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역사를 종식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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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역사를 종식시키자
  • 김홍한
  • 승인 2017.03.16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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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한목사의 이야기 신학 173호

민중의 어리석음

민중은 뜻이 없다. 자신들의 이기심에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군중심리만이 있다. 여론이라는 것도 없다. 여론은 권력자들이 필요에 따라 만드는 것이고 조작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도자가 참으로 중요하다. 많은 경우 지도자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백성이 될 수도 있고 사회전체가 광기에 휩싸일 수도 있다. 합리적 철학이 발달했던 독일이 히틀러 치하에서 얼마나 황당한 광기에 열광했던가?


“민중은 어리석습니다. 민중은 일차원적 사고를 합니다. 민중은 간사하고 잔인합니다. 민중은 어리석기에 권력자들은 항상 민심을 조작합니다. 예수의 죽음을 보십시오. 종교지도자들의 선전선동에 의하여 민중들은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칩니다.

민중들은 지도자의 작은 배려에 감격하여 순종하고 눈물 흘리며 감사합니다. 권력의 공백이 생기면 그 틈을 비집고 폭동을 일으킵니다. 그나마 폭동의 지도자가 없으면 즉각 약탈과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릅니다. 민중 자신들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력한 권력자를 원하고 거기에 순종합니다. 오죽했으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수행한 레닌도 “소수의 정치엘리트가 필요하다”고 했겠습니까?

오늘날 민중들은 많이 성숙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은 의(義)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이(利)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것도 공익(公益)이 아닌 자신의 사익(私益)입니다.

올바른 지도자는 민중의 뜻을 따르는 자가 아닙니다. 무엇이 진정 민중에게 도움이 되는가를 생각하고 수행하는 자입니다. 옳은 일이라면 대다수 민중이 반대해도 극복해야 하는 것이고 설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민중을 설득할 수 있는 자가 유능한 지도자입니다.

민중을 두려워하는 지도자는 옳은 지도자가 아닙니다. 민중에게 존경을 받고자 하는 지도자도 옳은 지도자가 아닙니다. 민중의 생사를 짊어졌기에 그것이 두려운 것이고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이 두려운 것입니다.
‘민심은 천심’이라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민중을 향해 있다는 의미에서만 옳습니다.”

- 김홍한저, <꿈꾸는 하나님나라>, 한울, 2007. 281-282쪽.-

민중의 나약함

일제 강점기, 친일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소위 글 잘하고 문벌 좋고 돈 많은 이들이나 할 수 있는 것, 무지한 민중은 친일의 기회마저 없었다.
오늘날에도 다르지 않다. 부패한 권력에 부역할 수 있는 이들도 소위 지식인들이요 돈 있는 이들이다. 일반 가난한 민중들은 권력의 주변에 얼씬하지도 못한다. 기껏해야 돈 몇 푼에 동원되는 것을 특권으로 안다. 돈 몇 푼에 영혼까지 빼앗긴다.

민중의 깨어남

위의 글처럼 민중이 나약하기만 하고 어리석기만 하다면 인간 세상에는 소망이 없다. 인간세상의 질서는 인간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또 다른 면에서 많이 달라졌다. 민중들이 성숙해진 것이다. 민중들이 몇 푼 안 되는 이익에 팔리던 자신을 떨치고 사람다움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돈 몇 푼에 동원되는 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민중이 그것을 거부한다. “민중의 성숙”, 누가 민중을 성숙시켰는가? 누가 성숙시키는 것이 아니라 민중은 스스로가 큰다. 오히려 오늘날에는 민중이 지도자를 키운다.

啐啄同機(줄탁동기)라는 말이 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껍질 안쪽을 쪼는 것을 “줄”이라 하고 그 때 어미닭이 밖에서 그 소리를 듣고 쪼아 주는 것을 “탁”이라는 한다. 제자가 깨우치고자 안간힘을 쓰고 그것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선생님이 돕는 것이 줄탁이다. 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부화장에서 병아리들이 알을 깨고 나오는 장면을 보면 줄탁동기 라는 말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수천, 수만 마리의 병아리들이 거의 동시에 어미의 도움 없이 저 홀로 알을 깨고 나온다. 너무나 감동적이고 장엄한 장면이다. “줄탁동기”라는 말이 매우 의미 있는 말일지는 몰라도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어리석은 선입견이고 그럴듯한 감상일 뿐이다.

병아리는 어미의 도움 없이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온다. 스승이 제자를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스스로 깨우친다. 지도자가 민중을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은 스스로 깨우치고 스스로 자라난다. 역사의 현장에 뛰쳐나온 민중은 누구의 가르침과 선동과 사주로 나온 이들이 아니라 스스로 나왔다. 깨어난 민중이 세상을 바꾼다. 권력자들은 깨어난 민중을 두려워한다. 세상에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이 없다. “깨어난 민중” 그것을 거부하면 혁명이 일어난다. 깨어난 민중에 부응하는 권력자가 지도자다.

폭력의 역사를 종식시키자

민중은 언제나 권력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해왔다. 혹 정말 민중 편에 서고자 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럴 때는 어김없이 권력층 내부에서 제거 당했다. 한때 공산주의자들이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겠다고 했으나 오히려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관료사회를 만들고 거기에 민중들은 질식당하고 있다.

2017년 대한민국의 민중들은 불의한 권력을 몰아냈다. 그리고 앞으로 민중이 세울 새로운 권력이 등장할 것이다. 그들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민중의 등에 칼을 꽂을까? 십중팔구는 그럴 것이다. 혹 정말 그들이 민중을 위한 정치를 하고자 한다면 역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또 다른 권력이 그들을 제거하고자 할 것이다.

아! 거듭거듭 민중의 등에 칼을 꽂아온 폭력의 역사를 종식시켜야함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이다. 반만년을 억압과 착취 속에서 살아왔다. 뿌리 깊은 사대주의에 굴복하며 살아왔다. 제 스스로 “열등한 민족성을 지닌 조선인이니 당장 독립하는 것은 시기상조요, 민족성부터 개조해야 독립할 수 있다.”고 했다. “3.1운동은 무지몽매한 야만인종이 지각없이 따라서 한 것” 이라 했다. 이렇게 스스로를 비하했던 우리다. 해방되자 극심한 대립 속에 민족상잔의 처절한 상처가 심장에까지 박혔다. 그 상처가 문득문득 덧나서 목을 조른다. 이렇게 처절한 반역의 역사를 살아 왔기에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그렇게 살아왔기에 오히려 그것을 거부할 자격이 있는 것 아닌가? 폭력과 반역의 역사를 청산하자. 우리만의 과제가 아니다. 온 인류의 과제를 우리 손으로 풀어보자.

-성서 읽기-
주님이 주신 기도문(마6:5-15)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 일방적으로 자신의 소원을 말하는 기복적인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공염불입니다.

기도에는 일정한 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근심과 걱정도 기도요 원망도 기도이며 감사도 기도입니다. 무엇이든 하나님 앞에 간절하고 진실하면 그것이 기도입니다.

진실하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나 같은 소인배는 간절한 기도는 해 보았어도 진실한 기도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기도다운 기도는 해 본적이 없습니다. 나와 같이 기도를 할 수 없는 소인배들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기도문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문을 암송하는 것도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뜻을 곱씹지 않고 녹음기처럼 암송하면 의미 없는 일입니다. 이 기도문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곱씹어 보면 이 기도문을 암송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뻔뻔함을 깨닫고 암송을 중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기도문은 “이렇게 기도하라”는 기도의 모범이기 보다는 헛된 기도를 하지 말라고 내 입에 물린 재갈입니다.

하루살이(마6:25-34)

재물을 하늘에 쌓으랍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합니다.
내일일은 내일 걱정하라 합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이 자식 낳고 교육시켜야 하고 살림해야 하는 생활인들에게는 이 말씀이 뜬구름 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산다면 처자식에게는 무책임한 것이요 주변사람들에게는 짐이 됩니다. 우리가 하루살이라면 모를까 어떻게 내일이 있는 사람이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더러 하루살이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한번 죽었다가 다시 살 때 한살을 먹습니다. 1년에 1살 먹는 나이는 사람의 나이가 아니라 나무의 나이입니다. 겨울이 되어 잎을 다 떨고 꼭 죽은 것 같이 되었다가 이듬해 봄에 다시 잎을 피우는 나무는 1년에 한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납니다. 그러나 사람은 매일저녁 죽은 것 같이 잠을 자고 아침에 다시 살아납니다. 하루에 한 번씩 죽고 다시 살아나니 하루에 한살 먹는 것입니다.

오늘 밤이면 죽을 인생이 내일을 걱정하랴? 오늘밤 죽을 인생이니 펑퍼짐하게 퍼짐이 아닙니다. 하루를 사는 인생이 되면 그의 삶에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룰 수 없는 긴박함이 있습니다. 오늘의 삶은 오늘로서 죽으니 결산을 해야 합니다. 오늘 할 일 다 했으면 오늘밤이 천국입니다.

비판과 비난(마7:1-5)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는 말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참으로 난처한 일입니다. 기독교인은 세상에서 판사나 검사의 직책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요 불의한 권력을 보고도 입을 열지 못할 것이고 아랫사람에게 충고의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며 목사가 성도들의 잘못도 책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 정도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눈의 티는 옷에 묻은 겨가 아닙니다. 비록 내 눈에 들보가 들었다 하더라도 남의 눈에 티는 마땅히 빼 주어야 합니다. 그가 눈의 티로 말미암아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암 병으로 죽어가는 의사가 그의 병이 훨씬 중함에도 불구하고 가벼운 감기 환자를 치료해 줄 수 있는 것이고 도적질을 일삼는 아비일수록 제 자식의 비행을 더욱 호되게 훈계하는 법입니다. 의사의 치료행위와 도적아비의 훈계가 가능한 것은 그들의 치료와 훈계가 사랑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비판과 비난은 그것이 아무리 작을 지라도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사랑하는 이 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 가치관

믿음은 과연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도깨비 방망이인가?
정말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가능한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저 산을 바다에 빠뜨릴 수 있단 말인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다 되는 것인가?
말씀은 이러하지만 우리는 말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습니다. 너무도 분명한 사실을 예수께서는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시고 계십니다.

가치관이 다르고 사고구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나라 가치관과 영원이라는 시간관을 가지시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들은 세상이라는 공간과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서 그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구하라 받을 것이다”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늘나라를 주시겠다는 것이고 이미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더 바랄 것도 없습니다. 이미 완전합니다. 안 되는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내 안에 드러나는데 안 되는 일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과 일치되는 상태를 만들어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는 비록 세상 속에 살지만 어렴풋이나마 하늘나라의 가치관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황당한 말씀을 거짓이라 외면하지 않고 희망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개와 돼지(마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 서서 너희를 물어 뜯을지도 모른다.”(마7:6)
오직 먹고 마시고 번식하는 것에만 관심 있는 이들 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돼지에게 던져진 진주와 같습니다. 小人들은 들을 귀가 없기에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공자는 “충고해서 잘 이끌어 주되 듣지 않으면 그만 둘 수밖에 없다”고 하였고 장자는 “항상 무엇엔가 혹해 있는 사람은 평생을 가도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여전히 돼지들에게 진주를 던지십니다. 길바닥과 같고 자갈밭과 같은 영혼들에게도 복음의 씨를 뿌리십니다.
소인들은 진리의 소리를 들으면 비웃습니다. 소인들이 비웃지 않으면 오히려 진리가 아닙니다. 비웃기만 하면 다행입니다. 돌아서서 물어뜯습니다. “복 받으라”는 소리에는 “아멘, 할렐루야”를 연호하면서 환장하고 달려들다가 진리의 말씀을 던지니 “참으로 어려운 말이다.”하면서 돌아서든지 “이단이다” “좌경이다” “용공이다” 크게 화를 내며 공격합니다.

좁은 문(마7:12-14)

구원에 이르는 길이 좁고 험할 리 없습니다. 누구나 갈 수 있고 대다수가 갈 수 있는 길입니다. 한때는 구원의 길이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길로 여겨졌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하고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야 했으며 금식하며 고행해야 했습니다. 일체의 소유를 버리고 오로지 진리를 향하여 비상해야 했습니다. 참으로 극소수의 사람만이 구원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문이 넓어졌습니다. 누구나 갈 수 있고 누구나 가야합니다. 그런데 그 문이 좁고 험한 길이라니요. 그것은 이 말씀 때문입니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7:12)
모두 다 섬김을 받고자 하고 모두 다 높임을 받고자 하고 출세하여 세도부리고자 하는 때에 섬기는 자로 사는 이가 극히 적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천박한 자본주의 가치관이 판치는 시대에 가치관을 달리하는 소수로 살라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한다고 하면서 다수결로 밀어붙이는 시대에 양심적 소수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좁은 문입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마7:15-20)

나는 한때 신흥종교 연구에 관심이 있었으나 금세 그 관심을 접었습니다. 대부분의 신흥종교들은 종교의 깊이가 없는 사회현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대하여는 깊이 생각할 것 없이 드러난 대로, 보이는 대로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족합니다. 거짓 예언자들 역시 그러하니 그들의 악한 결과가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면 족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참으로 불쌍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남을 속이기 전에 이미 자기 자신이 속고 있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제 자신이 ‘참 예언자’ 혹 ‘메시야’라고 스스로 믿고 있는 심각한 정신병적 상태에 있는 이들입니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속고 있으니 남들도 속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신적 존재로 믿고 있다가 그것이 아님이 드러날 때는 남보다도 제 스스로가 더욱 충격에 빠져서 파멸하고 맙니다.

간혹 이단과 사이비 연구에 열을 올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역시 걱정되는 이들입니다. 이단을 연구한다 하면서 자신의 이단성을 감추려는 얄팍한 수가 들어 있습니다. 이단, 사이비를 연구한다 하는 이들 중에 존경할만한 인물을 보기 어렵습니다.

구원의 긴장감(마7:21)

칼뱅의 예정설에 의하면, 사람은 자신이 구원의 대상인지 아닌지 알지 못하지만 구원 받으리라는 자기 확신을 갖고 열심히 살아갈 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확신을 갖는 방법은 절제와 금욕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고 근검절약하며 방종타락하지 않는 생활이야말로 유일한 자기 확신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너무나도 당연히 구원의 확신을 갖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강요당합니다. 자신이 구원받았음에 조금의 의심이라도 있으면 그 의심함으로 구원받지 못할 것처럼 말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구원의 자기 확신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나는 분명히 말한다.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 한다’ 고 말할 것이다.”(마7:21-23)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뻔뻔함입니다. 강요된 구원의 확신은 모래성과 같습니다. 제 스스로의 깊은 영혼의 밑바닥에서 늘 불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라리 구원에 대한 긴장과 불안 속에서 사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것이 깨어있는 신앙일 것입니다. 순간순간 자신의 신앙을 반성하면서 산제사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나 혼자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돌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나의 헌신과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천국을 만들어 갑니다.

- 노자 읽기 -
17장.

太上不知有之(태상부지유지) : 훌륭한 지도자는 없듯이 있는이
其次親而譽之(기차친이예지) : 그 다음은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으로부터 칭송을 받는이.
其次畏之(기차외지) : 그 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이
其次侮之(기차모지) : 그 다음은 백성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이
信不足焉(신불족언) : 신뢰가 부족하면
有不信焉(유불신언) : 불신이다
悠兮其貴言(유혜기귀언) : (훌륭한 지도자는) 삼가 말을 아낀다.
功成事遂(공성사수) : 공을 이루고 일을 마무리하되
百姓皆謂我自然(백성개위아자연) : 사람들은 저절로 된 것이라 한다.

부모는 자식에게 먹여주고 입혀주고 가르쳐주는 것을 자랑하지 않는다. 은혜를 잊지 말라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당연히 할 일을 하면서 어찌 자랑할 것인가?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 여긴다. 어떤 자녀는 부모님의 은혜를 고마워하고 감사한다. 기특한 일이나 자연스럽지 못하다.

지도자는 백성의 어버이, 있는 듯 없는 듯 백성을 보살필 일이지 칭송받고자 하는 것은 거짓된 모습이다. 엄히 하여 백성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은 어진 어버이가 아니다.

존경을 받고자 하는 지도자는 필히 위선하고 무리하여 십중팔구는 조롱을 받는다.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지도자는 큰 공적을 이루고자 백성들에게 엄격하고 백성들을 가혹하게 몰아간다.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한다.

백성들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끔찍이 사랑하는 지도자는 백성들이 가까이 하고 칭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지도자인지는 알 수 없다.

사랑하되 사랑을 감추어야 한다. 사랑은 치우치기 마련이니 판단을 흐리게 하여 大道(대도)를 펼 수 없다.

대기업 상품 보다는 중소기업 상품을 이용합시다.
대형유통회사 보다는 동네 가게를 이용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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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유성구 원내로 39번길 59 <새교회> 우)34227
☎ 010-3243-2665 E-mail: khhyh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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