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이 영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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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이 영원이다
  • 김홍한
  • 승인 2017.02.0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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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한목사의 이야기 신학 170호

친구 목사가 들려준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마을에 성자가 살았다. 그 성자는 정말 청빈하게 살았다. 가진 것이라고는 찌그러진 주전자 하나가 전부였다. 그 주전자로 물도 끓이고 밥도 해 먹었다. 성자는 가르치기를 “주님이 오실 때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늘에 올라 주님을 영접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동네사람들은 그 성자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겼다.
드디어 그 날이 왔다. “주님이 오신다”는 소리에 모든 동네사람들은 평소 성자의 가르침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늘에 올라 주님을 맞이하는데 성자가 보이지 않았다. 웬일인가 하여 살펴보니 저 아래에서 성자가 낑낑거리며 올라오는데 도무지 진척이 보이지 않는다. 이유인즉 그 찌그러진 주전자를 버리지 못하고 들고 오느라 그랬다.


노자 말하기를

“학문의 길은 날로 더해가는 것이고 도의 길은 날로 덜어가는 길이다”

고 했다. 그 말에 깊이 공감하는 바가 있다. 나도 평소의 생각이 “나 죽을 때 남기는 것이 없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살림살이를 줄였다. 옷은 옷장 하나를 넘기지 않고 책도 줄이고 줄여서 책장 하나를 남겼다.

그동안 공부하면서 한 장 한 장 독서카드를 만들었다. 책을 보면서 정리한 카드, 문득 생각난 것, 대화 속에서 얻어지는 것, 곰곰이 생각하여 얻어진 것,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독서카드를 정한 기준에 의하여 분류해두었다. 이렇게 모아온 독서카드가 1만 여장이다. 그것을 최근에 폐기했다. 그동안 책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은 독서카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득 독서카드를 의지하는 내 모습이 진부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陳腐(진부)란 썩은 고기를 늘어놓는 것이다. 고기는 맛있고 영양도 높다. 그런데 오래되어 썩었다. 냄새가 진동하여 사람들이 피한다. 자신의 장점이요 강점이라고 여겼던 것이 이제는 썩어서 냄새가 진동한다면 어찌할까? 모른다면 비극이요 안다면 가차 없이 버려야 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성인의 찌그러진 주전자와 같다.

공부의 자료가 사라졌다는 허탈함도 있지만 해방감도 느낀다. 새로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느꼈다. 나는 생각한다.

“현명함이란 내게 없어도 되는 것을 분별해 내는 것이고 용기란 내게 없어도 되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사람은 변화를 원한다. 정체된 삶이 지속되면 그 삶이 비교적 안정되고 윤택한 삶이라 해도 지겨울 수 있다. 하물며 괴롭고 힘든 삶이 계속된다면 더더욱 변화를 갈망하게 된다.
변화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때 사람은 변화를 시도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외부 환경을 변화시키기는 어렵다. 지금보다 더 여유 있고 더 재미있는 삶으로의 변화는 쉽게 오지 않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택하는 변화는 일단은 나에게 손해가 되는 변화다. 이를테면 직장에 사표를 던진다. 사업체를 정리한다. 머리를 짧게 자른다. 먼 여행을 한다. 이렇게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러면서 내적 변화도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역사에도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 있다. 역사의 변화도 변화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때 일어난다. 그것이 대표적으로 전쟁이다. 좋아서 하는 전쟁은 거의 없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순이 쌓이고 쌓여서 일어나는 것이 전쟁이다.

종교에도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종말론이다. 종말을 말하고 종말을 기다리는 이들이 누군가? 지금 잘살고 지금 여유 있고 지금 소망이 있는 이들은 그 누구도 종말을 바라지 않는다. 혹 여유 있고 권세 있는 이들 중에 종말을 말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필경은 그것을 이용하고자 하는 이들일 것이다.

종말이 다가왔다

1992년 10월 28일은 다미선교회가 정한 시한부종말론예정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과거 종말 예정일은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때의 종말 예정일은 대중매체를 타고 크게 알려졌다.

종말 예정일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며 어느 특정종교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동서양의 종교를 막론하고, 고금을 막론하고 두루 있어왔다. 분명한 것은 언젠가는 종말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고 그것이 분명한 이상 종말론은 끊임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999년 12월 교황 실베스터 2세도 세기말 종말이 임할 것이라고 공표하였다. 교황이 종말을 공표한 것은 가톨릭의 공식입장이라 할 수 있다. 만류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도 1867년이 세상의 종말이라고 예언했었다.

과거의 종말론은 종교의 영역에서 가장 많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천문학, 지질학, 환경오염, 에너지 고갈, 핵무기, 컴퓨터 등의 기술문명의 요소들이 가미되면서 증폭되고 나름대로 과학적 근거도 제시하며 더욱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실제로 핵무기에 의한 종말은 언제 어떻게 닥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금세기 들어서는 지구기온 상승으로 인류멸망의 위험이 더욱 과장되고 확대되고 있다. 2000년이 되는 해에는 컴퓨터에 의한 Y2K 공포가 크게 확산되었었다.

나는 1992년 10월 28일 종말예정일과 2000년 Y2K 공포에 대하여 경험이 있다. 1992년에 나는 농촌의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면직원 중에 종말예정일을 믿고 있는 이가 있었다. 그는 주변의 많은 이들로부터 시한부 종말론이 허황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온 바라 의심도 하고 있었다. 그가 어느 날 밤 은밀히 찾아왔다. 나는 당시 소위 운동권목회자로 분류된 터였다. 그는 나에게서 “다른 이들과는 좀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왔다”고 했다. 나는 짧은 성서지식과 신학지식으로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객관화 시켜서 이야기 해 주고 그동안 있었던 종말예언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 줄 수 밖에 없었다.

종말론은 1980년대 한국교회에 크게 팽배하였었다. 웬만한 교회 강단에서는

“그 날과 그 시는 알 수 없지만 임박한 것은 틀림없다. 아마도 10년 이내에, 길어야 20년 이내에 종말이 올 것이다.”

라고 공공연히 설교 하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다미선교회의 종말예언이 있었기에 한국의 교회들은 그것을 부인할 만한 명분이 약했었다. 심지어 대형교단의 신학대학인 총신대학에서 1991년 4월 4일 다미선교회의 이장림 대표를 초청하여 ‘종말론 세미나’를 열어 후에 큰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1998년쯤으로 기억된다. 어느 선배목사님이 강권하여 그의 교회에서 세기말 종말론 세미나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새천년이 되면서 컴퓨터들이 오류를 일으켜서 상상할 수 없는 대혼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은행전산망이 오류를 일으켜서 경제가 마비될 수 있고 어쩌면 핵발전소가 폭발하고 핵미사일이 저절로 발사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그 선배목사님이 매우 측은했다. 당시 그는 매우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도무지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그는 종말을 간절히 바라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종말을 말하는 이와 종말을 기다리는 이는 구별해야 할 것이다. 종말을 말하는 이들은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도 있고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말을 바라는 이들은 대부분 이 세상에서 작고 소박한 소망조차도 찾지 못하는 절박함과 종말을 말하는 이들의 가르침을 전폭적으로 믿고 따르는 순수함을 가진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이다. 누가 감히 그들을 어리석다고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종말의 때 그들이 주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가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또 다른 종말론들

2008년 봄, 모 대학에 김지하 시인 초청강연이 있었다. 강연내용은 환경파괴, 생명파괴로 인류의 멸망이 임박했다는 일종의 과학적 종말론이었다. 그리고 청중들을 향해서 아주 심각하게 “왜 자신의 말에 왜 긴장하지 않고 왜 충격 받지 않느냐?”고 질타를 했다. 마치 1970-80년대 기독교의 삼류 부흥사들이 종말이 가까웠다고 성도들에게 협박하는 모습 같았다. 그 때 그들은 정말 종말이 가까운 줄 알고 그렇게 말했을 것이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일종의 공갈과 협박이었다.

헤겔은 역사를 절대정신이 스스로를 실현해 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런 헤겔이 나폴레옹을 보고는 “나는 말을 탄 절대정신을 보았다”고 찬사를 보냈다. 나폴레옹에게 매료된 나머지 그의 철학의 근본인 끊임없는 변화를 말하는 변증법을 스스로가 배반한 것이다. 역사의 영웅 앞에 그의 철학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철학자가 종말론자가 된 것이다. 절대정신의 실현이라는 것은 바로 종말을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공산주의에도 종교적 모습이 다분하다. 나는 그것을 종말론이라고 본다.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는 과학적 공산주의다. 막연히 나누어야 한다는 낭만적 공산주의는 역사를 변화시키지 못하니 사회적 모순을 철저히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해결점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보았다. 역사는 사회적 모순이 깊어지고 깊어져서 결국 프로레타리아 혁명에 의한 완전한 공산사회가 도래한다고 했다. “완전한 공산사회”는 종교적 개념이다. 마르크스는 과학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종교적 종말론을 꿈꾸었다.

예수의 말씀

“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마24:30)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임금으로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마16:28)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당신께서 그 세대에 재림하실 것으로 아셨나 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자들이 다 죽도록 주님의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처음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임박한 종말을 기다리고 준비하느라 많은 것을 포기했다. 재산을 정리했다. 생업도 포기했다. 그리고 열심히 주님의 재림과 심판을 전했다. 그런데 오신다던 주님은 오시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이 바로 오신다던 말씀을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주님이 바로 오실 것이기에 주님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길 필요도 없고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주님의 오심이 늦어지면서 비로소 복음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복음서가 늦게 써진 결정적인 이유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음서가 기록됨에 종말지연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첨가 시켰다.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 날과 그 시간은 마무도 모른다.”, “여러 번 난리가 일어나고 전쟁의 소문도 듣게 될 것이다.”

등이다. 더 나아가 요한복음은 종말이 이미 실현 되었다고 말한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을뿐만 아니라 이미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들어 섰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때가 오면 죽은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것이며 그 음성을 들은 이들은 살아날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요5:24-25)

과연 예수께서 종말을 말씀하셨을까?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 예수께서는 종말을 말씀하셨다기 보다는 당신께서 다시 오심을 말씀하셨다. 양과 염소를 구별하시는 심판을 말씀하셨다. 종말론을 말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말씀하신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말 그대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말씀의 초점이 있는 것이지 이 세상이 끝장나는 종말에 초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시작은 끝을 전제로 한다. 이전의 것을 끝내지 않은 새로움은 새로움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재림, 새 하늘과 새 땅은 종말과 같은 것이다. 다만 종말론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희망보다는 끝이라는 절망의 이미지가 강하기에 문제다.

순간이 영원이다.

내가 여러 번 강조하는 바가 있다. “사람은 피라미드를 만들었지만 하나님은 球(구)를 만드셨다.”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이 구다. 구는 위아래가 없다. 시작과 끝이 한 점이다.
사람들의 시간관은 직선적 이다. 장구한 천문학적 시간에 비한다면 인간의 수명은 정말 순간이다. 순간을 사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시간은 태어나서 죽기까지 직선이다. 그러나 이런 직선적인 시간관을 가지고는 모든 것을 구로 창조하신 창조섭리가 해석되지 않는다.

종말론적 삶

과학적인 종말은 언젠가는 오겠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영원히 안 올지 모른다. 어쩌면 영원히 안 올 것이기에 영원한 진리가 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실현될 수 있는 이상은 진정한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도 역사도 끝없는 종말과 시작의 연속이다. 매 시간이 종말이요 매 시간이 시작이다. 지나간 시간은 다시 올 수 없기에 모두 종말이다. 다시 올 수 없는 시간을 살기에 책임 있게 살아야 한다. 매시간 결단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이 종말이기에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룰 수 없다. 이것이 종말론적 삶이다.

시간관은 역사관이고 존재론이다. 기계적 시간이란 없다. 사람들이 편리에 의하여 연·월·일·시를 나누었을 뿐이다. 과거는 없다. 이미 지나갔으니 없다. 미래도 없다.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있음은 지금 뿐이다. 그러니 오늘이 영원이다. 우리말에 “오늘”은 “오”(감탄사) 와 “늘”(영원) 이다. 그러니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종말이 의미 있으려면 오늘에 끌어와야 한다.

예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셨다. 천국은 가는 곳이 아니라 오는 것이다. 깨어 준비하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나는 감리교 신학을 공부하고 감리교회에서 목회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놀란 것이 있다. 한국 감리교회의 <교리적선언>에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가 천국임을 믿으며”라고 고백하고 있다.

- 노자 읽기 -

老子 15장
古之善爲士者(고지선위사자) : 도를 체득한 훌륭한 옛사람은
微妙玄通(미묘현통) : 미묘현통하여
深不可識(심불가식) :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夫唯不可識(부유불가식) : 그 깊이를 알 수 없음에
故强爲之容(고강위지용) : 굳이 형용하라 한다면
豫焉若冬涉川(예언약동섭천) : 겨울에 강을 건너듯 하고
猶兮若畏四隣(유혜약외사린) : 사방의 낯선 이웃을 대하듯 하고
儼兮其若容(엄혜기약용) : 손님처럼 어려워하고
渙兮若氷之將釋(환혜약빙지장석) : 녹으려는 얼음처럼 맺힘이 없고
敦兮其若樸(돈혜기약박) : 통나무처럼 소박하고
曠兮其若谷(광혜기약곡) : 계곡처럼 트이고
混兮其若濁(혼혜기약탁) : 흙탕물처럼 탁하다
孰能濁以靜之徐淸(숙능탁이정지서청) : 누가 능히 탁한 것을 고요히 하여 점점 맑아지게 할 수 있을까?
孰能安以久動之徐生(숙능안이구동지서생) : 누가 능히 가만히 있던 것을 움직여 생동하게 할 수 있을까?
保此道者(보차도자) : 도를 체득한 사람은
不欲盈(불욕영) : 채워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夫唯不盈(부유불영) : 채워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故能蔽不新成(고능폐불신성) : 쇠하지 않고 늘 새롭다.

중생을 계도해야 하는 막중한 소임을 맡은 이들은
도무지 말할 수 없는 것도 말로 표현해야 한다.
형상으로 만들고 그림으로 그리면 우상이 된다. 그래서 말로만 해야 한다. 그래서 유대교에는 유물이 없다. 경전만 있을 뿐이다. 이슬람교도 유물이 없다. 경전만 있을 뿐이다. 유교도 유물이 없다. 경전만 있다. 기독교도 처음에는 유물이 없었다. 그리스 문명을 만나면서 성상과 성화가 만들어졌다. 불교도 처음에는 불상이 없었다. 그리스 문명을 만나면서 불상이 만들어졌다.

성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 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했다.

철학자 하이덱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말이 아니고는 표현할 수가 없다. 말은 진리를 표현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 말을 통해서 진리가 표현되기에 나면서부터 귀머거리는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한 학습이 어려워 사람구실을 하기 어렵다. 나면서부터 소경은 삶이 불편하지만 바보는 아니다. 그러나 나면서부터 귀머거리는 벙어리, 바보이기 십상이다.

진리는 언어로 표현되고 언어로 전달되지만 언어가 진리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말을 하고 나서는 또한 “그것은 참말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중생이 그 말에 붙들리면 그 말도 우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석가는 죽음을 앞두고 “나는 한마디도 안했다”고 했다.

노자도 어쩔 수 없이 말을 한다. 글로 표현한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해야만 하기에 주춤주춤, 머뭇머뭇, 전전긍긍한다.
그래서 <노자>를 읽는 이들도 주춤주춤, 머뭇머뭇, 전전긍긍한다.

진리를 표현하는 말은 얇은 어름을 밟듯이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진리를 표현하는 말은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투박할 수밖에 없다. 선명치 못하여 마치 흙탕물 속을 보는 듯하다.

공자 말하기를 “군자는 말은 어눌하게 하고 행동은 민첩해야한다.”- 이인 24장 – 고 했다.

말이 신중하면 느릴 수밖에 없다. 용서를 구하는 말도 느릴 수밖에 없다. 어려운 부탁도 느릴 수밖에 없다. 충고하는 말도 느릴 수밖에 없다. 진실을 말하고 진리를 말하는 말도 느리고 어눌할 수 밖에 없다. 빠르고 유창하고 감상적이고 현학적인 말속에서 신실함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대기업 상품 보다는 중소기업 상품을 이용합시다.
대형유통회사 보다는 동네 가게를 이용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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