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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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
  • 김홍한
  • 승인 2017.03.02 13: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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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한목사의 이야기 신학 127호
1977년 대학입학예비고사가 끝난 교실, 아직 본고사가 남아 있었지만 수업분위기는 어수선했다. 학교를 파하고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 나오면 길게 줄이 서있다. 줄서는 것이 싫었던 나는 어슬렁거리며 줄서있는 친구들을 지나간다. 그러다 낯익은 친구를 만나면 손을 잡고 시장골목길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튀김 몇 개와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앞으로 언제 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워서다. 소주 한 병은 음식점 사기 물 컵으로 딱 두 컵이다. 한 컵씩 나누어 마시며 지난 3년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문을 나서면 길었던 줄은 없고 정류장은 한산했다.

요즈음 사람들을 만나면 그 때 기분이다. 이제 보면 언제 또 볼까 하는 아쉬움에 그냥 지나기가 아쉽다. 오늘날 우리는 100세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겨우 60세를 바라보는 나는 황당하게도 황혼의 나이를 느끼고 있다. 내가 너무 황혼을 앞당기고 있는 것일까? 인간의 수명은 현생인류가 지구에 출현한 수 만 년 동안 길어야 40~50세가 고작이었다. 현대라 할 1970년대, 나의 큰아버지, 둘째 큰아버지는 60세를 전후하여 돌아가셨다. 60세가 가까운 나이에 황혼을 느끼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수 만 년 축적된 과거를 망각하고 극히 짧은 시기에 100세 살 것을 당연시 하고 죽음을 한없이 미루는 오늘날 세태가 오히려 이상하다.

늦은 밤, 문밖에 나서면 제일 먼저 별이 눈에 들어온다. 별 주위를 구름이 흐른다. 세상사가 참 번잡하다. 그런데 세상사가 아무리 번잡하다 하더라도 저 별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빠르게 지나가는 조각구름들이 번잡한 세상사 같다. 그럴 때는 내가 별 같고 세상사가 흐르는 구름 같다. 그런데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는 나를 돌아보면 내가 구름 같다. 내가 골백번 태어나서 죽는다 하더라도 저별은 그냥 그대로이지 않겠는가?

근 몇 년간 나의 일은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일이다. 50대 중반까지 너무 치열하게 살았다. 특히 50대 초는 더욱 그랬다. “지금 나는 전성기 나이를 지나고 있는데 전성기 나이를 이렇게 초라하게 보낼 수 있는가?” 하고 말이다. 삶이 치열했다기 보다는 내 초라함을 벗어나려고 치열했던 것이다.

박경리의 <토지>에서 혜관이 말한다.

“학문을 잘못하면 병이 들 수도 있을 거요. 자기 자신을 찾다 찾다보면 좁쌀이 되니까요.”

혜관의 이 말이 내게 하는 말 같다. 내가 좁쌀이 되어 가는가? 그도 아니다. 좁쌀은 그래도 단단하기는 하다. 나는 마치 시궁창에 버려져 퉁퉁 불은 밥알 같다.

오늘 하루도 흘려보냈다. 시간이야 마냥 흘러가는 것, 아쉬울 것도 아까울 것도 없다.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 속에서 나를 본다. 목적을 가지고, 꽉 짜여 바쁘게 보내는 시간들 속에서 나를 찾기는 어렵다. 그러한 시간들은 대개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니고 남에게 얽매인 시간들이다. 남에게 종속된 삶이다.

그래서 말인데 삶은 바쁘게 살면 안 된다. 열심히 살아도 안 된다. 성실히 살아야 한다. 열심히 사는 삶은 욕망을 추구하는 삶이다. 열심히 살다보면 쉽게 지친다. 삶이 실패할 확률이 높다. 그러나 성실한 삶은 지치지 않는다. 실패하지도 않는다. 결코 무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을 잃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성실한 삶은 결과에 관계없이 성공적인 삶이다. 모든 이의 삶이 그러해야 하지만 특히 목회자의 삶은 더욱 그러해야 한다. 목회는 열심히 하면 안 된다. 성실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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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6일, 이화대학교 대학교회 주일예배 설교를 했다. 하루 전인 25일, 광화문 박근혜 탄핵 촉구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찜질방에서 밤을 보내고 예배에 참여했다.
예배가 끝나고 어떤이가 거칠게 항의했다. 정치적으로 편파적인 설교였다는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항의성 문자도 받았다.
과연 나의 설교가 정치적으로 편파적이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충분히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주님께서 내 입에 넣어주신 말씀이 그 말씀인 것을....

편파적이 아닌 설교가 있을까? 그런 설교는 없다.
모두에게 듣기 좋은 설교가 있을까? 그런 설교는 가짜다.
옳고 그른 설교도 없다. 다만 설교자가 얼마나 진실하게 설교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설교자가 나름대로 진실한 설교를 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청중의 몫이다. - 이번호 이야기 신학은 그 설교 원고로 채운다.

제목 / 言. 心. 行 (이대교회에서 2017년 2월 26일)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 창세기 1:3 -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 요한복음 1:1~2 -
“마음으로 믿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 로마서 10:10 -

오늘 설교의 제목이 “언.심.행”입니다. 말이냐 마음이냐 행동이냐? 라는 것이지요. 사실 말과 마음과 행동은 한 덩어리입니다. 말과 마음과 행동은 같아야지요. 다르면 거짓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누어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오늘 말에 중점을 두고자 합니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입니다. “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 달렸다는 것이지요. 행복도 불행도 마음먹기 달렸고, 천국과 지옥도 마음에 있으며 사랑과 미움도 마음에 있다. 그 얘기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마음 다스리기에 집중합니다. 그것이 “참선”입니다. 마음의 철학입니다. 참선만하고 있어도 신도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유교는 행함의 종교입니다. 삶의 철학이요, 현실철학입니다. 知行合一, 言行一致해야 참입니다. 물 뿌리고 비질하고 묻고 대답하는 일상의 일에서 시작해서 높은 경지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下學而上達”입니다. 그래서 대개 유가의 학자들은 현실정치에 참여를 하는 이들이 참 많았습니다. 공자도 맹자도 현실정치에 참여하려고 무진 애를 쓴 분들입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이 되셨습니다. 예언자들은 참선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정치에 참여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말을 한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말을 한 사람들입니다. 목사도 말을 하는 사람, 목사가 하는 일 중에 제일 중요한 일이 말씀선포입니다. 구원도 말을 해야 이르게 됩니다. 마음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이르기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로마박해시대에 마음으로는 아무리 믿어도 드러나지 않아요. 입으로 시인하면 드러나고 죽을 수 있습니다. 나를 드러내는 것, 바로 말입니다.

말이 진리는 아닙니다. 말이 진리라면 그거야 말로 언어도단입니다. 그래서 노자는 “道可道非常道”라 했습니다. 석가는 자신의 말을 뗏목에 비유했습니다. 뗏목은 강을 건너기 위한 도구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석가는 죽을 무렵 “나는 한마디도 안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말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표현하고 전하고 하는데는 언어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 以心傳心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안 됩니다. 말을 해야 합니다. 나면서부터 소경, 나면서부터 귀머거리가 있습니다. 누가 더 장애가 심할까요.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것이 말이기에 소경된 자보다 말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훨씬 더 장애가 심합니다. 나면서부터 귀머거리는 듣지 못하기에 그 말을 따라하지 못하여 벙어리입니다. 또한 듣지 못하기에 지적 능력이 형성되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하나님”. “성령님”. “민주주의”, “자유”, “평등”, “정의”, “진리”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을 학습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언어의 중요성이 종교의 세계에서는 더욱 강조됩니다. 종교는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듣고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종교에서 보이는 것은 우상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상과 성화보다 말씀으로서의 경전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래서 유대교에는 유물이 없습니다. 경전만 있습니다. 이슬람교에도 유물이 없습니다. 경전만 있습니다. 유교에도 유물이 없습니다. 경전만 있습니다. 처음 기독교와 불교도 말씀만 있었습니다. 그리스문명을 만나면서 성상과 성화가 만들어지고 불상이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보이게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말씀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말씀입니다. 철학자 하이덱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언어분석철학에서는 “생각이 언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우리의 생각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믿음”, “자유”, “평등”, “정의” 이런 말들을 모른다면 그런 개념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해방신학이 몇 가지 있지요. 남미 해방신학, 우리나라에 민중신학, 흑인해방신학, 그리고 여성해방신학이 있습니다. 이중에서 가장 성공 확률이 높은 것이 여성해방신학입니다. 왜냐하면 여성해방신학은 언어를 바꾸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성서도 바꾸자고 합니다. 성서 자체가 남성위주의 언어로 기록된 것이니 성서의 언어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형성하기에 남녀불평등의 언어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남녀불평등의 사고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서의 남성중심의 언어를 양성평등의 언어로 바꾸자는 것이지요. 양성평등의 언어는 양성평등의 사고를 만들어냅니다. 이미 양성평등의 언어가 일반화된 것들이 있어서 고무적입니다. 요즈음은 “체어맨”이라는 말을 안 쓴다면서요. 의장이 어디 남자만 있습니까? 그래서 “체어”라고 하지요. “미스”, “미세스”구분하지 않고 “미즈”라고 합니다. 여기에 내 생각을 하나 더 첨가한다면 양성평등의 언어로는 부족합니다. 양성 존중의 언어가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부부나 연인들이 서로 경어를 사용하도록 하면 더욱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말로는 부족하니까 문서를 만드는데 문서는 말을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짜 중요한 것은 말이지 문서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약속은 말로 합니다. 사랑고백, 말로 합니다. 인간사에서 결혼식만큼 중한 것이 없지요. 결혼서약 말로 합니다. 주례자가 “인감증명 가져왔소? 인감도장 찍어요.”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신앙고백, 말로 합니다. 세례문답도 문서로 하지 않아요. 말로 합니다. “예수를 믿습니까?” “예” 그것으로 족합니다.

불교가 마음의 종교라고는 하지만 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이 부처님 말씀입니다. 如是我聞(여시아문)으로 시작하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나는 이렇게 들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불경입니다. 유교가 행함의 종교라고는 하지만 역시 말씀이 중요합니다. 子曰(자왈)이지요. “자왈”하면 공자왈 이라는 말입니다. 양명이 한말, 주자가 한말도 중요하지만 근거는 모두가 “공자왈”이지요. 성경의 말씀도 다 귀하지만 똑같이 귀한 것은 아니지요. “예수께서 가라사데....” 이 말씀이 가장 중요한 말씀이지요.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말을 바로 사용해야 합니다. 나는 오늘날 교회가 사용하는 용어 중에 아주 귀에 거슬리는 말이 있습니다. “전도특공대, 전도 전략, 도전받았다. 성령폭발, 여리고 점령 작전” 이런 말은 사용하면 안돼요. 이런 말들은 다 군사용어들, 전투용어들입니다. 평화를 말해야 하는 기독교가 어째 이런 전투용어, 군사용어를 사용합니까? 이런 용어를 사용하면 교회가 살벌해지고 전투적이 됩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기에 행동은 개떡같이 해도 설교는 제대로 해야 합니다. 입은 삐뚤어 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 합니다. 제일 큰 죄가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다.

원론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원론은 참 중요합니다. 원론이 잘못되면 모든 것이 잘못됩니다. 원론이야기 했으니 현실적인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옛날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이 있었습니다. 제나라 환공이 어느 날 말했습니다. “내가 산해진미를 다 맛보았는데 사람고기 맛은 어떨까?” 하고 농담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요리사 역아가 제 자식을 잡아서 요리해서 진상했습니다. 섬뜩하지요. 그러지만 역아의 충성심은 인정해 줄 만했습니다. 감동한 환공이 그를 높이 등용했습니다. 지금으로 하면 비서실장 격입니다. 환공을 도와서 제나라를 제후국 중 최고의 나라로 만든 이가 명재상 관중입니다. 이 관중이 중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환공이 문병을 갔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보시오. 했습니다. 그런데 관중이 머뭇머뭇하고 말을 하지 않아요. 그러자 환공이 거듭 부탁합니다. 그러자 관중이 말합니다. “역아라는 놈을 멀리 하십시오.” 환공 말합니다. "역아는 자기 아들을 삶아서까지 나에게 충성한 사람인데 그를 의심해야 합니까?" 관중 답하기를 "자기의 친아들까지 죽이는 놈입니다.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관중의 말은 적중했습니다. 관중이 죽고 나서 얼마 후 실권을 쥐게 된 역아는 환공을 방에 가두고 환공의 이름으로 왕노릇 합니다. 태자가 나서서 바로잡고 난 뒤 보니 환공은 굶어 죽은지 두 달, 그의 시체에는 구더기가 들끓었다고 했습니다. 최고 지도자는 농담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사악한 자들이 농담을 진담으로 만듭니다.

오늘날 역아와 같은 이가 누구인가? 독재자의 사소한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과잉충성을 했던 이들, 결국 주인을 잡아먹습니다. 국정원을 보면서 역아가 생각났습니다.
국정원 누가 만들었는가? 박정희가 만들었습니다. 누가 박정희를 죽였는가? 국정원이 죽였습니다. 박근혜를 누가 대통령으로 만들었는가? 국정원이 만들었습니다. 간첩을 누가 만드는가? 국정원이 만듭니다. 우리나라 국정원이 꼭 역아 같은 놈입니다. 이석기가 내란음모한 것이 아니라 국정원이 내란을 음모하고 있습니다. 내란음모 정도가 아니라 내란을 실천으로 옮기는 곳이 국정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을 해야 합니다. 말이 세상을 바꿉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신라 성덕왕(聖德王) 때 순정공(純貞公)이라는 사람이 강릉태수 부임하는 도중에 임해정(臨海亭)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는데 갑자기 바다에서 용이 나타나더니 부인을 끌고 바닷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지아비가 땅을 치며 통곡하고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했지만 어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한 노인이 나타나더니 말합니다. “옛 사람의 말에,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 했으니 이제 바닷 속의 용인들 어찌 여러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지팡이로 강 언덕을 치면 부인을 만나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대로 하였더니 용이 부인을 모시고 나와 도로 바쳤다는 내용입니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죄 그 얼마나 크랴.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 잡아서 구워 먹으리”

국정원이 빼앗아가고 새누리당이 빼앗아간 민주주의를 어떻게 되찾을까? 전국 방방곡곡에서 북을 치고, 징을 치고, 발을 구르며 민주주의 돌려달라고 노래를 불러야지요.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는데 안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부릅시다.

“그네야, 정원아 민주주의를 내놓아라, 민주주의를 유린한 죄 얼마나 크랴. 네 만일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 촛불로 구워 먹으리라.”

경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 노자읽기 -

16.
致虛極(치허극) : 지극한 비움에 이르고
守靜篤(수정독) : 깊은 고요함을 지켜라
萬物竝作(만물병작) : 만물이 어울려 생겨날 때
吾以觀復(오이관복) : 나는 근본을 본다
夫物芸芸(부물운운) : 모든 것이 얽혀 있지만
各復歸其根(각복귀기근) : 각기 모두 그 근본으로 돌아간다.
歸根曰靜(귀근왈정) : 근본으로 돌아감은 고요함이다
是謂復命(시위복명) : 이를 일러 命을 회복함이라 한다
復命曰常(복명왈상) : 命을 회복함이 영원이다
知常曰明(지상왈명) : 영원을 아는 것이 밝음이다
不知常(불지상) : 영원을 알지 못하면
妄作凶(망작흉) : 미망으로 흉한 것이다
知常容(지상용) : 영원을 알면 너그러워진다
容乃公(용내공) : 너그러워지면 공평해 진다
公乃王(공내왕) : 공평해지면 왕같이 된다
王乃天(왕내천) : 왕같이 되면 하늘같이 된다
天乃道(천내도) : 하늘같이 되면 도같이 된다
道乃久(도내구) : 도같이 되면 영원이다
沒身不殆(몰신불태) : 몸이 사그라져도 두려울 것이 없다

비움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내 존재를 없애는 것인가? 그럴 수 없다. 비움이란 존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헛되고 거짓된 것을 없애는 것이다.
거짓된 것을 걸러내고 또 걸러내어 마침내 모두 걸러내면 더 이상 동요가 없다. 근본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것이 해탈이고 구원이고 좌망이다. 그래서 영원이다.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 마땅히 그래야 하기에 命이다.

대기업 상품 보다는 중소기업 상품을 이용합시다.
대형유통회사 보다는 동네 가게를 이용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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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유성구 원내로 39번길 59 <새교회> 우)34227
☎ 010-3243-2665 E-mail: khhyh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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