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순종하는 것이 행복이다
상태바
자연에 순종하는 것이 행복이다
  • 김홍한
  • 승인 2016.12.19 17: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홍한목사의 이야기 신학

행복하게 사는 법

사람은 모름지기 爽快(상쾌)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상쾌란 버리는 쾌감이다. 밥 잔뜩 먹고 상쾌하다고 하지 않는다. 좋은 옷 입고 상쾌하다고 하지 않는다. 높은 지위에서 권세 부리면서 상쾌하다고 하지 않는다. 부둥한 배를 똥 한판재기 팍 싸고서 상쾌하다고 한다. 봄이 되어 두툼한 옷을 훌훌 벗고는 상쾌하다고 한다. 높은 지위에서 전전긍긍하다가 낙향하면서 상쾌하다고 한다.


滿足(만족)의 쾌감도 그렇다. 만족이란 목구멍까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발을 채우는 것이 만족이다. 무릎도 아니고 허리도 아니라 발이다. 목구멍까지 채우려 하다가는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져도 결코 행복해 질 수 없다.

만족은 내 맘대로 되지 않지만 상쾌는 가능하다. 상쾌의 삶을 살려면 버려야 한다. 옷장의 옷을 대폭 줄인다. 책장을 비운다. 그릇장을 비운다. 장식장을 없앤다. 텔레비전을 버리고 벽을 깨끗이 한다. 이렇게 줄이고 줄이면 집도 줄일 수 있다. 자동차도 없앨 수 있으면 좋겠다. 취미생활도 중단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 소유를 단순하게 하고 삶을 단순하게 하면 공간의 여유와 함께 시간의 여유가 생기고 생각의 여유가 생긴다.
이렇게 만들어진 여유로 사람을 만난다. 그동안 멀어져 있던 사람들이 보인다. 사람이 소중해 진다. 인간관계의 질이 높아진다. 인간관계의 질은 저절로 높아지지 않는다. 나름대로 원칙을 세워야 한다. 소신과 뜻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 외에는 과감하게 정리를 해야 한다. 이런저런 잡다한 인간관계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찾는 것은 천박한 만남이다. 선한 이들과 선한 만남을 만들어야 한다. 소중한 이들, 선한 이들과 함께 살아간다면 그것이 행복 아니겠는가?

자연에 순종하는 것이 행복이다

하늘은 우리에게 모습(꼴)을 주었다. 우리에게 삶을 주어 수고롭게 하시고 늙음을 주어 물러나게 하시며 죽음을 주어 편히 쉬게 하신다.
진시황 치하에서 재상을 지낸 李斯(이사), 법가 사상가로 진나라의 중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이었으나 그는 높은 지위에 연연하여 동문수학한 한비자를 죽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지록위마의 고사로 유명한 환관 조고에 의하여 비참하게 죽었다. 그가 그 다운 말을 했다.

“가장 큰 부끄러움은 낮은 자리, 가장 큰 슬픔은 경제적 궁핍이다.”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권세와 부를 추구하고 물러설 줄 몰랐던 그의 최후는 너무나 비참했다. 현실에 집착하면 영원을 잃고 내세에 집착하면 현실이 부실해 진다. 그는 현실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현실까지도 부실해 졌다.

지위에서 물러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삶에서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한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서 가는 존재다. 그것이 자연이다. 자연현상이기에 당연한 것이다. 죽음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죽음은 순종함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죽음에 순종할 수 없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죽음이 나쁜 것이라야 피하지
죽음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닌데 왜 피하나?
하나님께 가는 중요한 관문인데 왜 피하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사람들은 “그는 행복한 삶을 살고 죽었다”고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

列子(열자)는 말했다.

살아야 할 때 사는 것은 하늘의 복이다. (可以生而生 天福也)
죽어야 할 때 죽는 것도 하늘의 복이다. (可以死而死 天福也)
살아야 할 때 살지 못함은 천벌이다. (可以生而不生 天罰也)
역시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함도 천벌이다. (可以死而不死 天罰也)
-<장자> 천도편 -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행복이다

장자는 말했다.

“물오리는 다리가 짧지만 그것을 길게 이어주면 괴로워하고 학의 다리는 길지만 그것을 짧게 잘라주면 슬퍼한다. 본래부터 긴 것을 잘라서는 안 되고 본래부터 짧은 것을 이어주어도 안 된다. 그러니 여기에 대해 근심하고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 생각건대 仁義란 사람의 참된 모습이 아니다. 저 인덕을 갖춘 사람들은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은가?” -<장자> 외편 변무 3-

장자의 말에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한편 아쉬움도 있다. 장자는 자연스러움을 이야기 하는데 그러면 사람의 자연스러움이란 무엇인가? 거름더미에서 잠자고, 흙탕물을 마시고, 덥다고 벌거벗고, 아들의 아내를 범하고, 어미를 범하고, 힘없는 노인을 걷어차는 것이 자연스러움인가? 인간은 자연을 벗어나 문명을 이루고 산다. 문명이라는 것은 인간을 짐승에서 벗어나게 했다. 이 문명이 사람을 사람 되게 한다.

맹자가 말 하는 바 仁(인)이란 측은지심이요, 義(의)란 수오지심이며, 禮(예)란 사양지심이고 智(지)란 시비지심이다. 이것을 맹자는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인간 본성이라고 했다. 이러한 선한 본성대로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장자는 학의 다리, 오리의 다리만 이야기 했어야 했다. 인간의 소중한 덕목인 仁과 義와 禮를 비판한 것은 인간을 짐승과 같이 본 것으로 무리가 있다.

절제할 줄 알면 불행하지 않다

사람은 문명을 이룸으로 어느 정도 자연과 분리되었다. 사람이 본능의 욕망대로 산다면 그 사람은 사람의 형상일 뿐 짐승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마땅히 자신의 본능과 욕망을 절제 할 줄 알아야 한다.
방종은 남들을 매우 불편하게 하고 금욕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다. 그래서 방종과 금욕은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고 사람다움도 아니다. 금욕도 아니고 방종도 아닌 절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은 사회를 이루어 함께 살아간다. 함께 살려면 자신의 욕망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지 못한 이들의 결과는 사회에서의 격리다.

붕새의 뜻을 품고 뱁새로 살자

莊子(장자)에 나오는 대붕과 뱁새의 이야기는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내용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는 면이 있다.

장자는 초나라 위왕이 자신을 재상으로 맞아들이려고 사신을 보냈을 때 사신에게 말했다.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스스로 즐길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즐겁게 살고 싶소.”
- 사마천 <사기> 노자.한비열전 중에서 -

이런 장자가 대붕과 뱁새 이야기를 한다.

“붕새가 남쪽 바다로 날아갈 때는 파도를 일으키기를 3천리, 회오리바람을 타고 오르기를 9만 리, 그런 뒤에야 6월의 대풍을 타고 남쪽으로 날아간다.... 그러니 이 조그만 날짐승들이 어떻게 대붕의 비상을 알랴,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수명은 긴 수명에 미치지 못한다.”
- <장자> 소요유 중에서 -

이 부분만 보면 대붕과 같은 장자의 큰 뜻을 뱁새 같은 세상의 소인배들은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야기는 다음 이야기다.

“뱁새가 깊은 숲 속에 둥지를 짓는다 해도 불과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고, 두더지가 강물을 마신다 해도 그 작은 배를 채우는데 불과하오. 자, 그대는 돌아가 쉬시오. 내게는 천하란 아무 소용도 없소.”
- <장자> 소요유 중에서 -

장자는 대붕으로 살지 않고 뱁새나 두더지로 살겠다는 것이다. 대붕은 그 뜻은 원대하지만 매우 불편한 삶이다. 한번 비상하기 위해서는 회오리바람을 일으켜야 하고 6월의 대풍을 기다려야 한다. 반면 뱁새는 이 가지 저 가지를 맘껏 오가는 자유로운 삶이다. 그래서 장자는 뱁새로 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뜻도 뱁새는 아니다. 뜻은 붕새의 뜻을 품고 삶은 자유로운 뱁새의 삶을 살겠다는 것이 장자다. 오히려 붕새의 뜻을 품은 사람은 뱁새의 삶을 살아야 한다. 까마득히 높은 하늘을 날며 세상을 보는 붕새에게 부와 권력을 탐하는 것은 올빼미가 썩은 쥐 움켜잡고 빼앗길까 염려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장자가 추구하는 삶이 어려운 삶일까? 붕새로 살겠다고 할 때 어려운 것이지 뱁새로 살겠다는데 무엇이 어렵겠는가?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뱁새로 살아간다. 그러나 몸은 비록 뱁새로 살지만 뜻도 뱁새로 살라는 법은 없다. 뜻은 온 우주를 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라고 하신다. 석가는 해탈 성불하라고 하신다. 공자는 군자가 되라고 하신다. 그게 대붕으로 사는 거다.

본래 하늘은 주인이 없다. 저 넓은 바다도 주인이 없다. 우주 가득히 박혀있는 저 별들도 주인이 없다. 그러니 누구든지 저 하늘을 자신의 정원 삼고 하늘 가득 별들과 휘영청 보름달을 장신구 삼아 살아 갈 수 있다.

세상의 민초들이여, 우리가 비록 뱁새로 산다 하더라도 붕새의 이상을 가지고 살자. 하나님의 자녀로 살자. 생각도 뱁새일 때 한없이 착취당하고 짓밟히는 것이지 커다란 이상을 품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 그 누구에게도 짓밟히지 않는다. 이러한 삶이 행복한 삶이 아니겠는가?

때때로 한걸음 물러나 세상을 보고 나를 보자.

시대가 악하다고 한탄하지 말라.
언제인들 악하지 않은 시대가 있었던가?
먹고살기 힘들다고 불평하지 말자.
항상 경기가 좋지 않다고 불평들을 하지만 실은 욕망을 채우지 못함에 대한 불평이다.
금년 한 해도 다사다난 했다.
대통령탄핵으로 연말이 매우 시끄럽다.
그런데
언제인들 다사다난하지 않았던 해가 있었던가?
요즘 시국을 근심과 걱정으로 볼까 아니면 희망으로 볼까?
희망으로 본다면 즐길 수 있다.

이렇게 일 년이 지나간다. 사람들은 세월에 마디를 두어 연말연시를 두었건만 자연도 그럴까?
하염없이 흐르는 저 강물은 마디가 없고
하늘을 가르는 저 바람도 마디가 없다.
강물은 흐른다. 세월도 흐른다. 역사도 흐른다. 나도 흐른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나이를 먹는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무조건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는 만큼 성숙해 지는 것은 아니다. 나이 먹는 만큼 성숙해 지자. 성숙해지면 세상사에 一喜一悲(일희일비) 하지 않고 관조할 수 있을 것이다.

- 노자 읽기 -

12장. 소박한 생활
五色令人目盲(오색령인목맹) : 화려한 색은 사람의 눈을 멀게하고
五音令人耳聾(오음령인이롱) : 아름다운 소리는 사람의 귀를 멀게 한다.
五味令人口爽(오미령인구상) : 산해진미는 맛을 잃게 한다.
馳騁畋獵令人心發狂(치빙전렵령인심발광) : 말달리기 사냥하기로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하고
難得之貨令人行妨(난득지화령인행방) : 얻기 어려운 재물로 사람의 행동이 방해 된다.
是以聖人爲腹(시이성인위복) : 성인은 배를 위하고
不爲目(불위목) : 눈을 위하지 않는다
故去彼取此(고거피취차) : 그러므로 후자는 뒤로하고 전자를 취한다

화려한 풍경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멋진 음악은 사람의 귀를 멀게 하며, 맛난 음식은 입맛을 버리게 한다. 말달리고 사냥하는 것은 사람을 미치게 하고 재물은 사람을 방자하게 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밥 먹는 것으로 만족하지 남의 이목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외적인 것을 피하고 실제를 취한다.

狂氣(광기)
馳騁畋獵令人心發狂(치빙전렵령인심발광) : 말달리기 사냥하기로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한다.

사냥을 즐기고 낚시를 즐기는 이들이 한없이 밉다.

성능 좋은 엽총의 총구가 불을 뿜고, 짐승의 몸에 탄환이 박힐 때, 꼬꾸라진 짐승의 몸에서는 피가 솟구치고 짐승은 고통의 숨을 헐떡거리며 죽어간다. 사냥꾼은 그 모습을 보면서 쾌락의 극치를 느낀다.
낚시의 짜릿한 손맛이라니, 그 손맛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물고기가 죽음의 몸부림을 치는 것을 느끼는 것 아닌가?

야! 이 저주받을 사람들아, 차라리 마약을 해라. 차라리 도박을 해라. 차라리 간음을 해라. 어찌하여 생명을 죽이고 그 죽어가는 몸부림을 즐기는가?

전장에 나가는 병사는 사람을 죽이러 가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나는 적병을 많이 죽여야 겠다’고 다짐하며 가는 병사는 없다. 전장에는 죽으러 간다. 그렇게 죽으러 가서는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전장에서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적병을 만나지 않는 것이다. 적병을 만나면 내가 죽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더 두려운 일은 내가 적병을 죽여야 하는 것이다. 내가 죽으면 다행이지만 내가 적병을 죽이는 일이 일어나면 십중팔구는 미쳐버린다. 그리고 평생을 사람구실하지 못하고 산다. 그것이 전쟁이다.

사냥을 즐기고 낚시를 즐기는 이들은 생명을 죽이는 쾌감을 최고의 쾌감으로 여기는 미치광이 들이다. 그래서 노자는 말했다. “말달려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馳騁畋獵 令人心發狂)”

인간 사냥이 허락된 상황이라면 사람 사냥의 쾌감은 짐승사냥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아마도 그 쾌감은 몇 십 곱절 더 증폭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가끔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악마를 본다. 내 딴에는 견고한 철창 속에 그 악마를 가두고 있지만 극한 상황 에서는 그 철창문이 저절로 열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다. 나도 한때는 낚시의 짜릿한 손맛에 매료된 적이 있는 미치광이였다.

명예
是以聖人爲腹(시이성인위복) : 성인은 배를 위하고
不爲目(불위목) : 눈을 위하지 않는다
故去彼取此(고거피취차) : 그러므로 후자는 뒤로하고 전자를 취한다

사람이 범하기 쉬운 가장 큰 오류 중에 하나가 바로 본질보다 명예를 더 중요시하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야 먹고살기 바빠서 명예를 따질 겨를이 없다. 그런데 ‘좀 잘났다’하는 사람들이 “후세에 아름다운 이름을 길이 남기고 싶다”고 하면서 자기이름 석자에 상당히 신경을 쓴다.

우리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은 엉터리 말이다. 인간사회에 이러한 속담이 있다는 것을 호랑이가 알면 배꼽을 잡고 웃을 일이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려고 살지를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죽을 남긴 호랑이는 사람에게 포획되어 제명대로 살지 못한 불행한 호랑이다.

이름을 남기려는 삶은 근본적으로 거짓된 삶이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성실히 감당하는 것이 참이다. 이름이 남고 안 남고는 진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별개의 것이다.

명예를 얻는 것을 큰 보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명예야 말로 허상이다. 명예는 너의 삶의 부산물로 얻어진다면 마다할 것 아니지만 일부러 명예를 얻고자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고 가증스런 일이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다보면 이름은 날 수도 있고 안날 수도 있다. 이름이 난다는 것은 나와는 관계없는 것이다. 특히 죽은 후에 이름이 나서 후세 사람들이 내 이름을 기억해 준다는 것은 후손들에게 의미 있는 일일 수 있어도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이름 내려고 사는 이들의 모습은 위선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 수재의연금 내러가면서 記者 동행하여 사진 찍는 모습이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것은 구실일 뿐이고 실은 자기 이름을 내는 데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이름나는 것을 오히려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바른 모습이다.

소위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 조차도 쉽게 넘어가는 유혹이 이름을 남기는 것이다. 살아서 이름이 나기를 원하고 죽어서도 이름을 남긴다면 그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안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허상으로서의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다.

독자여러분,
이렇게 또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격려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후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새해에는 더욱 건강하시고
더욱 행복하시길 두 손 모아 빕니다.

김홍한 올림

대기업 상품 보다는 중소기업 상품을 이용합시다.
대형유통회사 보다는 동네 가게를 이용합시다.

======================================================
대전 유성구 원내로 39번길 59 <새교회> 우)34227
☎ 010-3243-2665 E-mail: khhyhy@hanmail.net
후원계좌 / 농협 453047-52-043161 김홍한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