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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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시대
  • 김홍한
  • 승인 2016.12.01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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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혁명, 어떻게 할 것인가?

혁명의 시대

모택동이 1927년에 이런 말을 했다.

“혁명은 저녁 만찬이나 한 편의 에세이를 쓰는 것이나 그림을 그리는 것, 또는 수를 놓는 것이 아니다. 혁명은 그렇게 세련될 수도, 한가할 수도, 우아하고 절도 있고, 친절하고, 예의바르고, 자제할 수도, 관대할 수도 없다. 혁명이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전복시키는 폭력행위며 반란행위다.”


혁명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민중들에게 정치혁명은 큰 의미가 없다. 민중에게는 경제혁명이 필요하다. 물론 정치혁명과 경제혁명이 뚜렷이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혁명이 없이는 경제혁명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정치혁명이 꼭 경제혁명을 수반한다고 할 수는 없다. 정치혁명은 되었는데 경제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민중들에게 혁명은 의미가 없다.

민주주의를 말하는 이들은 누군가? 그것에 갈증을 느끼는 이들은 지식인들, 정치적 야망이 있는 이들이다. 민초들은 그런 것 모른다. 경제적 해방이 없는 민주주의는 먹을 것을 하늘로 아는 민초들과는 관계가 없다. 정치혁명으로 이익을 얻는 이들은 권력을 얻고자 하는 정객들과 큰 재물을 얻고자 하는 경제인들, 그리고 언론인들, 지식인들이 차지할 것이다.

“혁명”이라는 말은 “민주주의”, “평화”, “통일” 등의 말과 함께 거대담론이다. 거대담론은 대부분 허구다. 특히 민중과 관계없는 정치혁명이 그렇다. 정치혁명이 경제혁명으로 이어질 때 혁명은 현실이 된다.

오늘날 우리나라 상위 10%가 66%의 재화를 소유하고 있으며 하위 50%는 겨우 1.7%를 소유하고 있다. 주택보급률은 100%가 넘어 집이 남아도는데 가난한 서민들은 전세, 월세를 내고 나면 소비할 돈이 없다. 이런 엄청난 불균형에 변화를 주지 않는 혁명은 가짜다.

일전에 “대한민국 잔치는 끝났다”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 있다. 그 글에서 우리나라의 망조에 대한 가장 명백한 현상으로 출생인구가 급격하게 준다고 했다. 1971년생이 102만 명 출생으로 가장 많았다면 2000년대에 들어서는 출생자수가 50만을 넘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부하고, 아무리 권력이 있는 집안이라도 후사가 없다면 그 집안에는 소망이 없다. 지금 우리나라의 꼴이 후사 없는 집안과 같다. 망조가 들었음에 틀림없다. 출생자 수가 급격히 준 원인이 무엇인가? 젊은이들이 아기를 낳을 경제적 형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제혁명, 어떻게 할 것인가? 정치권력이 하지 못한다. 정치권력이 민주적이라 하더라도 한계가 있다. 민중이 스스로 해야 한다. 아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방법이 있다.

“대기업 상품 보다는 중소기업 상품을 이용하는 것,
대형유통회사 보다는 동네 가게를 이용하는 것.”

이것이 혁명이다. 혁명을 총칼로 하는 시대는 지났다. 이런 저런 투쟁도 아니다. 모택동이 혁명을 하던 시대에는 총과 칼로 하고 폭력과 살인으로 했겠지만 오늘날에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혁명은 일상생활로 해야 한다. 그래야 지속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 이를테면 생활협동조합과 같은 것을 조직하여 대자본에 대항할 수도 있다.

군대마귀와 돼지경제

마가복음 5장에는 군대마귀 이야기가 있다. 군대마귀의 이름이 “레기온”이라고 했다. “레기온”은 로마군단을 이르는 말이다. 마귀 들렸던 사람은 로마의 지배와 착취에 신음하던 민중을 상징한다. 돼지는 그 민중들이 먹을 양식을 빼앗아 키운 제국주의경제다. 군대마귀는 돼지를 볼모로 예수께 대항한다. 자신들을 쫓아내면 돼지 떼를 다 죽임으로 경제를 붕괴시키겠다는 협박이다. 그러나 그러한 협박은 예수께 통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돼지경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돼지경제(제국주의경제, 귀족경제, 재벌경제)가 망해야 서민경제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군대마귀가 쫓겨나고 돼지경제가 붕괴되었다. 그리고 귀신들렸던 사람, 돼지경제에 무참히도 착취당했던 민중이 제정신을 차렸다. 군대마귀를 하나님처럼 섬기고 돼지경제를 풍요로움으로 알고 있던 이들에게 두려움이 엄습한다. 군대마귀에 사로잡혀 돼지경제에 착취당하던 민중이 정신을 차렸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정신을 차렸다. 빈민이 정신을 차렸다.

깨어있는 민중만큼 두려운 존재는 없다. 역시 그 상황을 만들어낸 예수야 말로 두려운 존재다. 예수를 믿는 교회야 말로 그 일을 해야 한다. … 군대마귀와 짝하여 돼지경제를 키워온 그들은 예수께 그 지방을 떠나달라고 간청한다.

아! 오늘날 우리는 군대마귀에게 복종하고 그가 만들어낸 돼지경제 치하에서 돼지처럼 살고 있다. 군대마귀는 우리를 끊임없이 협박한다. 경제를 마비시키겠다고, 그러나 그 제국주의 경제가 망해야 서민경제가 살아난다. 삼성이 망해야 중소기업이 산다. 이마트, 홈플러스가 망해야 지역상권이 살아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성서는 돼지를 부정한 동물이라 하여 그 고기를 먹지 말라고 가르친다. 이유가 무엇일까? 나의 해석은 이렇다.
돼지는 풀을 먹지 않고 사람이 먹는 것을 먹는다. 탕자의 비유에서 돈을 다 탕진한 탕자가 먹은 것은 쥐엄나무 열매라고 했다. 쥐엄나무 열매는 돼지의 먹이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양식이다. 가장 가난한 이들이 먹는 음식을 빼앗아서 돼지에게 먹인다. 한 사람이 돼지고기를 먹기 위해서 수 십 명의 가난한 이들이 먹을 식량을 빼앗아서 돼지를 기르는 것이다. 돼지경제란 그런 것이다.

사람다움

- 나는 목수다 – 어느 날, 어떤 이가 찾아와서 작은 나무상자 하나를 만들어 달란다. 용도를 물으니 우물쭈물 말을 하지 못한다. “용도를 알아야 거기에 맞는 물건을 만들 수 있다”고 하자 어렵게 말한다. 자기 집에서 17년간 키웠던 개가 죽었는데 나무상자에 넣어서 선산에 묻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냥 묻으려 하였더니 산짐승들이 파먹으면 안 된다고 자녀들이 간청한다고 한다.

“17년이나 키웠다고요? 그러면 가족 같겠군요. 많이 서운하시겠습니다.” 하고는 정성껏 만들어 주었다. 마음이 고운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초나라 장왕(莊王)에게 애마가 한 필 있었는데, 장왕은 이를 몹시 아껴 비단옷을 입히고 화려한 집에서 기르며, 침대에서 재우고 대추와 마른고기를 먹였다. 말이 살찌는 병으로 죽자, 장왕은 신하들로 하여금 상복을 입게 하고 대부(大夫)의 예로써 장사 지내려 하였다. 신하들이 이를 앞 다투어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우맹은 이를 듣고 .... “왕께서 아끼시던 말입니다.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대부의 예로 장사 지내는 것은 박합니다. 임금의 예로 장사 지내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대왕께서 사람을 천히 여기고 말을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장왕은 우맹의 말을 듣고는 잘못을 깨닫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었다. 우맹이 답하였다. “짐승의 예로 장사 지내십시오. 부뚜막을 바깥 널로 삼고 구리 솥을 속 널로 삼아, 생강과 대추를 섞어 목란을 때어 볏짚으로 제사 지내고 타오르는 불빛으로 옷을 입혀 사람의 창자 속에 장사 지내는 것입니다.”
장왕은 말을 태관(太官)에게 맡겨, 아무도 모르게 처리하였다.
-사기 골계열전-

맹자 양혜왕 7장에는 통치자의 마음자세가 나온다. 제나라 선왕의 앞으로 제사에 쓸 소가 매우 슬픈 모습으로 끌려간다. 이를 불쌍히 여긴 왕이 양으로 바꾸라 한다. 물론 소가 아까워서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소가 불쌍해서이다. 이를 두고 맹자가 말하기를 그러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정치를 한다면 된다는 것이다.

애마를 극진히 사랑한 장왕, 제사에 쓸 소를 양으로 바꾼 제선왕의 모습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다. 장왕은 사람보다 말을 더 귀하게 여긴 듯 하고 제선왕은 값비싼 소를 값싼 양으로 바꾼 것에 불과한 듯 보인다. 그러나 비록 눈에 보이는 현상에 반응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측은히 여기는 맘은 귀한 것이다. 기본 맘이 선하면 그 맘으로 성군이 될 수 있다.

정치란, 교육이란, 문화란 사람의 선한 본성을 잘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다. 선한 본성이되 합리적이지 못하면 장왕처럼 경중을 잃는다.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 정치이고 교육이고 문화다.

사람답지 못함

그리스 신화에는 섬뜩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한다. 프로크네에게는 남편 테레우스와 사랑하는 아들 이튀스, 그리고 역시 사랑하는 동생 필로멜라가 있었다. 그런데 남편 테레우스가 필로멜라를 겁탈했다. 그리고 비밀이 새나가지 않도록 필로멜라를 가두어 두었다. 그도 모자라 혀를 잘라 벙어리로 만들었다. 갇혀있는 필로멜라는 베를 짰다. 그리고 베에 자신이 겪은 모든 이야기를 새겨 넣어 언니에게 보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프로크네는 남편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어떻게 복수할까?
그녀에게는 남편 테레우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이튀스가 있었다. 그녀는 갈등했지만 분노가 사랑을 압도했다. 그녀는 아들 이튀스의 목을 잘랐다. 그리고 사지를 발라 요리를 해서 남편 테레우스에게 먹였다. 맛있게 자신의 살을 먹은 테레우스가 아들을 찾자 그녀는 태연하게 아들의 머리를 내밀었다.
사랑보다 더 강한 것이 복수의 마음인가? 프로크네는 착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나 그 착함이 분노가 되자 그 분노는 모든 사랑을 압도한다.

아! 사람이란 어떤 존재일까? 어떤 때는 한없이 선하고 한없이 거룩하고 한없는 사랑을 베풀지만 어떤 때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니 어찌하나?

인간은 선할까 악할까?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온 질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끝나지 않은 질문이다. 그리고 영원한 질문일 것이다. 사람을 어찌 알까? 남을 아무리 뜯어보아야 소용이 없다. 자신을 분석해 보아야 한다. 자신을 아는 것이 사람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어찌 알까? 아무리 신학을 공부해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을 알려면 사람을 알아야 한다. 자신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아야하기에 사람을 알려하고, 사람을 알아야 하기에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 자신을 돌아보았더니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악이 보인다. 그 끔찍한 악마가 문득문득 고개를 들 때면 소름이 끼친다. 선하고자 하지만 선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바울선생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장)고 한탄했을 것이다.

종교의 역할도 정치의 역할도 궁극적으로는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악을 억제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종교와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도 문화도 교육도 예술도 그 요체는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주연이 아닌 조연의 눈으로...

위에서 말한 장왕이나 제선왕의 측은지심은 결코 합리적이 아니다. 눈 앞 의 측은지심에 눈이 어두워져 합리성을 잃었다.
감당할 수 없는 분노에 아들을 죽여 요리하여 남편에게 먹인 프로크네, 이 이야기를 접하는 이들은 당황하지만 프로크네를 전적으로 정죄하지 못한다. 참으로 비참한 이야기 이지만 사람에게는 “분노”라는 것도 사람다움이기 때문이다. 마땅히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찌 사람다움일까? 프로크네의 분노 자체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마땅히 분노해야할 일이다. 그런데 프로크네 이야기가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그 분노가 사랑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분노의 결과 아무런 죄가 없는 이튀스가 분노의 제물이 된 것이다.

어떤 이야기든지 주연이 있고 조연이 있다. 이 이야기에서 이튀스는 조연이다. 그래서 조연의 형편과 처지는 무시되기 일쑤이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하고 좀 더 유심히 사건을 살펴보면 조연의 형편과 처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되면 많은 경우 판단은 뒤집어 진다. 주연입장에서는 용납될 수 있었던 일도 조연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용납될 수 없다. 그 반대도 있다.

세상의 조연들이여! 우선 눈에 보이는 저 주연들의 이야기에 현혹되지 말고 조연들을 바라보자. 바로 당신들이 조연이 아니던가? 조연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조연의 입장에서 학문을 하자, 조연의 입장에서 정치적 행위를 하자. 조연의 입장에서 경제활동을 하자. 조연의 입장에서 역사를 쓰자.

- 노자 읽기 -
11장. 수레, 그릇, 방의 無用之用

三十輻共一(삼십폭공일) : 30개 바퀴살이 한 군데로 모여 바퀴를 만드는데
當其無(당기무) : 그 가운데가 비어있기 때문에
有車之用(유차지용) : 수레의 쓸모가 있다
埏埴以爲器(연식이위기) :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當其無(당기무) : 그것이 비어있기 때문에
有器之用(유기지용) : 그릇의 쓸모가 있다
鑿戶牖以爲室(착호유이위실) :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當其無(당기무) : 그것이 비어있기 때문에
有室之用(유실지용) : 방의 쓸모가 있다
故有之以爲利(고유지이위리) : 그러므로 있음은 이로움을 위한 것이지만
無之以爲用(무지이위용) : 없음은 쓸모가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이 장을 보면서 숫자 “0”. “그릇”, “밥”, “흰 바탕”이 생각난다.

숫자 “0”을 처음 사용한 것이 인도인들이라고 한다. “0”이 발견됨으로 비로소 숫자들이 제 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0”을 만남으로 모든 숫자는 “0”이 되기도 한다. “0”은 수학적 개념이면서 동시에 철학적 개념이다.

“0”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꼭 있어야 한다. 숫자가 아무리 커도 그것은 유한하지만 “0”은 그 자체로 완전하고 무한한 숫자다.

그릇에 무엇이 꽉 차 있으면 그 때는 그릇은 보이지 않고 내용물만 보인다. 周易에 이르기를 “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 라 하였다. 형이상의 道가 현상으로 나타날 때는 器라는 것이다. 器는 그릇이다. 사람들이 이 물질로서의 그릇이라는 것에 집착할까 두려워서 훗날 성리학자들은 器를 氣로 바꾸었다.

그릇(器)은 문명의 상징이다. 그래서 “文明의 利器”라 한다. 박물관에 가면 고대유물 중에는 그릇이 매우 많다. 그리고 그릇이 만들어진 시대 이전과 이후는 확연히 구별된다. 특히 고온에 구운 그릇의 출현은 인류의 문명이 획기적으로 발전되는 시기이다. 드디어 인류는 자연의 것을 가공하는 수준에서 자연에 인공을 가하여 전혀 새로운 재질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이 도자기다. 내용물이라는 것은 지나가는 것이고 그릇은 장구하다.

밥이라는 것은 참 이상하다 세상에 밥만큼 맛없는 것이 없다. 밥만 먹으면 반 그릇도 먹기 힘들다. 목에서 생목이 올라온다.

밥이라는 것은 참 이상하다. 세상에 밥만큼 맛있는 것이 없다. 밥은 평생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밥이 질리지 않는 것은 밥이 맛이 없기 때문이다. 밥은 맛이 없기에 맛이 강한 다른 음식들과 함께 먹어야 먹을 수 있다. 맛없는 밥이 있어야 그 위에 맛난 반찬을 올릴 수 있다. 맛없는 밥 없이 어찌 맛깔스런 게장이 맛을 내고 잘 익어 감칠맛 도는 김치가 맛을 낼 수 있겠는가?

흰 바탕이 주어진 다음에야 그 위에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고요함이 바탕이 되어야 거기에 아름다운 선율이 흐를 수 있다. 이 세상에 무지렁이들이 있어야 잘난 이들이 잘났다고 뽐내고 그 잘남이 잘남 될 수 있다.

“밥”의 반대말이 “꿀”이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이 꿀이다. 그래서 참 맛있는 것을 “꿀맛 같다”고 한다. 그런데 꿀은 한 숟가락 이면 족하다. 두 숟가락 퍼먹으면 벌써 입이 거부하고 속까지 달아 괴롭다.
“꿀맛 같다”는 말을 언제 쓸까? 고기 구워먹으면서 꿀 맛 같다고 하지 않는다. 고급 포도주 음미하면서 꿀맛 같다고 하지 않는다. 밥에 이것저것 넣고 숟가락으로 힘껏 비벼서 크게 한입 떠서 입에 넣고는 “꿀맛 같다”고 한다.

밥맛이 꿀맛 같을 때 살맛이 난다. 꿀 맛 같은 밥맛은 밥과 반찬의 조화로 만들어진다. 어느 하나가 많던지 적던지 하면 밥맛이 꿀맛이 안 된다.

밥을 먹기 위해서 찬을 먹을까 찬을 먹기 위해서 밥을 먹을까?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도 우리는 밥을 먹기 위해서 찬을 먹는다. 밥이 主다.

경제혁명, 어떻게 할 것인가? 정치권력이 하지 못한다. 정치권력이 민주적이라 하더라도 한계가 있다. 민중이 스스로 해야 한다. 아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방법이 있다.

“대기업 상품 보다는 중소기업 상품을 이용하는 것,
대형유통회사 보다는 동네 가게를 이용하는 것.”

이것이 혁명이다. 혁명을 총칼로 하는 시대는 지났다. 이런 저런 투쟁도 아니다. 모택동이 혁명을 하던 시대에는 총과 칼로 하고 폭력과 살인으로 했겠지만 오늘날에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혁명은 일상생활로 해야 한다. 그래야 지속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 이를테면 생활협동조합과 같은 것을 조직하여 대자본에 대항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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