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을 천하보다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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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을 천하보다 사랑하라
  • 김홍한
  • 승인 2017.01.02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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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환란을 내 몸처럼 귀하게 여겨라

해마다 이맘때면 과거, 현재, 미래 등 時間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본래 “時”라는 것은 사찰(寺)에서 관리했다. 예배시간을 알리는 교회 종소리, 예불시간을 알리는 절의 종소리, 역시 예배시간을 알리는 모스크의 아잔소리가 그것이다. “詩”도 그렇다. 사찰(寺)에서 성직자가 하는 말이 詩다. 목사의 설교가 詩다. 스님의 설법이 詩다.

오늘날 時와 詩는 종교의 영역을 떠난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時와 詩는 여전히 종교적, 철학적 신비감을 품고 있다.

철학과 종교와 과학의 중요한 열쇠가 時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의 본질이 시간이라는 의미에서 “存在와 時間”을 이야기 했다. 기독교는 알파와 오메가, 영원을 이야기 한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보듯이 우주의 신비를 여는 열쇠가 바로 時間이다.

고대부터 인류는 미래를 알고자 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를 알고자 했겠지만 동서양의 최고 권력자들은 천문학적 미래를 알고자 했다. 온갖 학자들을 동원하여 일식과 월식을 비롯하여 별들의 움직임을 알고자 했다. 그것을 알아서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그들의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로 사용한 것이다.

중국의 경우는 황실이 책력을 만들어서 제후국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제후국은 감히 책력을 만들 수 없고 만들어서도 안 된다. 자체적으로 책력을 만들고 연호를 쓴다는 것은 자신이 직접 하늘의 뜻을 받든다는 것으로 중국 황실에 도전하는 것을 의미했다. 책력을 받는다는 것은 제후국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의 세종이 중국과는 다른 기준과 역법으로 칠정산외편을 만든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또 하나, 최고 권력자들이 갖고자 했던 것은 지도다. 천문을 앎으로 하늘의 뜻을 알고 땅을 앎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것을 의미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영류왕은 11년(628년) 당태종 이세민에게 사신을 보내어 당시 고구려의 지도인 봉역도(封域圖)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의미는 항복의 의미와 다르지 않았다. 그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연개소문이 642년 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한다. 그리고 당나라와 전쟁에 돌입한 것이다. 천문과 지리는 이렇게 최고 통치자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파악하고자 했던 것이다.

中華(중화)의 나라 중국, 참으로 오만한 나라다. 중국은 자신들만 문명의 나라이고 주변의 나라들을 모두 오랑캐로 멸시했다. 비록 힘으로는 오랑캐들에게 밀려 그들의 지배를 받는다 하더라도 문화만큼은 그들보다 훨씬 우수하다는 것을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 중국이 심각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서양인들의 과학기술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1629년 6월 21일 중국에 일식이 있었다. 명나라 조정의 역관들은 10시30분 시작하여 2시간동안 일식이 있을 것을 예측했지만 예수회 신부들은 11시 30분 시작하여 2분 동안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런데 예수회 신부들의 예측이 맞았다. 명나라 조정을 비롯하여 명나라의 지식인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오랑캐라 무시했던 이들이 천문을 정확히 읽은 것이다. 다른 자질구레한 학문이 아닌 하늘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천문학에서 중국이 서양에 뒤졌다는 것은 교황이 중국의 천자보다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의 능력을 인정한 명 조정은 예수회 신부들에게 역서의 개정 작업을 맡겼다.

- 여기서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서양선교사들이 일식을 정확히 예측해 냈다는 것은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들은 선교사일 뿐 아니라 매우 탁월한 자연과학자들이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마태오 리치는 중국의 고위인사들에게 천문학과 지리학과 수학을 가르쳤다. <천주실의>를 저작하였고 <곤여만국전도>라는 세계지도를 만들었다. 그 지도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중국인들에게는 그것도 충격이었다. 마태오 리치의 뒤를 이은이가 독일 출신 선교사 아담 샬이다. 훗날 청나라에 볼모로 붙잡혀있던 소현세자가 만난 것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그는 천문학에 뛰어났다. 아마도 위에서 말한 일식예측의 장본인일 것이다.

우리나라 개신교의 경우는 어떠할까?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경우 미국에서 신학교를 갓 졸업한 20대 초반의 어린나이에 우리 땅을 밟았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자연과학이나 인문학적 소양은 물론 신학적 깊이도 일천한 미국 대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은 근본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지적 수준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지적 수준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 -

언제부터 서양이 동양을 앞서기 시작했을까? 어떤 이들은 17세기 뉴턴의 만류인력의 발견(1687년), 명예혁명(1688년),과 권리장전(1689년)이후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18세기 제임스와트의 증기기관 발명(1765년) 및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1776년), 뒤이어 일어난 산업혁명 이후부터 서양이 동양을 앞서기 시작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서양이 동양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17세기 서양의 전투무기와 전투방법의 발달이라고 한다. 그 무력으로 서양이 동양을 침탈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 내 생각으로는 – 이미 1629년 서양 선교사들의 일식계산이 맞음으로 중국은 문화적 자존심에서 서양에 무릎을 꿇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고대에는 학문 중에 가장 신비로운 학문이 천문학이었다. 인간사의 길흉화복은 무당이나 점쟁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천문을 읽고 천문학적 미래를 예측하고 역법을 만드는 일은 무당이나 점쟁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천자의 명을 받고 국가의 지원을 받는 전문가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천문학과 역법에 관한 책들은 신비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책이 중국에서는 周易(주역)이다.

나도 한때는 주역의 河圖와 洛書, 文王八卦, 복희팔괘, 거기에 우리나라의 金一夫 선생이 그렸다는 正易八卦까지 큰 관심을 가지고 집착했었다. 특히 숫자에 특별한 무엇이 있는가 하고 집중해서 수없이 계산기를 두들겼는데 얻은 것도 있었지만 남는 것이 별로 없다. 초보적 수준의 고대인들의 천문학적 수학계산을 너무 신비감을 가지고 접근했다는 생각이 든다.
본래 주역은 미래를 예측하는 점서다. 그런데 천문학이 발달하면서 천문학적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그 권위를 상실하고 고대인들의 자연과 인간의 원리를 담은 일종의 철학만 남았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주역을 무슨 비법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수학적 연구를 하고 있음은 답답한 일이다.

천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보면 그 광대함과 그 장구함에 기가 질린다. 인간존재가 정말이지 먼지와 같고 인간의 수명이라는 것이 찰나를 사는 것과 같다. 천문학적 지식은 그대로 철학이 되고 역사학이 되고 인간학이 될 수 밖에 없다.
광대한 우주속의 숱한 별들도 생성소멸한다. 그러나 그 우주의 시간이라는 것이 너무 장구해서 찰나를 사는 인간에게는 그 운행법칙이 정해져 있는 것과 같다.

미래를 알고자 하는 것,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 중에 하나다. 미래를 알 수 있다면 권력도, 돈도, 명예도 모두 거머쥘 수 있다. 당장 내일 아침 증권시세만 알 수 있어도 거부가 될 수 있으며 선거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면 권력도 내 것이다. 인류의 미래를 알 수 있다면 대 학자라는 명예도 얻을 수 있다.
사실 거의 모든 학문은 미래학이다.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이 학문이다. 학문이 깊고 넓고 풍부할수록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다. 미래를 아는 것은 어떠한 술수나 요행수로 아는 것이 아니라 엄밀한 학문으로 아는 것이다. 술수나 요행수로 알고자 하는 것이 미신이다. 그렇게 알 수 있다고 하는 이가 사기꾼이다.

주역에 이르기를 “數往者 順, 知來者 逆(수왕자순 지래자역)”(주역, 설괘전 3장)이라 하였다. 과거의 일은 順數(순수)로 알고 미래의 일은 逆數(역수)로 안다는 것이다. 그렇다 천문학적 미래는 수학으로 알 수 있다. 경제예측도 여러 수학적 통계로 예측할 수 있다. 의학도 그렇다. 혈압, 당 수치 등 온갖 건강상태가 모두 수치로 표현된다. 그런데 주역에서는 미래를 역수로 안다고 했다. 왜 순수가 아니라 역수인가? 미래는 오는 것이다. 그래서 거슬러야 안다. 그래서 역수다.

세상은 온통 신비다. 우주의 운행이 신비다. 생명의 탄생이 신비다. 풀 한 포기가 신비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는 더더욱 신비다. 신비한 세상, 신비한 인생, 신비한 미래를 어떻게 알고 어떻게 해석할까? 그것을 알고 해석하는 비법이 없을까?

안타깝게도 비법은 없다. 뉴턴이 만류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 비법이다. 그런데 뉴턴은 그 비법을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한 것이 아니라 온 천하에 공개했다. 학문이 된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견했다. 역시 비법이다. 그도 그 비법을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한 것이 아니라 온 천하에 공개했다. 학문이 된 것이다. 의사들 중에는 질병의 원인을 알아내고 그 치료법도 알아낸 이들이 적지 않다. 역시 비법이다. 그런데 그들도 그 비법을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지 않고 온 천하에 공개했다. 예수께서는 하늘나라 비밀을 알았다. 그는 그 비밀을 혼자 간직하지 않고 온 천하에 공개했다. 공자께서도 석가께서도 역시 인간세상의 해법을 터득하신 분들이고 생·노·병·사의 비밀을 터득하신 분들이다. 그리고 그 분들은 그것을 온 천하에 공개했다. 세상에 가장 흔한 책이 성경이요 불경이요 사서삼경이다. 이렇게 심오한 진리의 가르침들이 모두 공개되었는데 무슨 다른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혹 누군가가 진리를 깨닫고 진리에 이르는 비법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분명 그것을 불쌍한 중생들에게 가르치고자 안달을 할 것이다. 결코 숨기지 않고 숨길 수도 없다. 그런데 깨달았다 하고 비법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공개하지 않고 혼자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가짜다. 공개하는 순간 가짜임이 드러나기에 공개하지 못하는 것이다.

진리는 충분히 알려졌으되 그 깊은 것을 알지 못하기에 비밀이다. 그래서 진리는 “알려진 비밀”이다.
진리는 이렇게 충분히 알려졌으되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필사적으로 알려고 하기는 고사하고 접근조차 하려 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진리를 아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피한다.

진리는 가까이 가기도 어렵고 배우기도 어렵고 가르치기는 더욱 어렵다. 진리는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라기보다는 체득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다.

실력 없는 선생의 가르침이 어렵다. 자기도 모르는 말을 하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
실력 없는 학자의 논문이 어렵다. 자기도 소화되지 않는 남들의 말들만 나열하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
실력 없고 양심 없는 의사는 작은 병도 큰 병인 것처럼 과장하고 협박하지만 정작 병 치유는 하지 못한다.
못된 성직자는 복음은 무시하고 지옥이야기, 심판이야기로 대중을 협박하고 옭아맨다.
천박한 성직자는 축복만 외쳐 된다.
평범한 성직자는 그냥 대중의 생각과 욕망을 종교적 언어로 표현할 뿐이다.

진리를 찾고, 진리를 얻고, 진리 속에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이든지 알고 보면 쉽고 알지 못하면 어려운 것, 진리도 그렇다. 모르면 안개 속이다. 그 알맹이를 알면 쉽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복음 11장-

주역 계사전에 이르기를
“易簡而天下之理(쉽고 간단한 것이 천하의 이치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道는 광대하면서도 은미하다 보통사람의 어리석음으로도 알 수 있지만 그 지극함에 이르러는 비록 聖人이라도 알지 못하는 바가 있다. 보통 사람의 부족함에도 행할 수 있음이 있지만 그 지극함에 이르러는 聖人이라도 능치 행하지 못함이 있다.” -中庸 12장-

온 우주와 온 세상이 온통 신비다. 그러나 그 신비를 밝혀줄 비법은 없다. 있다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드러나지 않은 비법, 그것은 없다. 그러니 깨어있는 이는 미혹됨이 없이 겸허하게 궁구할 뿐이다.

나이가 들면서 시간개념이 점차 선명해진다. 시간의 흐름이 피부로 느껴진다. 시간개념이 선명해 진다는 것이 철(시간)든다는 것이다. 또한 나이가 들면서 말이 詩가 된다. 성현들의 말씀은 모두 詩다. 철든 이가 성인이다. 성인이 하는 말이 예언이다.

일전에 쓴 글에 “하나님은 피라미드를 만들지 않으셨다. 球를 만드셨다.”고 했다. 피라미드는 권력의 상징이요 문명의 상징이며 상하관계가 분명한 인간사회의 상징이다. 매우 안정되고 효율적인 구조이다. 그러나 球는 반대다. 언뜻 불안해 보이지만 구야말로 최고로 안정된 구조다. 구는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 위아래가 없다. 위아래가 한 점이다. 처음과 나중이 없다. 처음과 나중이 한 점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구다. 온 우주가 다 구다. 태양이, 달이, 지구가, 온갖 천체가 다 구다. 사과도 둥글고 사람의 머리통도 둥글다. 사람도 구를 좋아한다. 축구공, 배구공, 농구공, 골프공, 탁구공, 이렇게 공 하나에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한다.

2016년 시간에 마디를 두어 정리하고 2017년 새해를 맞이했다. 시간은 흐른다. 어디를 흐를까? 球 위를 흐른다. 球 위에서는 흐르고 흘러도 그 자리가 그 자리다. 처음과 나중이 한자리고 순간이 영원이다.

- 노자 읽기 -

13장. 총욕약경
寵辱若驚(총욕약경) : 총애와 모욕을 놀란 것처럼 대하라.
貴大患若身(귀대환약신) : 큰 환란을 내 몸처럼 귀하게 여겨라.
何謂寵辱若驚(하위총욕약경) : 총욕약경이란 무엇인가?
寵爲下(총위하) : 낮아짐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得之若驚(득지약경) : 얻어도 놀란 것 같이
失之若驚(실지약경) : 잃어도 놀란 것 같이
是謂寵辱若驚(시위총욕약경) : 이것을 일러 총욕약경이라 한다.
何謂貴大患若身(하위귀대환약신) : 귀대환약신이란 무엇인가?
吾所以有大患者(오소이유대환자) : 내가 큰 환란을 당하는 까닭은
爲吾有身(위오유신) :내 몸이 있기 때문
及吾無身(급오무신) : 내 몸이 없다면
吾有何患(오유하환) : 무슨 환란이 있겠는가?
故貴以身爲天下(고귀이신위천하) : 고로 내 몸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는 사람
若可寄天下(약가기천하) : 가히 세상을 맡을 수 있고
愛以身爲天下(애이신위천하) : 내 몸을 천하보다 사랑하는 사람
若可託天下(약가탁천하) : 가히 세상을 떠맡을 수 있을 것이다

1) 貴大患若身(귀대환약신) : 큰 환란을 내 몸처럼 귀하게 여겨라.

야고보서 첫머리에서 말씀하시기를
“내 형제 여러분,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할 때 여러분은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믿음의 시련을 받으면 인내력이 생긴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인내력을 한껏 발휘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조금도 흠잡을 데 없이 완전하고도 원만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라 했다.

맹자는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내리려 하실 적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심지를 괴롭게 하고 그의 힘줄과 뼈를 수고롭게 하며, 그의 몸을 굶주리게 하고, 그 몸을 빈궁하게 하며, 그가 하는 일을 불란 시킨다. 이것은 그의 마음을 분발 시키고 성질을 참을성 있게 하여 그가 할 수 없던 일을 해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맹자 고자하 15장)라 했다.

야고보서에서는 환란을 극복함으로 완전하고도 원만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했고 맹자의 그것은 장차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 하늘이 연단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노자는 다르다. 내 몸은 천하보다도 귀한 것, 내 몸이 있기에 환란도 있는 것, 비록 환란을 당하더라도 내 몸이 있다는 것이 중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내 몸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는 사람(若可寄天下)이 세상을 맡을 수 있다(若可寄天下)고 한다.

노자의 정치관이 너무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 몸 귀한 것은 당연하지만 노자의 이러한 생각을 극단으로 발전시킨 이가 楊朱(양주)다. 양주는 말하기를 “내 몸의 털 하나를 뽑아서 온 세상이 이롭다 하더라도 나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노자의 가르침이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제 몸 귀하게 여기기를 천하만큼 하는 이에게 천하를 맡길 수는 없다. 적어도 인민들에 대한 측은지심이 발할 때는 제 몸 귀함을 잊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양주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이가 묵자다. 묵자는 말하기를 “내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를 갈아서라도 세상에 이롭다면 나는 하겠다”고 했다. 종교적 희생양의 모습이다. 양주와 묵적의 모습은 두 극단의 모습이다. 극단적인 언어는 정말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논리를 말하는 것이다.

개인이 중할까 전체가 중할까? 양주는 개인이 중하다 한다. 묵적은 전체가 중하다고 한다. 내가 군 신체검사를 받을 때의 일이다. 군대문화를 지독히 싫어한 나는 가급적 군대를 가지 않으려 했다. 그것을 눈치 챈 군의관이 말한다. “국가가 중한가 개인이 중한가?” 당시 나는 그 말을 반박할 논리도 없고 힘도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군의관의 말이 괘씸하다. 그의 말은 군부독재시대에 전체주의적, 국가주의적인 발상에 근거한 말이다. 개인은 마땅히 국가를 위해서 희생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한 말이다.
개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개인을 위해서 국가가 필요한 것이지 국가를 위해서 개인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이 모여서 국가가 되는 것이지 국가가 개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개인을 하찮게 여기는 국가라면 그런 국가는 필요가 없다. 극단적 爲我主義를 말한 양주의 말이 지도자의 자세는 분명 아니지만 결코 무시당해서는 안 될 귀한 말이다.

옛날에는 국민이 군주의 소유물처럼 여겨졌다면 오늘날에 국민 개인은 국가와 사회의 –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 부속품이다. 잘 발달된 사회 시스템은 어느 누가 갑자기 죽는다 하더라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매끄럽게 돌아간다. 개인의 가치와 정체성은 흩어진지 오래다. 이러한 때에 “내 몸을 천하보다 사랑하라”는 노자의 선언은 나의 가치와 자존심을 한없이 높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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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1일 168호 김홍한목사의 이야기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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