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복은 폭력이다
상태바
보복은 폭력이다
  • 김홍한
  • 승인 2017.02.16 15: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홍한목사의 이야기 신학 171호

1997년 말,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그때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밤을 새워 개표방송을 보면서 환호했다. 모두들 기뻐하면서 아침 식사는 서로 대접하겠다고 했다. 때는 IMF 금융위기로 온 나라가 극심한 경제적 고통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은 한줄기 희망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 아내가 이상한 말을 한다. 딸아이와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를 둔 윗집은 매우 침울하다는 것이다. “이제 나라가 망했다”고 눈물을 글썽이며 밥도 제대로 못 먹는 다고 했다.

유유상종이라, 내가 알고 만나고 대화하는 이들은 나와 비슷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었는데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니 멍했다. 대통령선거결과로 내가 환호하고 기뻐하는 만큼 저들은 비통해했다. 정말로 그들은 나라가 망할 것 같은 두려움에 싸였던 것이다.

최근 그 때와 비슷한 경험을 또 했다. 특검이 청와대 압수수색을 시도했다가 좌절된 후 어떤이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쓴 글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 우리는 청와대 압수수색까지 시도하는 이번 박영수 특검의 행태와 이 영장을 발부한 사법부의 행태를 보면서 ... 또다시 특검이 청와대 압수수색을 시도한다면 전원 국가기밀시설, 군사기밀시설 침입에 대한 죄를 물어 현행범으로 체포하거나 그래도 가지 않고 버티고 무단 침입을 시도하면 즉각 현장에서 조준사격으로 사살하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을 지키고 헌정과 법치를 지키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2017년 2월 10일 장로회신학대학교 김철홍교수는 현재의 탄핵정국에 대하여 말하기를 "80년 광주사태로부터 이어져 온 친북세력의 공산국가 수립 시도"라고 했다.

아! 같은 시대를 살고, 비슷한 연령이고, 비슷한 학력을 가지고 있으며 같은 기독교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이렇게 세상을 보는 눈이 극과 극으로 다를까? 내게 그들이 너무나도 낯설 듯이 그들의 눈에도 내가 그렇게 보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들도 선량한 우리의 이웃이다. 나는 그들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고 그들의 지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어도 그들을 존중해야한다는 생각이다. 내가 그들을 무지하고 어리석은 이들로 멸시한다면 그들도 나를 무지하고 어리석은 이로 멸시할 것이다. 내가 존중받기 위해서라도 그리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그들은 틀린 것이라기보다는 다름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라 했는데 무엇이 다른가? 엉뚱하게도 나는 “성품”이 다르다고 이해한다. 그들은 권력자, 권위자, 힘 있는 자들에게 잘 길들여지는 성품이다. 그래서 권력과 권위에 관대하고 권력과 권위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자신과 사회에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나와 같은 이들은 잘 길들여지지 않는다. 그 관심이 권력과 권위 보다는 서민 대중에게로 향해 있다. 이러한 성향의 차이는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수 없는 타고난 성품이라고 생각한다. 성품은 나이와 관계없고 빈부와도 관계없으며 지식이나 지혜와도 관계없다. 타고난 것이라는 생각이다.

복음서 읽기, 8복

8복은 세상의 복이 아니라 하늘나라 복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세상에서는 저주일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늘나라 비밀을 발설하셨습니다. 천기누설입니다. 이보다 더 큰 죄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죽어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산상수훈을 말씀하심에 조용히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때로는 수 천 명을 앞에 두고 말씀하셨으니 목에 핏대를 세우시고 고함치듯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만 말씀하시지 않고 기회 되는 대로 거듭해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맨 날 그 이야기만 하셨을 것입니다.

천지창조 이래 이만한 소리가 있을까? 동서고금에 이보다 더 장엄하고도 섬세하며 사람의 몸과 마음을 가득 채우는 생명의 말씀이 있을까? 너무도 크고 웅장하기에 듣되 들리지 아니고 너무 섬세하기에 역시 들리지 않습니다. 그저 듣는 이가 느낌으로만 알뿐 몸과 마음에 스며들기가 어렵습니다.

“가난한자는 행복하다” 했습니다.
가난한 이가 행복하다니 웬일인가요? 부자가 불행한 것은 분명합니다.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했습니다.
세상은 참혹한 경쟁사회,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 반대입니다. 百獸의 왕 호랑이는 한반도에서 사라진지 오래이지만 토끼는 여전히 산과 들에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찰스 다윈의 적자생존의 법칙이 진실에 가깝다 하더라도 그 적자라는 것이 강자가 아니라 온유한자입니다. 세계를 제패한 이는 강자 알렉산더가 아니라 온유한자 예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언재나 땅에 충만한 이들은 온유한 이들입니다.

“義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했습니다.
혁명을 하고자 하는 이도 혁명을 막고자 하는 이도 그 명분을 義에 둡니다. 새나라 조선을 세우고자 한 정도전, 부패한 고려를 지키고자 한 정몽주 둘 다 그 명분을 의에 두었습니다. 정의는 승자가 얻은 전리품이고 훈장이지요. 그러나 이 또한 어찌된 일인지 조선왕조에 의하여 승자 정도전은 역적으로, 패자 정몽주는 충신으로 탈바꿈 되었습니다. 이는 정도전과 함께 나라를 세우고 정도전을 제거한 이들이 또 다른 역성혁명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세속적 義는 강자의 필요에 따라서 조작되곤 합니다.

참다운 의(義)란 힘에서 찾을 것이 아닙니다. 윤리와 양심에서도 얻을 것이 아닙니다. 윤리는 민족마다 다르고 시대마다 다르며 양심 또한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참다운 의는 종교에서 찾을 것인데 그 종교라는 것도 교리화 되고 제도화된 종교가 아니라 산상수훈과 같이 때 묻지 않는 가르침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참다운 義는 남이 알아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난받기 쉽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자는 행복하다” 했습니다.
불쌍히 여겨야 할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칭찬할 일이 아닙니다. 자비를 베푼다 함은 불쌍히 여길 수 없는 이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자비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이 깨끗한 것입니다. “깨끗함”이란 깨어 끝까지 깨뜨려 없애는 것이니 자신의 과오를 추호도 남김없이 드러내고 깨뜨려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깨끗함은 철저해야 합니다. 선을 행함에 조금이라도 칭찬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깨끗함이 아닙니다. 의를 행함에 조금이라도 파당심이 있다면 깨끗함이 아닙니다. 사랑을 행하되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으면 깨끗함이 아닙니다. 맑고 맑은 마음이면 그 마음 그대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平和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했습니다.
‘강자는 약자를 끊임없이 억압하고 착취하며 약자는 끊임없이 강자에게 반항하고 투쟁 한다’는 계급투쟁의 역사, 참으로 명료하고 명쾌한 역사관입니다.

언재까지 이러한 계급투쟁의 역사가 계속될 것인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고 하면 과학이고 “완전한 공산사회로 역사가 완성된다.”고 하면 종교입니다. 공산주의는 과학으로 시작하였건만 종말론적 미래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고 모두가 알듯이 공산주의는 종말론적 미래를 맞이하지 못하고 종말을 고했습니다. 아마도 평화를 위한 종교적 희생 없는 과학적 투쟁만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종교적 이상향은 투쟁이 아니라 희생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간과한 것입니다.
평화를 위한 희생자들의 피 값이 천국을 만듭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일 것입니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했습니다.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바보를 “숙맥(菽麥)”이라 합니다. 말과 사슴을 구별하지 못하는 이를 “마록(馬鹿)”이라 하여 일본어의 대표적인 욕, “빠가” 입니다. 이들이 진짜 지능이 모자라는 바보라면 다행이건만 콩 인줄 알면서 보리라 하고 사슴 인줄 알면서 말이라 한다면 바보가 아니라 진실을 뒤집는 악인일 것입니다.

옛날 진(秦)나라의 시황(始皇)이 죽고 조고와 이사가 권력을 잡은 후 올곧은 이들을 제거하고자 지록위마(指鹿爲馬)라 했으니 이에 동조하여 사슴을 말이라 한 이들은 살아남고 사슴을 사슴이라 한 이들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예들은 역사 속에 무수하고 우리 삶에 무수하니 선과 악이 뒤바뀌고 진실과 거짓이 뒤바뀐 것입니다. 선악을 바꾸고 진실과 거짓을 바꾸는 이들에게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빛과 소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4:13-16)

소금은 스며들어야 제 역할을 하고 빛은 높이 들려야 제 역할을 합니다. 스며드는 것과 높이 들리는 것은 반대의 모습입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서, 사안에 따라서 소금처럼 자기가 드러나지 않아야 하고 빛처럼 드러나야 합니다. 믿음생활에서도 소금처럼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이 있고 빛처럼 드러내야 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지하 무덤 속으로 숨었고 은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날 복음장사꾼들처럼 크게 선전선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꼭 필요한 때는 모두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공개했습니다. 심각한 박해의 시대에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신앙고백입니다. 바울선생님이 말씀하신

“마음으로 믿어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롬10:10)

는 말씀은 죽음의 박해 앞에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공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이란? (마태5:17-20)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는 말씀은 과연 예수의 말씀이실까? 이 말씀은 아마도 당시에 편만해 있던 바울선생의 율법부인을 지적하는 마태의 의도일 것입니다.

“율법을 어기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대접을 받을 것이다.”

는 말씀은 ‘작은 사람’이라는 ‘바울’을 빗댄 말일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의 족보에서 보는 것과 같이 유대인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으면서도 한편 율법을 수호함으로 유대인들의 전통을 잇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이 단지 유대인들의 전통을 잇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이혼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보복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사람으로는 수행할 수 없는 이상적인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하십니다. 적어도 예수처럼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15:14-15)

어느 율법, 어느 관습, 어느 윤리 도덕도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과거에는 훌륭했던 윤리, 도덕도 오늘날 보면 매우 편협하고 불합리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상황이 바뀌면 율법도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나 일단 율법이 되면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율법은 그 자체가 권위가 되어 사람들을 제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안식일법 등은 이미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그 권위로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우상이 된 것입니다. 그것을 간파하신 예수께서는 당연히 그 율법을 깨뜨리지 않을 수 없으셨습니다.

완전한 법은 없습니다. 법은 항상 상위의 법에 의하여 점검되어야 합니다. 그 상위의 법이란 ‘사랑의 법’입니다. 그러니 “율법의 완성”이란 율법을 사랑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지극한 사랑의 눈으로 보면 율법과 관습이 제정된 근거가 보이고 만들어진 과정도 보이며 한계도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보완할 수 있고 극복할 수 있고 자유로울 수 있으며 폐기할 수도 있습니다.

가정은 가장 기본적인 사회조직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부인 하는듯한 가르침은 어느 시대에도 위험시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정이라는 것이 진리는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가정이라는 틀에 갇혀 있으면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어느 성인도 가정의 소중함을 말한 이는 없습니다. 석가는 가정을 버렸고 예수는 가정을 아예 갖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제자들도 대부분 가정을 포기 한 듯합니다. 진리의 세계로 가는데 가정은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하여 천주교의 사제들, 불교의 승려들은 독신을 고집합니다.
철없을 때는 육신의 정욕에 빠져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생산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자연의 섭리입니다. 그러나 철이 들면 가정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가정에 연연한다 함은 혈연에 연연하는 것이고 혈연에 연연하면 재물의 상속은 물론이요 나라도 세습하려 하고 주님의 몸인 교회도 세습하려 합니다.

맹세하지 말라(마5:33-37)

예수께서는 맹세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사람은 맹세를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맹세는 미래에 대한 자신의 행위를 미리 확정짓는 것입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 는 있으되 단정할 수는 없으니 맹세하는 것은 무지와 경솔함에서 나옵니다.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 숨겨 있습니다.
우리의 부모님세대는 서원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무지했을 때 이야기입니다. 이제 맹세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뜻을 알았으면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보복은 폭력이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 주어라.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말아라."(마5:38-42)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표되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은 주전 1750년경 바빌론의 함무라비법전의 주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법이 당시로서는 강자의 횡포를 막고 과잉보복을 막는 나름대로 훌륭한 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법에는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이에 대한 배려가 부족합니다. 그만큼 성숙하지 못한 법입니다.
보복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강자입니다. 강자의 보복은 보복이 아니라 분풀이일 뿐입니다. 특히 용서를 구하는 이에 대한 보복은 폭력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러한 법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완전한 사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5:48)

예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하셨는데 “완전한 사람”이라는 말이 가당한 말인가요? 감히 하나님께만 사용할 수 있는 말을 사람에게 적용했습니다.
‘사랑의 법’이 율법의 완성이듯이 사람이 완전하게 되는 것도 사랑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것을 사랑함은 본능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사람은 물론 짐승들도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사랑할 수 없는 이(원수)를 사랑함입니다.
일본의 불교승려 신란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善人도 사랑하여 구원하시거든 하물며 惡人을 구원치 않으시겠는가?”

한편 학은 학대로 완전하고 오리는 오리대로 완전합니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잘라서 짧게 하면 불행이요 오리다리가 짧다고 이어서 길게 하면 불행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사람으로 완전합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완전하고 늙은이는 늙은이대로 완전합니다. 개똥이는 개똥이로 쇠똥이는 쇠똥이로 완전합니다.

감출 줄 알아야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마6:4)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는 당연한 것입니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 보존칙”, “질량보존의 법칙”은 “인과응보”와 같은 말입니다. 공짜로 무엇을 하는 것은 하나님도 못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사해 주심에도 공짜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대가를 치르셔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선을 행함에도 공짜는 없습니다. 선행에 대해서는 틀림없는 보상이 있습니다. 악행에 대해서도 틀림없는 응징이 있습니다. 주역(周易)에도 이르기를 “선을 쌓는 집에는 필히 경사가 있을 것이요 선을 쌓지 않는 집에는 필히 재앙이 있을 것이다.”(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怏)” 했습니다. 철학자 칸트도 이에 동의합니다. 행위에 대한 응답이 있기 위해서는 영혼불멸이 전제되어야 하고 내세(來世)가 있어야 하고 심판주로서의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고 합니다.

선을 행하고 제 스스로 떠벌이는 것은 선의 대가를 더 많이 얻고자 하는 도적과 같은 마음입니다. 선을 행함은 선입니다. 그러나 그 선행을 떠벌이는 것은 악입니다. 역시 자신의 악을 축소, 은폐하고자 함도 악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라면 자신의 선은 철저히 감추고 자신의 악은 철저히 회개하고 공개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감출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악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선을 감추고, 자신의 아름다움도 감추고, 자신의 재물도 감출 줄 알아야 합니다. 선을 드러내면 선은 흩어지고 맙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면 몸을 버리게 됩니다. 자신의 재물을 드러내면 도둑을 불러옵니다.

대기업 상품 보다는 중소기업 상품을 이용합시다.
대형유통회사 보다는 동네 가게를 이용합시다.

======================================================
대전 유성구 원내로 39번길 59 <새교회> 우)34227
☎ 010-3243-2665 E-mail: khhyhy@hanmail.net
후원계좌 / 농협 453047-52-043161 김홍한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