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산책 117.
간단한 도시락을 챙겨 집을 나섰다. 봄길을 걷는다. 봉우리산 바로 정상아래 두 구의 무덤이 있다. 햇빛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이다. 작년 까지만 해도 이따금 어떤 노인이 무덤에 와서 오래 머물고 가곤 했었는데 요즘은 통 나타나지 않는다. 그 노인의 안부가 궁금하다.

나는 이 무덤 앞을 지날 때마다 가끔 ‘죽음’에서 대해서 생각하곤 한다. 나는 언젠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살았던 크레타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에게 해의 감청색 물빛, 석양에 비친 바다를 보고 싶다. 거기에서 서서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붉은 포도주 한 잔을 마셨으면 상상했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성루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이 있는데, 묘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나는 아무 것도 원치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
그래 나도 그렇다. 아무 것도 원하는 것도, 두려운 것도, 걸리적 거릴 것도 없다. 자유다. 자유인이다. 만약 내가 죽은 다음 울 아이들이 내 무덤에 작은 비석 하나 세운다면 거기에 ‘자유인 박철’ 그렇게 새겨달라고 하고 싶다. 2017.3.17
아침산책 121.
나는 오늘도 걷기에 몰두한다. 몰두한다는 표현보다 걷기에 내 몸을 맡긴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몸을 이용한 운동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걷기이다. 이 단순한 동작이 그토록 다양한 즐거움을 준다. 걷기는 시간과 공간을 새로운 환희로 바꿔 놓는 고즈넉한 방법이다.

그것은 오직 순간의 떨림 속에만 있는 내면의 광맥에 닿음으로써 잠정적으로 자신의 전 재산을 포기하는 행위이다. 걷기는 어떤 정신 상태, 세계 앞에서의 행복한 겸손, 현대의 기술과 이동 수단들에 대한 무관심, 사물에 대한 상대성의 감각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근본적인 것에 대한 관심, 서두르지 않고 시간을 즐기는 센스를 새롭게 해 준다.
걷기를 즐긴 사람들 중에는 날마다 월든 호숫가를 걸어 다닌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젊은 시절의 장 자크 루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의 저자 피에르 상소, 방랑을 즐긴 시인 랭보, 걸어서 일본 각지를 여행하며 많은 시와 기행문을 남긴 하이쿠 시인 바쇼 등이 있다. 이들은 여행을 즐겼으며, 걷는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사랑했다.
나도 시공을 넘어 이들과 함께 걷고 싶다. 오늘도 나는 길 위에 있다. 2017.3.27
아침산책 122.
오늘은 배낭을 꾸려 해운대 쪽으로 진출했다. 아침9시에 출발해서 오후 2시쯤 집에 돌아올 예정이다. 지금 수영강변을 걷는다. 도심지 빌딩 숲 사이 이런 아름다운 강물이 흐른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걷기와 침묵은 나를 구원해 주었다. 걷기와 침묵은 속도를 늦추어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해주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바라보고 나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기회를 준다. 침묵은 단순히 내가 입을 다물 때 생기는 말의 부재가 아니라 침묵은 총체적이면서 독립적인 현상으로, 외적인 요소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 나는 침묵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한다.
길을 걸을 때 우리는 자신과 대면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우리가 편을 갈라 싸울 필요가 없고, 국가의 적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과 말다툼을 벌일 필요도 없음을 깨닫는다.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좁은 행성에서 이 귀중한 시간을 평화롭게 살아갈 기회가 아직 열려 있다. 걷기만 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봄 햇살도 강물도 바람도 걷기에 딱 좋은 날씨이다. 물만 조금 맑으면 금상첨화겠다. 2017.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