정되더니 대통령 선거 유세가 진행되는 가운데 기습적으로 사드가 배치되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나라가 주권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군사주권이 없다. 전시작전지휘권을 미국이 가지고 있다. 식량주권도 없다. 식량 자급률이 20%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에너지주권도 없다. 에너지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식량과 에너지, 그리고 나라를 지키는 군사지휘권을 모두 외국에 의존하고 있는 나라가 어떻게 자주독립국가일수 있겠는가?

차기정부에 바란다. 마땅히 자주독립국가를 지향해야 한다.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서 당당하게 집권한 정부이니 그럴만한 명분도 있고 힘도 있다. 국민이 든든한 힘이 되어줄 것이다.

- 성서 읽기 -
스승을 죽여라.(마 11장)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마11:2)

신랑을 만나면 친정 아비를 떠나고 신부를 맞으면 어미를 떠나야 합니다. 혁명을 하려면 주군을 버려야 합니다. 하늘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세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면 육신의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새로운 가치를 세우려면 스승을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죽어야 했습니다. 세례요한을 죽인 이는 헤롯이 아닙니다. 예수가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걸림돌입니다. 아직도 사람들은 세례요한에게서 구원을 바라고 그를 그리워합니다. 그래서 구약(舊約)이라는 무덤에 묻어야 했습니다.
스승을 떠나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석가를 만나면 석가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말이 있습니다. 초등학교선생은 학생들을 졸업시켜 중학교에 진학시킵니다. 대학교 선생도 학생들을 졸업시켜 사회로 보냅니다. 그런데 선생이 학생들을 붙들어 놓고 졸업시키지 않으면 선생이 아니라 원수입니다. 학생을 죽이는 것입니다.
스승을 떠나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진짜선생님은 하나님입니다. 예수께서는 “선생이라는 소리를 들으려 하지 말라. 선생은 하나님뿐이다”하셨습니다. “땅에 있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하지 말라. 아버지는 하나님뿐이다”하셨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내가 떠나가야 성령께서 오신다”며 스스로 제자들을 떠나셨습니다.

니체는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홀로 가려 한다. 나의 제자들이여, 이제는 너희들도 홀로 가거라. 그것이 내가 바라는 바이니. 나를 떠나가라! 그리고는 차라투스트라를 거부하라, 아니 차라리 더 좋은 것은 그를 부끄러워하라, 그는 너희를 속였을 테니. 너희가 진정코 지식을 가졌다면 자기의 적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또 자기의 친구를 미워할 줄 알아야 한다. 너희가 언제나 제자인대로 있다면 너희는 스승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다. 너희들은 나의 월계관을 빼앗고 싶지 않으냐? 너희들은 나를 공경한다. 그러나 어느 날 너희들의 공경심이 무너진다면 어찌하겠는가? 조심하라, 넘어지는 조상(彫像)에 깔려 목숨을 잃을 염려가 있느니. 너희는 차라투스트라를 믿는다고 말하느냐? 그러나 차라투스트라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너희는 나의 신자이다. 그러나 신자가 되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너희는 아직 너희 자신을 찾지 못하였을 때 나를 발견하였다. 그리고는 나를 믿는 모든 신자가 그렇게 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믿음이라는 것은 공허한 것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 (고 안병무박사 홈페이지에서 재인용)

효자(孝子) 예수(마11:26-27)

“어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제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마11:26-27)

예수께서는 의붓아버지 요셉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신바가 없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서도 언급 한 바가 없습니다. 적어도 공관복음에는 그러합니다. 이런 예수님을 효자라 할 수는 없지요. 공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자의 어록이라 할 <논어>에는 아버지 공숙량흘과 어머니 안씨에 대한 이야기가 한마디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말 효자(孝子)입니다. 최고의 효자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받든 훌륭한 아들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의 많은 것을 위탁받았습니다.
효(孝)를 말하려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효를 말해야 합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주 가까운 이웃일 뿐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데 방해가 된다면 원수입니다.
효자가 된다는 것은 발효(醱酵:효(孝)를 발(發)한다)하는 것입니다. 포도가 포도주가 되는 것이 발효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변화는 것이 효자입니다.

변질된 유교(儒敎)는 하나님 아버지를 잊어버리고 육신의 아비에 대한 효(孝)와 세속 군주에 대한 충(忠)을 가르쳤습니다. 육신의 아버지와 세속의 군주가 하나님 아버지를 대신했습니다. 하나님 아닌 것이 하나님을 대신했으니 우상입니다.
우리나라의 충효사상(忠孝思想)은 공맹(孔孟)의 가르침이 아니라 질서유지의 수단으로 전락된 지배이데올로기 입니다.

악법은 법이 아니다.(마12:1-8)

선생님과 제자들이 공부를 하는데 고양이가 얼쩡거려 수업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지시하시기를 “앞으로 수업시간 전에 고양이를 묶어놓아라”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 수업시간이 가까워서 고양이를 잡아 묶어놓으려 하는데 고양이가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늙어 죽었나봅니다. 제자들은 고양이를 잡아 묶어놓으라는 선생님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서 서둘러 고양이를 한 마리 구해다가 묶어놓고 수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수업을 방해하는 원인으로서의 고양이가 사라졌으니 “수업시간 전에 고양이를 묶어놓아라”는 지시도 사라져야 하건만 지시는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모든 법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필요가 없으면 사라져야 합니다. 어떤이는 말하기를 “법은 지켜야 한다”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법은 지키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필요해서 만든 것입니다. 필요가 없는 법, 잘못 만든 법은 가차 없이 폐기해야 합니다.
안식일 법은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진 법이건만 세월이 흐르면서 오히려 사람을 억압하는 것으로 변질 되었습니다.

“악법도 법이다”는 말은 도무지 엉터리입니다. 안식일 법처럼 좋은 법도 허례허식이 되고 사람들의 짐이 되자 예수께서 파기해 버리셨는데 하물며 악법이겠습니까? 악법은 법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평화가 아닌 질서유지를 위한 강자의 무기입니다. 예수만이 안식일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적과 동지 1 (마12:22-32)

“내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며, 나와 함께 모아 들이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다.”(마12:30)

스승까지 죽인 마당에 못 할 것이 무엇인가? 가장 큰 장벽을 무너뜨린 담에야 못 할 것이 무엇인가? 저 철옹성 같은 율법, 겉으로 보기에는 철옹성이지만 이미 충분히 부식되었습니다. 밑뿌리부터 삭고 금이 갔습니다. 가차 없이 걷어찼습니다.
당황한 율법의 노예들이 아우성입니다. 천 년을 짓눌러온 무거운 돌을 깨 부셨더니 오히려 분노합니다. 마귀 짓 이라고 합니다. 바알세불 들렸다고 합니다.
이집트냐 광야냐 선택해야 했듯이, 하나님이냐 바알이냐 결단해야 했듯이 참 자유냐 아니면 율법의 노예냐 선택해야 합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내 편에 서지 않으면 적입니다. 다른 것은 다 용납할 수 있어도 이것만은 안 됩니다. 부모형제도 소용없습니다. 내 편이라야 합니다. 내 편에 서는 자가 부모요 형제입니다.

적과 동지 2 (막9:38-41)

마태복음에서는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이들은 다 적이라 하셨는데 마가복음에서는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다 동지라 하십니다. 두 본문에서는 적과 동지의 기준이 확연하게 다릅니다.
가장 강력한 적은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 친척, 친구입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들이 예수님을 귀신들렸다고 할 때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적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을 대중에게 적용해서는 곤란합니다. 대중들은 비록 반대한다 하더라도 적으로 대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반대하지 않는 대중이라면 동지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적과 동지는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때에 따라 다르고 장소에 따라 다르고 사안에 따라 다릅니다.

- 노자 읽기 -
노자 20장


絶學無憂(절학무우) : 학문을 그만두면 근심이 없어질 것이다

배우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데, 배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노자는 배우는 일을 그만두라고 하는것일까? 공부라는 것이 많이 하고 깊게 하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공부다운 공부,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

제대로 된 공부는 하면 할수록 생각의 벽이 허물어진다. 제대로 하는 공부는 하면 할수록 생각의 폭이 넓고 깊어진다. 잘못된 공부는 하면 할수록 생각의 벽이 두꺼워지고 높아진다. 생각의 깊이는 깊어지되 폭은 좁아지니 더불어 남과 소통할 수 없다.

훌륭한 공부는 하면 할수록 생각이 하늘로 솟아오른다. 저급한 공부는 하면 할수록 이상을 잃는 것은 물론이요 현실에 집착하여 땅만 바라본다.

매일 공부하고 밤새워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많은 공부를 하면서도 경전에는 눈길한번 주지 않는 공부라면 사람 되기는 그른 공부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엄청나게 많은데 경전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거의 없다. 혹 경전을 가르치고자 해도 못하게 하는 것이 오늘날 교육의 현실이니 교육이 천박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천박한 교육을 하면서 시대를 한탄하는 이들을 보면 부아가 치민다. 온통 실용적인 것만 가르치고 인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가르치는 것이 없으면서 바르게 자라기를 바라는 것은 심지 않고 거두려 하고 가르치지 않고 결과만 기대하는 뻔뻔한 일이다.

경전공부라는 것이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다. 초중고생에게 성경, 불경, 유가의 경전 등을 가르친다면 어린아이들이 기절할 일이다. 그러니 경전은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칠 것이 아니라 소위 선생 된 자들이 공부해야 할 것이다. 나름대로 경전을 공부한 선생이 선생이다. 같은 것을 가르치더라도 경전을 공부한 선생과 그렇지 않은 선생의 가르침은 그 격이 다르다.

흉악한 공부도 있다. 흉악한 공부는 하면 할수록 재앙을 만들어 낸다. 흉악한 공부란 출세하려고 하는 공부, 쉽게 돈 벌려고 하는 공부, 유명해 지려고 하는 공부, 진실을 뒤집는 공부, 무기를 만드는 공부, 돈 굴리는 공부, 법정신을 비웃으며 농간하는 공부, 병치유가 아니라 병을 만들고 부추기는 공부. 소위 秀才(수재)라 하는 사람들이 기를 쓰고 그 공부를 한다. 그러니 이러한 학문에는 기쁨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근심만 쌓이고 적대감만 쌓이고 하면 할수록 자신을 망치고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 노자가 학문을 그만두라는 것은 이렇게 흉악한 공부다.

唯之與阿(유지여아) : <예>라는 대답과 <응>이라는 대답의
相去幾何(상거기하) : 차이가 얼마이겠는가
善之與惡(선지여악) : 선하다는 것과 악하다는 것의
相去若何(상거약하) : 차이가 얼마이겠는가
人之所畏(인지소외) :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不可不畏(불가불외) : 나도 두려워해야 하는가
荒兮其未央哉(황혜기미앙재) : 얼마나 허황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인가

도대체 선하다는 것이 무엇이고 악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선과 악이 명확히 구별 된다면 좋겠으나 일상생활에서의 선과 악은 쉽게 드러나지도 않고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집에서는 한없이 선한 아버지 이지만 밖에서는 한없이 모진 사람일 수 있고 반대로 밖에서는 매우 선한 사람이지만 집식구에게는 매우 모진 사람이 있다. 선한 뜻으로 했는데 악한 결과가 일어날 수도 있고 악한 의도로 했는데 선한 결과가 일어날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는 특별하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면 선하다 하고 해가 되면 악이라 한다.

선과 악의 구별이 모호하니 참 사람은 많은 경우 선악의 구별을 유보할 수 밖에 없다.

대기업 상품 보다는 중소기업 상품을 이용합시다.
대형유통회사 보다는 동네 가게를 이용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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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유성구 원내로 39번길 59 <새교회> 우)34227
☎ 010-3243-2665 E-mail: khhyhy@hanmail.net
후원계좌 / 농협 453047-52-043161 김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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