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가야할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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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가야할 길
  • 김홍한
  • 승인 2017.04.03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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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한목사의 이야기 신학, 174호

30여 년 전, 내가 신학생시절에 학교 담장 넘어 단독주택에서 자취하는 선배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정문으로 들어오는 것 보다 그 담장 넘기가 쉽고 가까워서 그곳을 자주 이용하였다. 어느 날 그 곳을 넘어 오는 모습을 어느 선생님이 보시고는 말씀하신다. “사람이 길로 다녀야지...” 내가 대꾸하였다. “길이 따로 있나요 사람이 다니면 길이지요.” 하였더니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 하셨다. 졸업하고 몇 년 후 학교에 갔다가 그 선생님을 만났다. “자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나?” “무엇을 말입니까?” “사람이 다니면 그것이 길이라는 생각 말이네” 나는 잊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잊지 않고 있었다. “아닙니다. 그래서는 안 되지요” 하였다.

박경리의 <토지>에서 한복이가 아들 영호에게 하는 말이다.

"남자의 뜻이 멋꼬?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남자의 뜻이란 대로를 걷는 기지 잔재주 부리감서 지름길로 가는 거 아니라 하싰다. 길이 아니믄 가지 마라, 그런 말도 하싰다."

사람의 말이란, 그가 남자이건 여자이건, 학식이 많건 적건, 신분이 높건 낮건 상관이 없다. 그의 생각이 얼마나 진실 되고 성실한가, 삶이 얼마나 참되는가에 따라서 그의 말이 나온다.
성실하고 참된 삶을 사는 이는 대로를 걷는 이다. 이익을 쫓는 삶이 아니라 의를 쫓는 삶이다. 개인의 삶과 말도 그러하거늘 국가가 가야할 길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국가가 가야할 길

맹자가 양나라 혜왕을 만났을 때 한 말이다.

“왕(王)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할까?' 하고 말씀하시면 대부(大夫)들은 '어떻게 하면 내 가문(家門)을 이롭게 할까?' 할 것이고, 서민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을 이롭게 할까?' 하니 이렇게 서로 이익을 취하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 <맹자> 양혜왕 1장 -

공자는 말하기를

“내가 利을 말하는 소리를 싫어하는 것은 나라와 집안을 뒤집기 때문이다.” - <논어> 양화 18장 -

사드 문제 가지고 의견이 분분하다. 그런데 그 찬반의 명분이 천박하다. 무엇이 국익이냐에 초점이 맞추어지기 때문이다. 개인이라도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면 이익을 생각하기 전에 의로움을 생각하는데 국가가 국익을 먼저 계산한다면 불행한 일이다. 맹자 말대로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개인이나 기업은 이익을 생각할 지라도 국가는 그래서는 안 된다. 사드배치가 의로운 일이라면 국익에 관계없이 해야 할 것이고 그것이 의롭지 못한 일이라면 국익에 도움이 된다 할지라도 거부해야 할 것이다. 진지하게 물어보자. “사드 배치가 의로운 일인가?”

생존투쟁

우리가 사드배치를 반대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없다. 매우 자학적인 말로 들릴지 몰라도 우리나라는 자주독립국가라 할 수가 없다. 전시작전지휘권이 없는 나라, 식량의 85%를 수입하는 나라, 에너지의 대부분을 수입하는 나라다. 이렇게 군사주권, 식량주권, 에너지주권이 없는 나라가 어찌 자주독립국일 수 있는가? 친박 집회에 성조기가 등장하는 것은 식민지 국가로서는 매우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이후로 그렇다. 일본의 식민지 였던 우리나라는 그 때 덤으로 넘겨졌다.

먹을 것을 하늘로 알고 살아가는 대다수 일반 서민들에게는 우리의 지배자가 누구냐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가 우리를 좀 더 편안하게 살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귀족들의 경우는 다른 의미에서 같다. 그들은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지 지배자가 누가 되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조선 말, 동학농민전쟁 때, 나라의 틀이 바뀌어 기득권이 통째로 없어지는 것이 두려운 양반들은 남의 나라군대를 끌어들이고 기꺼이 그들의 종이 되는 것을 택했다. 남의 나라에 종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평등한 사회를 거부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어떠한가? 저 귀족들은 나라가 민주화가 되는 것 보다는 부패하고 불의한 권력 밑에서라도 기득권 유지를 택해왔다. 일전에 이런 글을 썼다.

“민주주의는
귀족들과 부르주아지들, 지식인들이 왕에게 권력을 나누어 달라고 하는 것,
민초들은 그런 것 모른다.
민주화투쟁은 언제나 권력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 했다.
민초들은 언제나 생존투쟁을 한다.
권력을 나누어 달라는 민주화 투쟁과 살겠다는 생존투쟁은 많이 다르다.”

민중이 박근혜 정부를 몰아냈다. 민주화 투쟁의 결과가 아니라 생존투쟁의 결과다. 사드배치 반대 투쟁을 한다. 경제적 이유에서가 아니다. 안보적 이유도 아니다. 어쩌면 자주독립국가가 되자는 자존심의 투쟁일 수 있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이유는 생존의 위험을 동물적 감각으로 느끼는 생존투쟁이다. 개인의 생존투쟁이 아니다. 민중의 생존 투쟁이다. 권력자들은 그것을 모르지만 민중은 본능으로 안다. 사드는 매우 위험한 전쟁요소라는 것을.

- 성서 읽기 -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마8:4)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뒤따랐습니다. 그 때 나병환자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하셨습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수많은 군중이 다 보아서 알고 있는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니 무슨 의도이신가? 말이 많으면 진리가 말에 묻혀서 말만 드러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이 많으면 진리가 끊어지고 왜곡됩니다. 서양기독교는 너무 말이 많습니다. 말로 풀지 않고는 못 배깁니다.
이 말씀은 산에서 내려온 직후에 하신 말씀으로 편집되었습니다. 산에서 하신 말씀에 토를 달지 말라는 말씀일 것이고 멋대로 해석하지 말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병 고침 받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강조되면 그보다 더 근본적이고 더 중요한 것이 감추어집니다. 병 고침의 기적이야기가 너무 떠벌여 지면 진짜 중요한 예수의 산상수훈은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지독히도 멸시하고 미워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에 대한 멸시와 미움은 쓸데없이 유전되고 확대되었습니다. 제자들도 사마리아인에 대한 증오가 비이성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맞아들이지 않자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눅9:54) 합니다. 마치 자신들이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만일 핵폭탄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사용할 자세입니다.

반면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에 대해서 매우 관대하게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들을 유대인보다 훨씬 훌륭한 믿음의 소유자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눅10:25-37)와 나병환자 열사람(눅17:11-19)의 이야기는 사마리아인의 행함과 믿음을 극찬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듣는 유대인으로서는 듣기 거북한 정도가 아니라 피가 거꾸로 솟을 악담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단순히 “선의 배품”을 가르치고자 하는 목적이라면 굳이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킬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병환자 열 사람의 이야기가 단순히 “감사”를 가르치고자 하는 이야기였다면 또한 돌아와 감사한 이가 사마리아인 이라는 것을 밝힐 이유가 없습니다. 두 이야기는 사마리아인에 대한 왜곡된 편견을 뒤집고자 하시는 말씀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는 마음 푸근한 미담입니다. 웬만한 교회에서는 성탄절이나 부활절 때 연극으로 다루었을 본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 본문이 푸근한 미담일까요? 우리나라의 분단현실과 비교해 보면 그 의미가 확실해 집니다. 반공이데올로기에 푹 절어있어서 “북한 공산당(사마리아 사람)” 하면 무조건 치를 떠는 현실에서 강도만나 거의 죽게 된 자를 목사가 모른 척 하고 장로가 모른 척 했는데 북에서 온 빨갱이(사마리아 사람)가 구해주었다는 비유의 말씀이 과연 마음 푸근한 미담일 수 있는가 말입니다.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유대인의 정서가 북에 대한 우리의 극우 세력들의 정서와 비슷했을 터인데 어떻게 푸근한 미담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 말씀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본다면 명백한 국가보안법 위반입니다. 듣는 유대인들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악의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를 따르려면(마8:18-22)

먼저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는 제자의 청을 불허하고 즉각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은 참으로 당혹스럽습니다. 아버지가 지금 죽었는지, 어제 죽었는지, 죽을 날이 임박했는지 따져보기도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골자는 ‘진리를 따를 것이냐? 세상을 따를 것이냐?’는 극단적인 선택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 없이 무엇을 선택해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떻게 갈 것인가?, 누구를 만날 것인가? TV 앞에 앉아서도 채널을 선택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장례는 세상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포기 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진리를 따름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석가는 진리를 찾기 위해 부모와 처자식을 버렸습니다. 예수께서도 어머니와 형제들과 고향을 버렸습니다. 진리를 따르는 이는 자상한 아버지일 수 없고 유능한 남편 일수 없으며 효자도 될 수 없습니다. 육신의 부모에 대한 효자도 – 그것 때문에 - 아내로부터 구박을 피할 수 없는데 하물며 진리(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효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돼지경제 (마8:28-34, 막5:1-20)

가다라지방에서 예수께서는 마귀 들린 자를 만났습니다. 너무나 사납고 숫자도 많은 군대마귀 입니다. 지극히 사납고 군대가 강한 강대국 로마의 상징입니다.

“로마”라는 군대마귀 들린 불쌍한 영혼은 유대인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민중들입니다. 로마는 그들을 짓누르고 앉아 부요한 유대인들과 결탁하여 부와 탐욕의 상징인 돼지를 기릅니다. 그곳에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군대마귀는 수많은 돼지들을 볼모로 예수를 협박합니다. 돼지를 다 죽여 버림으로 경제를 마비시키겠다는 협박입니다. - 성경은 마귀가 돼지 떼 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고 하나 간청이라기보다는 협박입니다. 자기를 쫓아내면 돼지 떼를 다 죽여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협박은 예수께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돼지 떼(경제) 에게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습니다. 마귀는 협박한 대로 돼지 떼를 몰사시켰고 그러한 마귀의 행위는 유효했습니다. 마귀의 의도대로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큰 경제적 손실을 입은 읍내 사람들이 예수께 나와서 저희 고장을 떠나 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오늘날 “경제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말들을 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어찌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경제로서의 돼지는 부자들을 위한 경제입니다. 재벌경제입니다. 당시의 돼지는 서민을 잡아먹는 짐승입니다. 돼지는 풀을 먹지 않습니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는 가난한 자들의 양식입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 여러 명의 양식으로 한 마리 돼지를 키웁니다. 민중의 고혈을 빨아서 키운 재벌경제입니다. 경제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재벌경제가 망해야 민중이 삽니다.

容恕(용서)

죄사하는 권한이 사람에게 있을까?
내가 누구의 죄를 용서한다면 용서되는 것일까?
사람은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용서한다 한들 그것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을까? 하나님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공짜로 죄용서 하는 것은 하나님도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누군가의 죄를 용서하시려면 당신께서 대신 죄 값을 치르셔야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앙고백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용서라는 것은 대부분 보복할 힘이 없어서 체념하는 것이요 보복할 가치가 없어서 포기하는 것이요 보복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서 중단하는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죄를 묻지 않겠다”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겠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중풍병자의 죄 값을 당신께서 대신 치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 한다”는 말은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끼를 버려라, 육신을 버려라(마9:18-26)

회당장이 제 새끼를 살리기 위해서 자존심도 버렸습니다. 그러나 칭찬할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흉악한 강도도 제 새끼를 위해서는 그리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살리는 이도 하나님이요 죽이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병신으로 나게 하는 이도 하나님이요 바보로 나게 하는 이도 하나님입니다. 사람은 그저 받을 뿐입니다. 모든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내 몸에서 나온 새끼라 하더라도 내 새끼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키우십니다. 육신의 부모가 버린다고 자녀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에게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에게 연연하는 것은 하나님이 참 부모임을 모르는 이들이 하는 짓입니다.
자식은 족쇄요 가정은 감옥입니다. 자식은 안 나는 것이 좋고 가정은 처음부터 가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왕 낳았으면 거기에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에 맡겨야 옳습니다. 바울선생의 가르침이고 예수님의 삶입니다.

병 낫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데 병 낫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하는 것이 진리인가요? 오히려 삶의 고통이 연장되고 반복되니 더 불행한 것 아닌가요? 진리를 사는 이들은 병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병은 하나님을 찾게 하니 감사해야 할 것이고 죽음은 고난의 끝이니 반가워해야 할 것입니다. 병 낫고, 다시 살아나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불행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가장 큰 고통은 죽고, 다시 태어나고 또 죽고 다시 태어나는 윤회입니다. 이 고통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인 해탈입니다.
예수의 행적 가운데 병고치고, 죽은 자 살려내고, 기적을 행하고 하는 것에 관심의 초점을 둔다면 헛짚은 것입니다. 그것은 연막전술입니다. 구원받아서는 안 될 놈들의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한 연기입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자 하는 년, 놈들은 그것을 복음으로 알고 그것만 바라봅니다.

- 노자 읽기 -
18장.
大道廢(대도폐) : 대도가 없어지면
有仁義(유인의) : 인의가 나서고
慧智出(혜지출) : 지혜가 나오면
有大僞(유대위) : 큰 거짓이 나온다.
六親不和(륙친불화) : 가족이 불화하면
有孝慈(유효자) : 효니 자니 하는 것이 나서고
國家昏亂(국가혼란) : 국가가 혼란하면
有忠臣(유충신) : 충신이 생겨난다

인간은 믿을 수 있는 존재일까?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면 인간은 믿을 수 있는 존재다. 반면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면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의 본성을 선하고 생각할 때 윤리가 발달한다.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제어하는 법이 발달한다.
인간을 선하다 악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 인간은 어찌 보면 한없이 선하고 어찌 보면 한없이 악하다. 그리고 선악의 절대 기준은 없다. 선악을 구별하는 기준이라는 것이 시대에 따라 다르고 상황에 따라 다르고 판단하는 이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는 선악이 없다. 있는 그대로가 자연이다. 그러니 인의도 없다. 윤리도 없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되 자연을 벗어난 존재다. 성경에서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고 눈이 밝아졌다는 것이 그것이다. 선악을 구별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자연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벗어났다는 것은 아니다. 육신은 여전히 식색에 연연하고 생노병사를 벗어날 수 없다.

노자가 말하는 大道는 자연의 법도이다. 仁義는 인간의 법도이다. 대도가 없어짐으로 인의가 나왔다기 보다는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이다.
지혜가 나옴으로 큰 거짓이 나온다고 했다. 옷을 만들어 입음이 지혜다. 옷을 만들어 입음으로 부끄러운 곳을 가렸다. 그런데 부끄러운 곳이 정말 부끄러운 곳일까? 너무 당연한 것을 부끄럽다고 하니 일면 거짓이다. 가장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가림으로 관심은 더욱 증폭되고 집착은 더욱 증폭된다.
가족이 불화하면 효니 자니 하는 것이 나온다고 했다. 자연상태에서의 가족은 결국 불화할 수 밖에 없다. 아기에게는 어느 누구도 적대감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아기가 성장하여 자의식이 생기고 힘이 생기면서 갈등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아기의 힘이 어른과 동등하게 되면 독립하게 된다. 독립하면 생존경쟁의 상대가 된다. 육신이 점점 쇠퇴하여 가는 아비와 육신이 점점 강해져 가는 자식의 관계에서 결과는 뻔하다. 이것이 프로이드가 말하는 부친살해다. 아주 오랫동안 그러한 일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그것이 아름답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그래서 효니 자니 하는 것이 생겼다.

노자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모든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면이 없지 않다. 이른바 문명비판이다. 노자의 말을 극단으로 끌고 가면 인간은 원시시대를 살아야 한다. 노자가 말하는 것은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노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일까? 소위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의라는 것이, 충효라는 것이, 지혜라는 것이 정말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냐는 것을 점검해 보자는 것이다. 오히려 인의가 사람을 억압하고 충이라는 것이 백성을 억압하는 것이고 효라는 것이 인간성을 말살하는 것이 아닌지, 지혜라는 것이 오히려 큰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엄밀히 생각해 보면 정말 그러한 것이 적지 않다. 경직된 윤리가 얼마나 사람을 억압하고 사람답지 못하게 했는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그러면서도 그 윤리체계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민중을 위한 충이 아닌 국가나 군주, 조직을 위한 충이 얼마나 큰 재난을 일으켰는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효도 한다는 것이 이제 편안한 죽음을 맞이해야 할 부모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하면서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고통을 연장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대기업 상품 보다는 중소기업 상품을 이용합시다.
대형유통회사 보다는 동네 가게를 이용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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