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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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
  • 김홍한
  • 승인 2017.04.19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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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호, 김홍한목사의 이야기 신학

박경리의 <토지>에서 송영광이 하는 말이다.

“그럴듯하게 치장하고 화려한 무대에서 연주할 때 관객들은 환호합니다. 열광합니다. 껍데기만 보구요. 껍데기를 벗어버린 무대 뒤가 얼마나 살벌한지 아십니까? 추악한 일들, 더러운 몰골들이 여기저기 웅크리고 있습니다. 지분으로 떡을 쳐서 청중의 인기를 독차지한 가수가 무대 뒤에선 임자 없는 추녀라든지, 많은 사람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배우가 기둥서방한테 머리채를 잡힌 채 지갑 바닥까지 털어야 했다든가, 인생이란 따지고 보면 본시 그런 모습, 으스스하고 을씨년스럽고 과히 아름다울 것도 없는, 그게 삶의 현실 아닐까요? 대체 신성한 곳은 어디 있습니까?"


목회자의 삶도 그럴 수 있다. 내면을 채우지 못하고서 대중 앞에 선다면 그 채우지 못 한 만큼 목회자의 삶은 광대의 삶이다.

<이야기 신학> 후원자 한분이 가끔 나를 그분의 친구들 모임에 초대한다. 나보다 10살 연상인 분들이다. 대부분 명문대학을 나온 분들이고 자기 분야에서 자리를 잡은 분들이다. 그분들은 나를 목회자라는 이유로 존중해 준다.

후원자, 그분이 왜 나를 불러낼까? 아마도 그분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오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서 조금은 신선함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분들에게 광대다. 목사라는 모습만 드러난 광대, 삶에 지친 생활인이고 살기 위해서 때로는 속물이어야 하지만 성직자 모습만 드러난 초라한 광대다. 그런데 그분들도 세상 속에서 자신들이 광대임을 느끼는 지도 모르겠다. 나름대로 성공한 삶을 살았지만 그 성공을 위해서 진정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한 인생, 성공하기 위해서 때로는 비굴했고 때로는 잔혹했던 자신들, 나름대로 성공했고 나름대로 안정되고 윤택한 모습의 뒤에 쓸쓸한 자신의 모습에서 무대 위와 무대 뒤의 두 모습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화려한 인물들, 그들도 드러난 모습과 뒤에 감추어진 모습이 다르다는 면에서 광대다. 드러나는 모습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꺼이 희생할 것을 말하지만 뒷모습은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추악한 거래가 이루어질 것이다. 후보들만 광대인 것은 아니다. 유권자들도 광대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 앞에서는 그가 마치 나라를 위한 구세주나 되는 냥 환호하며 열광하지만 속마음은 자기 개인의 이해득실을 따진다.

어떤 기자가 전설적인 프로레슬러 역도산에게 물었다.

“레슬링은 쇼가 아닌가요?”
역도산이 대답했다.
“인생이 쇼다. 나는 목숨 걸고 쇼를 한다.”

역도산 뿐 아니라 너무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쇼를 한다. 그런데 그 쇼라는 것이 정말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인생이 연극이라면 각본은 누가 쓰지? 연출은 누가할까? 작가에 의해서 기획되고 연출자에 의해서 올려진 연극을 위해서 목숨거는 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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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를 위해 목숨을 건다는 것, 어찌 보면 참 멋있다. 어떤 이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어떤 이들은 사랑을 이루고자, 어떤 이들은 신앙을 지키려고, 어떤 이들은 의리를 위해 목숨을 건다. 그 목숨을 거는 것에 대중은 찬사를 보낸다.

보수는 무엇이고 진보는 무엇인가? 내 생각은 이렇다. “목숨 걸고 지킬만한 절대가치를 인정하는 이들이 보수다. 반면 절대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진보다.” 보수는 목숨 걸고 지킬만한 사회적 가치, 종교적 가치, 보편적 가치를 인정하는 이들이기에 순국할 수 있고 순교할 수 있다. 순국자, 순교자는 언제나 보수에서 나온다.

1995년경, 김일성대학 교수출신의 남파 공작원으로 비전향 장기수 이었던 이와 여러 번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2000년 9월 2일, 비전향장기수 63명과 함께 북으로 갔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대화 내용이 있다. 내가 물었다.

“공산주의 사상을 고수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공산주의 사상이 인생을 송두리 채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그가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의리이지요.”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공산주의이념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그리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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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목숨 바치는 것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위하여 목숨 바치는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믿는 예수께서 그것을 거부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예수께서는 아마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는데 너희들이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그럼 내가 바친 목숨은 뭐냐?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말라. 너희는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해서 울어라. 누구든지 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라고 가르치는 자는 도둑이요 강도다.”

국가든지 종교든지 목숨 바칠 것을 요구하고 강요하는 것은 범죄다. 순국, 순교는 강요가 아닌 자발적으로 기꺼이 희생적인 삶을 사는 것이 순국이요 순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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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 올려 진 내 인생은 남의 눈에 보이는 인생이다. 그 배역이 좀 초라하면 어떠랴? 무대 뒤의 내 인생이 참된 것이 진짜 참된 것 아니겠는가?

노자는 <노자> 3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음은 비우고 배는 튼튼하게 하라 (虛其心 實其腹)
뜻은 약하게 하고 뼈는 튼튼하게 하라 (弱其志 强其骨)”

남에게 보이는 연극 같은 인생을 살지 말고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장자의 사상도 노자와 같다. 이야기 신학 134호에 장자에 대한 나의 이해를 이렇게 썼다.

“장자는 대붕으로 살지 않고 뱁새나 두더지로 살겠다는 것이다. 대붕은 그 뜻은 원대하지만 매우 불편한 삶이다. 한번 비상하기 위해서는 회오리바람을 일으켜야 하고 6월의 대풍을 기다려야 한다. 반면 뱁새는 이 가지 저 가지를 맘껏 오가는 자유로운 삶이다. 그래서 장자는 뱁새로 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뜻도 뱁새는 아니다. 뜻은 붕새의 뜻을 품고 삶은 자유로운 뱁새의 삶을 살겠다는 것이 장자다. 오히려 붕새의 뜻을 품은 사람은 뱁새의 삶을 살아야 한다. 까마득히 높은 하늘을 날며 세상을 보는 붕새에게 부와 권력을 탐하는 것은 올빼미가 썩은 쥐 움켜잡고 빼앗길까 염려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장자가 추구하는 삶이 어려운 삶일까? 붕새로 살겠다고 할 때 어려운 것이지 뱁새로 살겠다는데 무엇이 어렵겠는가?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뱁새로 살아간다. 그러나 몸은 비록 뱁새로 살지만 뜻도 뱁새로 살라는 법은 없다. 뜻은 온 우주를 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라고 하신다. 석가는 해탈 성불하라고 하신다. 공자는 군자가 되라고 하신다. 그게 대붕으로 사는 거다.

세상의 민초들이여, 우리가 비록 뱁새로 산다 하더라도 붕새의 이상을 가지고 살자. 하나님의 자녀로 살자. 생각도 뱁새일 때 한없이 착취당하고 짓밟히는 것이지 커다란 이상을 품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 그 누구에게도 짓밟히지 않는다.”

그래서 말인데 보이는 화려함을 위해 살지 말자. 누군가를 위한 삶, 무엇인가를 위한 삶을 살지도 말자. 자신의 삶, 사람다운 삶을 살자.

인생을 사는 요령

要領(요령)이라는 말은 腰(요/허리)와 領(령/목덜미)이다. 일의 요령을 잡는다는 것은 일의 핵심을 잡는다는 것이다. 건강의 요령도 허리와 목덜미를 잘 관리하는데 있다. 목에 힘이 있어야 무거운 머리를 지탱할 수 있고 허리에 힘이 있어야 일을 할 수 있다.

釋迦에게 인생을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苦(고)라 할 것이다. 生·老·病·死가 모두 苦라는 것이다. 그래서 괴로운 生·老·病·死의 인생을 떨치는 해탈이 불교의 목적이다.
孔子에게 인생을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難(난)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어렵고 어려운 인생살이를 人倫이니 德이니, 禮(예)니 하는 것으로 어려움을 풀겠다는 것이 유가의 가르침이다.
예수께 인생을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苦와 難을 합하여 苦難이라 할 것이다. 고난의 인생을 어떻게 풀 것인가?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다. 버릴 수 있고 피할 수 있다면 어찌 고난이겠는가? 고난의 십자가는 적극적으로 짊어지는 수 밖에 없다. 고난의 십자가는 등에 업어야 없어진다. “업다”는 말과 “없다”는 말은 같은 말이다.

인생이 고난이라면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요령이 있을까? 일전에 이야기 신학에서 말하기를 “삶은 열심히 살면 안 된다. 성실히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성실히 산다는 것은 참되게 사는 것이다. 참되게 산다는 것은 선을 굳게 잡고 놓지 않는 것이다. <中庸> 20장에 이르기를

“誠身에도 道가 있으니 선에 밝지 못하면 不誠한 것이다.”고 했다.

“참은 하늘가는 길이요 참되고자 하는 것은 사람가는 길이다.... 참되고자 하는 것은 선을 택하여 굳게 잡는 것이다.(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 .... 誠之者는 擇善固執之者也)”고 하였다.

고난의 인생을 사는 요령은 善이다. 성현의 가르침이 특별한 것이 아니다.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고 노력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匹夫匹婦도 알 수 있고 행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지극함에 이르러는 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알기 어렵고 행하기가 어렵다.

성서 읽기, 빌어먹어라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마10:9-10)

하늘나라 복음을 입으로 전하기도 하지만 더 효과적인 것은 온 몸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온 몸으로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빌어먹는 수밖에 없습니다. 빌어먹는 자들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이끄는 천사들입니다. 옛날 우리나라의 걸인들은 걸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한 푼 적선(積善)합쇼!” 합니다. 내가 너에게 선을 쌓을 기회를 준다는 것입니다. 걸인이 천사이고 걸인이 전도자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빌어먹는 자들입니다. 제힘으로 먹고 산다는 사람은 죽일 놈입니다. 가장 정직한 직업이라는 농부는 제힘으로 먹고살까요? 하나님이 씨 주시고, 하나님이 물주시고 하나님이 햇빛 주셔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농부가 한일은 고작 잘 자라도록 돌본 것이고 상품성 높인 것 밖에 없습니다. 어부는 어떠한가요? 제가 기른 물고기가 아닙니다. 물에 있는 물고기 그냥 잡아온 것입니다. 광부는 그냥 땅 속에 있는 것 파온 것뿐입니다. 농부, 어부, 광부도 이러한데 하물며 다른 직업인들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마10:16) 고 하셨습니다.

억울하기로는 뱀만큼 억울한 짐승이 없습니다. 뱀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데 사람들은 뱀으로부터 엄청난 피해나 당한 것처럼, 뱀은 더럽고 야비한 짐승, 악마의 화신인 것처럼 당연히 때려 죽여야 할 것으로 알고 달려듭니다. 그래서 힘없는 뱀은 도망하는 수밖에 없지요.

슬기롭기로는 도망치는 것이 제일이고 양순하기로는 잡혀 죽는 것이 제일입니다. 도망치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뱀, 하도 억울한 일을 당하였기에 뱀은 용이 되어야 하는가봅니다. 그래서 이런 생
각을 해 보았습니다.

“뱀아
너는 용의 새끼요 용이 될 놈이다.
그리고 네 본분을 잊지 말지니 네 번뜩이는 눈과 날름거리는 혀로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라.
그리고는 끝내 네 머리는 짓이겨져 죽어야 하느니라.
그래야 용이 될 수 있느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이에게 현실도피는 없다.

예수께서는 부모형제, 처자, 자기가 가진 모든 것,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버리고 따르라 하신다. (눅14:25-33)

오늘날 교회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을 실천에 옮긴다면 이단, 사이비로 매도되고 “깨어진 가정을 책임지라”, “내 자녀, 내 아내를 돌려 달라”는 아우성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현실을 긍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 유가와 묵가가 현실 참여의 가르침이라면 불교와 도교는 현실도피의 가르침이다. 유가 중에서도 묘당유가 정치현실에 참여하는 이들이라면 산림유는 세상을 떠난 이들이다. 불교 중에서도 대승불교가 현실 참여적 이라면 소승불교는 현실 도피적이다. 제도적 교회가 세상 가운데 있다면 수도원은 한발 물러서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이에게 현실도피란 있을 수 없다. 백이와 숙제가 현실을 떠났다고는 하나 그가 캐먹은 고사리는 역시 세상의 것이었다. 세례요한이 세상과 구별되어 바느질 하지 않은 옷을 입고 요리하지 않은 음식을 먹었지만 그 역시 세속의 사람들을 만나 가르침을 베풀었다. 석가모니가 속세를 떠났다고 하나 숱한 중생들을 구하러 속세로 돌아와야 했다.

예수께서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부모·형제·처자식을 버리고 숨으라는 것이 아니다. 거짓평화로서의 질서유지를 깨뜨리는 정의의 검, 세상을 찌르는 비수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이다.

노자 읽기, 노자 19장.

絶聖棄智(절성기지) : 성스러움을 그만두고 지혜를 버리면
民利百倍(민리백배) : 사람에게 이로움이 백 배나 더할 것이다
絶仁棄義(절인기의) : 인을 그만두고 의를 버리면
民復孝慈(민복효자) : 사람이 효성과 자애를 회복할 것이다
絶巧棄利(절교기리) : 재간 부리기를 그만두고 이익보려는 마음을 버리면
盜賊無有(도적무유) : 도둑이 없어질 것이다
此三者以爲文不足(차삼자이위문불족) : 이 세 가지는 문명을 위하는 일이지만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
故令有所屬(고령유소속) : 그러므로 뭔가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見素抱樸(견소포박) : 소박함을 보고 질박한 것을 품는 것이
少私寡欲(소사과욕) : <나>중심의 생각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이는 것이다

나에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 하나 있다면 성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노자는 성인됨을 버리라고 한다. 내가 매일 공부함으로 지혜를 쌓으려고 하는데 노자는 지혜를 버리라고 한다. 그러면 오히려 백성들에게 이로움이 백배나 될 것이라고 한다. 내가 성인이 되려하고 공부를 하려함이 백성들에게 해가 된다는 것인가?

노자의 이 가르침은 소위 권력자들에게 하는 말이다. 권력자들은 성인임을 자처하고 성인으로 추앙받기를 원한다. 자신들의 모든 행위는 仁과 義에 바탕한 것으로 가장하고 그렇다고 강요한다. 소위 충신이라는 이들은 그것을 기정사실처럼 홍보한다.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거두어서는 이따금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는 마치 仁한 것처럼 치장한다. 가혹한 세금에 백성들의 살림은 피폐해지고 심지어 가정이 깨어지니 孝니 慈니 하는 것이 사라진다.

그러니 권력자의 聖이라는 것은 큰 도적이다. 권력자의 智慧라는 것은 착취의 기술이다. 간신배들의 忠과 義라는 것은 조직폭력배들의 그것만도 못하다. 이러한 것들이 백성들에게는 모두 재앙이다. 그것을 간파한 노자이기에 노자의 가르침은 무위의 다스림, 심지어 무정부 이다.

아! 그러하나 어찌하랴, 무정부상태라는 것은 사람의 삶이 짐승의 삶과 다름이 없으니 그럴 수도 없는 것, 인간 사회가 인간사회이려면 조직이라는 것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최소한의 권력, 최소한의 조직, 최소한의 지혜를 말한다.

그것이 “見素抱樸(견소포박: 소박함을 보고 질박한 것을 품는 것)”이고 “少私寡欲(소사과욕 : 생각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이는 것)”이다.

2017년 4월 16일 175호, 김홍한목사의 이야기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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