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새역사를 여는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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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새역사를 여는 청년
  • 김경호
  • 승인 2017.03.13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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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향린교회 청년주일 설교(히브리서 11:1-6)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바탕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2. 실상 옛 조상들은 믿음이 있었기에 좋은 증언을 받았습니다.
3.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 곧 보이는 것은 나타나 있는 것에서 생기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훌륭한 제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런 제물을 바침으로 말미암아 그는 의인이라는 증언을 받았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을 두고 증언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는 죽었지만, 그 믿음을 매개로 해서, 아직도 말하고 있습니다.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로 옮겨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옮겨 가셨으므로, 우리는 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옮겨 가기 전에,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다는 증언을 받은 것입니다.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새역사를 열었다. 촛불혁명은 위대했다. 세계 역사에 없는 새로운 형태의 시민혁명, 명예혁명의 길을 내었다. 이는 위대한 민중의 시대, 국민주권의 새시대를 연 것이다. 이번 촛불의 결과가 단지 박근혜의 퇴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박근혜의 탄핵으로 촛불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우리가 꿈꾸던 것들을 이루어 가야할 시작이다. 촛불교회가 탄생한 것도 광우병 촛불이 끝난 직후이다. 광장의 촛불을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촛불교회가 시작되었다.

이번 촛불의 중요한 의미는 국민주권의 시대를 펼친 것이다. 그러기에 정치권 전체가 그 의미를 잘 되새겨 살려나가지 못한다면 박근혜 탄핵을 외쳤던 민심은 정치권 전체의 탄핵으로 번질 것이다. 정치권이 예전과 같은 자세로 국민을 대하다간 큰 코 다칠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20번의 시민학교를 거친 민중은 이제 옛날의 민중이 아니다. 정치권이 촛불로 한층 고양된 민심에 대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바로 정치권 전체에 대한 탄핵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명박근혜 시간에 부역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믿고 맡겨 놓았던 국회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언제나 저희들끼리의 정치를 했고 이것은 민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에 대한 심판으로 국민들이 직접 광장으로 나오고 정치의 주도권을 행사한 것이 이번 촛불의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정치인들이 이번 촛불의 결과를 자기들만의 잔치로 삼거나 국민들이 만든 결과를 나누어 먹는 데만 골몰한다면 금방 민심이 이를 심판할 것이다. 정치인들은 머리를 한껏 낮추고 촛불의 민심이 무엇인가를 예민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

국민의 80%가 특검 연장을 원했건만 김진태를 핑계로 거대정당들이 숨어버렸다. 4개 야당이 뜻을 정했는데 정세균은 권성동을, 권성동은 김진태를 방패막이로 숨었다. 황교안 탄핵에 대해서는 3개 야당이 뜻을 모았는데 아예 추진 의사가 없었다. 처음부터 이야기를 하지 말든가 민심에 떠밀려 임시방편으로 기자회견을 해놓고 돌아서자 바로 잊어버렸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민심을 배반한다면 심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민주당이 잘해서 50% 이상이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하도 엉터리라서 그런 것이지.

여당의원 중에는 TV토론 등에 나와서 “당신은 대의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냐?”며 마치 상대가 내란이라도 선동한 듯이 몰아세우기도 한다. 어디서 배워먹은 민주주의인지 모르겠으나 대의민주주의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 민주주의가 목적이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효율적으로 하기위한 방편으로 대의제를 채택하는 것이다. 대의민주주의를 궁극의 목적처럼 내 놓는 말은 ‘모든 국민은 국회의원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대놓고 말하는 셈이다. 국민이 주권자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번 촛불이 위대한 것은 국민주권의 시대를 열고 국민이 주권자임을 확인한 것이다.

이번에 탄핵을 하면서도 우리는 얼마나 불필요하게 마음을 졸였는가? 국회가 탄핵을 가결하기 전날 억수같이 비는 내리는데, 그 비를 다 맞고 시민들이 여의도로 몰려가 탄핵을 외쳤다. 이튿날은 국회의사당을 에워싸고 초조하게 탄핵 결과를 기다렸다. 234표로 탄핵이 가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 여의도가 떠들썩하게 환호했다. 이번 헌재의 발표도 마치 자신이 치른 입시발표를 기다리듯이 정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국민적 상식으로 당연한 것이지만 헌재 재판관 하나하나의 성향을 분석해 가며 그 상식에 반한 판결이 나올까봐 마음 졸이는 모습이 속상했다. 아니 왜 국민의 80%가 원하는 일을 8명의 재판관에게 목매어 초조해야하나? 초등학생이라도 다 알만한 죄 몫이 넘치는데도 혹시 비상식적인 판결이 나오지 않을까를 염려해야 하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평생을 법을 다루는 최고의 판사들을 의심할 만큼 우리의 사법제도를 신뢰하는 수준은 엉망이었다.

만약 국민소환제라도 있다면 국민들이 여덟명의 판사들에게 목맬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백만, 삼백만이 모였을 때 서명해서 소환해 버리면 그만인데.... 특검 연장도 서로 폭탄돌리기를 해대며 핑계대는 국회의원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명해서 특검법을 발의하면 그만이다. 주권자인 국민이 오히려 눈치보고 매달려야 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제도인가? 개헌을 한다면 이런 것들을 바로잡는 개헌이어야 한다.

탄핵한 후에 언론과 정당은 일제히 승복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친박들에게 하는 말이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말자체가 기분나쁘다. 주권자인 국민이 누구에게 승복하고 복종한다는 말인가? 왜 국회의원에게, 재판관에게 주인이 머리를 숙여 복종해야 하는가? 우리의 현재 법 자체가 주인을 소외시키고 주권의 대리자인 머슴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도록 강요하는 법체계로 되어 있으니 국민은 개 돼지라는 말이 위정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비 민주적인 요소들이 이번 촛불 혁명으로 거두어 지길, 그리고 법과 원칙들이 최고의 주인을 주인의 자리로 돌릴 수 있게되길 바란다.

지난 주간에 우리 교회는 슬픈 일을 당했다. 민가협 상임의장을 지내신 서경순 권사님께서 소천하셨다. 나흘만 더 계셨으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 기쁜 소식을 들으셨을 텐데 아쉽다. 그러나 마치 모세가 가나안 땅 목전에서 그 나라를 바라보면서 생을 마감한 것 같이 모든 고난과 투쟁, 힘든 일은 권사님께서 짊어지시고 우리에게 온전히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시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 서 권사님께서 아마 닭 잡으러 빨리 가신 것 같은데..... 오늘 가족들이 교우들에게 고마운 마음의 인사로 닭을 잡아서 도리탕을 해오셨다. 평소에 권사님께서 교우들을 대접하셨던 것을 대신해서 만찬이니 서경순 권사님의 마지막 만찬에 참여하시길 바란다.

권사님은 가냘프지만 그 조그만 체구에서 나오는 강단은 구척거구의 경찰, 국정원 간부들도 벌벌 떨게했다. 백골단이 짓밟아서 갈빗대가 두 대씩이나 부러졌는데도 파스 한 장 붙이고 다시 경찰서로 뛰어들어가 항의하셨다. 올해 초에 권사님을 심방한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시는 분이 나를 광화문에 데려다 달라고 하시기도 했다. 불의에 저항하는 권사님의 정신을 우리가 새겨야 한다.

탄핵 후에 언론이 한결같이 통합을 말한다. 통합이란 것은 참 좋다. 통합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혼돈하지 말아야 한다. 통합이 지금 있는 것들을 썪어서 짬뽕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것저것 다 받아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것은 통합이라고 할 수 없다. 통합이라는 말을 쓸 때는 가는 방향이 분명하고, 목표와 지향이 명확하게 서있는 것을 전제한다.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망설이는 이는 다독이고 딴지거는 사람들은 설득해서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으로 가는 것이 통합이다. 방향 자체가 다르고 도저히 민주시민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다 받아들여 본래의 방향을 상실한 것은 그냥 혼동이고 혼란이지 통합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김종인 씨가 탈당을 해서 사람들을 끌어 모아 빅 텐트를 세우려는가 보다. 그런데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민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촛불 현장에 한번이라도 나왔다면 이런 어처구니 없는 꼼수로 장난질 하지는 않을텐데.... 자신이 정치 구단이라면 20번의 학교를 거친 촛불민심은 정치 10단이 되어있는 것을 모르나 보다. 지금 당장 개헌하자는 사람들의 이유는 뻔하다.

첫째, 퇴출 대상이 나누어 먹자고 하는 것이다.

둘째, 이미 국민에게 심판을 받은 자들이 이합집산의 명분을 세우는 것이다.

셋째, 이들은 국민주권을 주장하는 촛불민심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지금 국민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넘어서 국민주권을 말하고 있는데 한참 철지난 소리를 해대고 있다. 이들은 오직 총리를 국회에서 세우자는 것만 주장한다. 그것은 장관을 비롯한 정부 부처를 각 정당의 의석수 비율로 나누어 먹자는 것이다. 밥 줄 사람은 생각도 않하는데 국물부터 마시니 불쌍하기도 하다.

넷째, 선거를 연기하자거나 졸속 개헌을 하자는 꼼수 아닌지 의심된다.
대선전에 개헌을 하자는 극단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무슨 저의인가? 국민투표등의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혹시 법을 위반하고 대선의 연기를 바라거나 자기들이 필요한 것 하나만 가지고 졸속 개헌을 하자는 것은 아니가? 개, 돼지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정말 국민을 개, 돼지로 보는가?

다섯째, 이번 정부를 과도기 임시정부로 보자는 꼼수이다.

이번 선거는 어차피 자기들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새로 구성되는 정부를 과도기 정부로 여겨 넘기고 본 게임은 자기들이 전열을 가다듬어 나오겠다는 꼼수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자기들이 주장하는 개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무조건 개헌을 위해 연대하자고 한다. 어떤 개헌을 하자는 것인지 밝혀야 연대를 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그리고 새로운 정권아래서 개헌을 할 때 분명히 국민의 참여가 이루어져 논의 되어야한다. 국회의 나눠먹기 식의 개헌은 대안이 아니다. 지금 촛불을 든 시민들은 이번에 드러났듯이 도대체 상식도 되지 않는 자들과 권력을 나눌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다. 위대한 국민주권의 시대를 열고, 제왕적 대통령제를 넘어서 양대정당이 독식하도록 되어있는 선거제도를 개선하고, 권력의 의회분점을 넘어 지방분권이 이루어지도록 개헌해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바탕은 무엇인가?
우리가 새 일을 할 때, 돈과 힘을 바탕으로 계획한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바탕은 통장의 잔고나 동원 가능한 힘 같이 손에 잡히는 숫자들에 있지 않다. 우리들이 꿈꾸는 것들의 바탕은 믿음이다. 그것은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빤히 보이는 것을 가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나 다 하는 상식일 뿐이다. 믿음은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그 미래를 확신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청년이 가져야할 기상이다. 그 기상이 새역사를 열어간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훌륭한 제물을 바쳤다.”고 한다. 아벨의 제물이 가인의 제물보다 더 값지고 좋은 물건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믿음이 바로 제물 자체라는 말이다. 그 믿음으로 아벨은 의인이라는 증언을 받았고 그는 죽었지만 믿음을 매개로 해서 아직도 말하고 있다(히 11:4).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히 11:6). 어떤 어떤 조건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믿음 없음이 문제이다. “안될거야, 우리는 패할거야,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우리는 희망이 없어!...”라고 자포자기하는 그 믿음 없음이 문제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만 죽지 않는다. 주변에 사람을 함께 죽인다. 가장 무서운 전염병은 절망이란 병이다.

어떤 일의 성패에 있어서 그 주변적 조건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가신다.”는 믿음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 새 것, 새 역사는 그것을 먼저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난다. 역사는 비젼을 가진 자의 몫이고 비젼을 가진 자의 편이 되는 것이다.

광야시대에 두 코드가 있다. 한축은 끊임없이 불평하면서 되돌아온 곳으로 회귀하자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다수를 이루는 회중이다. 또 한축은 자꾸 앞을 제시하면서 불평하는 그들을 끌고 가는 소수의 선구자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보면 다수의 이야기가 맞다. 육십만의 인구를 끌고 그 끝없는 불덩어리 돌들을 거쳐 광야를 지나는 것은 정말 대책없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새 역사는 미래를 믿음으로 미리 보고 펼쳐가는 사람들에 의해 시작된다.

희망이라는 것은 인간이 아직 의식되지 않은 것을 내다보는 능력이고, 역사를 이끌어 가는 주된 동력이다. 현실적으로 이룰 수가 있는가는 그 다음 문제이다. 실현될 실마리가 전혀 발견되지 않더라도 현실 너머의 것을 꿈꾸고 그것을 토대로 나를 뒤집는 한판이 희망이다. 이것은 혁명의 근본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바탕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다. 꿈꾸는 사람만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우리가 국민주권을 말하는데 그러려면 주권자가 자기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 그 주체성은 자신이 처한 현재의 물질적 조건에 묶이지 않고 새로운 비젼을 세우고, 자신감을 가지고 그 역사를 변화시켜나가는 주체로 서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역사의 원동력임을 믿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가지는 주체성의 내용이다. 객관적 조건에 묶여 우리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사람은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물질이 이끄는 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꿈꾸는 대로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야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국민주권의 시대에 그 당당한 주인됨이 필요하다.

기독교는 언제나 부활, 새 생명, 새로운 피조물, 새 하늘 새 땅, 옛 시대를 지나오는 새 시대, 거듭남, 새 세상을 여는 메시아, 하나님의 나라, 오시는 구원자등 모든 것이 미래의 역사를 향해 열려있고 새로운 미래를 제시해 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신앙이 희망으로 발전하는 곳에는 어디서나 평온이 아니라 소요가 있고, 참아넘기기 보다는 참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하는 자들은 더 이상 현실을 그대로 둘 수 없다. 그들이 가진 희망은 현실과 모순을 일으킨다. 그것은 종래에 세상과의 충돌을 가져온다. 이 충돌은 평화로 나아가기 위한 불가피한 충돌이다. 그러나 궁극적 목적은 평화이다. 희망의 프로세스는 “신앙-희망-불만-충돌-변혁”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백성은 과거의 것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열어 제친다. 즉, 미래에 되어야 할 어떤 것을 실현하는 사람들이다.

신앙은 꿈을 낳는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꿈이 있을 것이다. 그 꿈이 없는 사람은 그야말로 맥 빠진 사람, 얼빠진 사람처럼 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꿈에 거룩한 옷을 입혀야 한다. 개인의 꿈은 단지 개개인이 가진 욕구의 표현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꿈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 안에서 이 꿈이 하나님의 미래를 실현하는 꿈인가 재점검하며 기도해야 한다. 그 꿈을 통해 진정 모든 것을 새롭게 하라는 내적인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그 꿈은 반드시 이룰 것이다.

기독교는 죽음의 십자가에서도 꿈을 보고, 가장 위대한 희망을 본다. 십자가가 십자가로만 끝난다면 그것은 패배요 절망이다. 그러나 십자가가 새로운 희망과 관련되어 있을 때 그것은 새로운 희망이다. 십자가는 우리 옛사람의 죽음이요 새로운 부활을 의미한다. 십자가는 새 하늘 새 땅에 참여하는 개벽이기에 의미가 있다. 진정한 꿈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명령 속에 있어야 한다. 신앙은 꿈이고 희망이다.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향한 희망을 찾아내는 것이다. 어떤 절망의 상황에서도 그 안에 희미하게 숨쉬는 희망의 줄기를 찾아내는 눈이 신앙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에집트의 노예민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도, 그 아버지의 아버지도 노예였고 그들의 자손도, 그 자손의 자손도 노예 신세를 면하지 못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노예 생활에 주저앉지 않고 자기들의 하나님을 찾아, 그들의 새로운 미래를 찾아 에집트를 뛰쳐나왔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이다. 우리들 각자는 어떤 출애굽을 꿈꾸고 있는가?

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땅위의 길과 같습니다. 본래 땅위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은 곧 길이 되는 것입니다(루쉰, 魯迅). 꿈꾸는 청년이 되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꿈에 거룩한 옷을 덧입힙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바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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