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거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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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거룩하다
  • 김홍한
  • 승인 2016.11.16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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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한목사의 이야기 신학 165호



고려 중기의 문신 임춘(林椿)이 돈(엽전)을 의인화한 풍자소설 <공방전(孔方傳)>을 지었는데 그 주요내용은 이러하다.


공방은 생김새가 밖은 둥글고 구멍은 모나게 뚫렸다. 그는 때에 따라서 변통을 잘 한다... 방은 성질이 욕심이 많고 비루(卑陋)하고 염치가 없었다... 그는 돈의 본전과 이자의 경중을 다는 법을 좋아한다... 그는 백성으로 더불어 한 푼 한 리의 이익이라도 다투고, 한편 모든 물건의 값을 낮추어 곡식을 몹시 천한 존재로 만들고 딴 재물을 중하게 만들어서, 백성들이 자기들의 본업인 농업을 버리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맨 끝인 장사에 종사하게 하여 농사짓는 것을 방해했다.

방은 권세 있고 귀한 사람을 몹시 재치 있게 잘 섬겼다. 그들의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자기도 권세를 부리고 한편으로는 그들을 등에 업고 벼슬을 팔아, 승진시키고 갈아치우는 것마저도 모두 방의 손에 매이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한다 하는 공경(公卿)들까지도 모두들 절개를 굽혀 섬기게 되었다. 그는 창고에 곡식이 쌓이고 뇌물을 수없이 받아서 뇌물의 목록을 적은 문서와 증서가 산처럼 쌓여 그 수를 셀 수 없이 되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상대하는 데 잘나거나 못난 것을 관계하지 않는다. 아무리 시정 속에 있는 사람이라도 재물만 많이 가졌다면 모두 함께 사귀어 상통한다. 때로는 거리에 돌아 다니는 나쁜 소년들과도 어울려 바둑도 두고 투전도 한다. 이렇게 남과 사귀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을 보고 당시 사람들은 말했다.

"공방의 한 마디 말이 황금 백 근만 못하지 않다."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에서 귀국했다. 의천은 송나라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화폐의 유용함을 보고 와서는 그의 형 숙종에게 화폐사용 건의했다. 중국은 이미 진시황 때부터 화폐사용이 시작되어서 송나라 때에는 이미 일상생활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의천의 건의에 따라 화폐를 사용하고자 하여 은병이 통용되었다. 처음 은병은 은 함량이 정확해서 외국상인들도 선호할 정도였으나 은의 함량이 점점 낮아지는 惡貨(악화)가 되면서 은병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돈의 본질이 약속인데 그 약속이 깨진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화폐사용은 지지부진하였다. 유학을 신봉한 조선은 상업을 천시하였기 때문이다. 화폐사용을 거부한 것은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돈이라는 것은 “굶주려도 먹을 수 없고 추워도 입을 수 없는 물건”이라고 하여 쓸모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의 화폐사용은 중국은 물론 일본보다도 훨씬 늦게 되었다.

돈은 믿음이다. 돈은 소통이다.

돈은 사회적 약속이다. 약속이 붕괴될 때 돈은 가치를 상실한다. 돈은 인간사회 최대의 발명품, 신뢰를 바탕으로 엄청난 효율성을 만들어 낸다. 돈이 없는 현대사회는 상상하기 어렵다. 인간사회에서 돈의 역할은 생명체에게 물과 공기의 역할과 같다.

인간사회의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돈으로 대치될 수 있다. 그렇게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돈으로 물건을 살 수 있다. 부동산도 살 수 있다. 맛있는 음식도 사 먹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시간을 사고 노동력을 사고 재능을 삼으로 다른 이의 삶도 살 수 있다. 또한 지극히 개인적인 것도 살 수 있다. 지식을 사고 어느 정도 아름다움도 살 수 있고 허락되는 한 건강도 살 수 있으며 사랑도 살 수 있다. 그래서 돈은 인간사회의 최대의 가치가 되었다.
돈의 위력이 이렇게 대단하니 모두들 돈을 신처럼 받든다. 돈을 얻기 위해 일하고 돈을 쓰면서 산다. 돈을 많이 모으는 것이 성공이다.

돈은 권력자의 것

“이 초상과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 하고 (예수께서)물으셨다. “카이사르의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마태복음 22장)

어느 시대든지 금은 최고의 권력자에게 모인다. 이집트의 금은 모두 파라오에게 모였다. 이집트 신화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처음에 레가 말했다. 나의 피부는 순금이다.” 신과 금을 일치시킨 것이다. 페르시아에 모인 금은 마케도니아로, 다시 그 금은 로마로 모였다. 그리고 스페인을 거쳐 영국으로 오늘날에는 미국에 모여 있다.
아메리카대륙으로부터 유럽으로 흘러간 금은 돌고 돌아 결국 교회로 들어가 얘배당을 장식하는데 쓰였다. 오늘날 세계의 금은 미국의 은행에 쌓여있다. 그런 면에서 현대사회 최고의 권력자는 미국의 금융회사라 할 수 있다.

돈의 확장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금으로는 그 유통량을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 본래 금만큼의 돈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깨졌다. 금을 대신한 돈은 점점 많아졌다. 돈이 많아지는 것은 이자 때문이다. 이자만큼 돈은 계속 늘어난다. 이렇게 많아진 돈은 필요 양을 훨씬 웃돌게 되었다. 실제로 유통되는 돈은 3%에 불과하고 97%는 숫자상으로만 존재한다.

자연의 대부분은 점차로 소멸한다. 아무리 좋은 물건도 오래 사용하면 마모되고 망가진다. 그러나 돈은 점차로 불어나니 자연의 이치와 반대로 간다. 이자 때문에 부자는 점점 더 부자가 된다. 이자가 돈의 횡포다. 돈의 횡포를 파악한 이슬람교는 이자를 금한다. 그래서 이슬람 은행들은 이자를 받지 않는다. 담보물을 잡고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이 아니라 담보물을 산다. 그리고 나중에 그 사람에게 이자에 해당되는 돈을 붙여서 되판다. 형식만 다를 뿐 이자를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돈이 종교보다 힘이 세다는 증거다.

돈의 폐해를 없애려면

돈을 통제하려면 이자를 없애야 한다. 더 나아가서 돈의 자연 감소제를 실시해야 한다. 돈을 은행에 넣어두면 자연이 그러하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어야 한다. 돈을 빌린 사람들도 이자가 없으니 부채가 늘지 않아 갚을 수 있다. 은행은 수수료를 받아 운영하면 된다. 이렇게 운영하면 부실채권도 없어지고 은행의 도산이라는 것도 막을 수 있다.

돈은 위험하다.

돈은 예리한 칼과 같다. 칼은 위험하다. 악하게 사용하면 전쟁도구가 되고 살인까지 하는 흉기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칼을 없앨 수는 없다. 칼은 너무나 유용하기 때문이다.
칼은 필요에 따라 사용해야 하고 필요한 만큼만 있어야 한다. 칼이 유용하다고 많이 만들고 더욱 더 예리하게 한다면 칼은 무기가 되어 재앙을 불러온다. 돈도 그러다. 필요 이상으로 많아지면 재앙이 된다. 이야기신학 99호에 쓴 글이 있다.

“실크로드 요충지에 소구드족이 있었다. 중개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그러자 소구드족의 재물을 노리는 자들의 침략이 끊이지를 않는다. 견디지 못한 소구드족은 모든 재물을 거두어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재물을 노리는 자들의 추적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침략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다. 재물이 그들을 멸망시켰다. 재물을 생명줄처럼 거머쥐고 숨었건만 그 재물은 바람난 창부처럼 끊임없이 도적을 부른다.

감당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재물은 재앙을 불러 온다. 어디 재물뿐이겠는가? 감당할 수 없는 힘도 재앙을 불러온다. 그러니 감당할 수 없는 재물, 감당할 수 없는 권력이 다가오면 악마를 만난 듯 달아나야 한다.”

돈은 거룩하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인간이 만든 것 중에서 가장 끔찍한 것이 권좌요 가장 더러운 것이 화폐다.”고 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 (딤전 6장) 라고 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가난한 노동자가 땀 흘려 일해서 받은 돈, 그 돈으로 쌀도 사고 반찬거리도 사고 자식 놈 학교 등록금도 내고 아내의 화장품도 사는데 그 돈을 더럽다고 하는 놈이 누구냐? 그 돈이 가치 없다고 하는 놈은 도대체 누구냐? 힘 안들이고 거액을 상속받아 거들먹거릴 때 그 돈이 가치 없는 것이지 힘들게 일해서 얻은 돈은 결코 가치 없는 돈이 아니다. 남을 협박하고 속이고 등쳐서 먹은 돈이 더러운 돈이지 어떻게 노동자의 피와 땀이 밴 돈이 더러운 돈일 수 있겠는가? 갓 사회에 진출하여 받은 첫 월급을 첫 열매라 하여 온전히 헌금한 돈은 그 마음만큼이나 거룩하다. 박봉임에도 불구하고 제일먼저 십일조라고 떼어 바친 돈은 돈이 아니라 피와 살이고 생명이다. 그 돈을 받아든 목사의 손은 두려움에 떨어야 할 일이다.

돈이 갖고 있는 노동의 가치를 생각할 때 돈은 거룩하다. 그러나 돈이 만들어내는 이자는 거룩할 수 없다. 하물며 이자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이익을 위한 투기자본이 될 때 돈은 사악하다. 사람을 노예로 삼고 사람은 돈을 신처럼 섬긴다. 그 때 돈은 우상이 된다.
그러면 도대체 돈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나는 이렇게 대한다. 적은 돈은 귀하게 많은 돈은 숫자로 대한다. 많은 돈은 나와는 관계없다. 서민과도 관계없다. 많은 돈을 얻고자 하고 거기에 목숨을 걸 때 돈이 우상이 되는 것이지 일상을 살아가는 민초들에게 돈은 참 유용한 것이다.

- 노자읽기 -
10장. 德
載營魄抱一 能無離乎(재영백포일 능무리호)
專氣致柔(전기치유) 能嬰兒乎(능영아호)
滌除玄覽(척제현람) 能無疵乎(능무자호)
愛民治國(애민치국) 能無爲乎(능무위호)
天門開闔(천문개합) 能無雌乎(능무자호)
明白四達(명백사달) 能無爲乎(능무위호)
生之畜之(생지축지) 生而不有(생이불유)
爲而不恃(위이불시) 長而不宰(장이불재)
是謂玄德(시위현덕)

1)
載營魄抱一 能無離乎(재영백포일 능무리호)
몸과 맘이 분리되지 않을 수 있는가?

노자가 魂魄(혼백)을 이야기 한다. 혼백과 육체는 구별되는 것일까 구별되지 않는 것일까. 구별되지 않는다고 하면 인간이 짐승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존재다. 道니 德이니 氣니 하는 형이상학적 가치들이 근거를 잃는다. 구별된다면 혼백의 세계가 있다는 것인데 그러면 육체가 활동하는 현상계가 상대적으로 무가치해진다.
혼백의 세계라는 것은 도무지 검증이 되지를 않는다.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으니 그것이 문제다. 그래서 노자에게는 몸과 혼백이 하나이니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
우리 말 “몸”의 상대 언어가 “맘”이다. 영과 혼과 백을 맘이라는 말에 담고 싶다. 이제까지 이렇게 표현한 글을 본적이 없어 유감이지만 가장 적절한 언어라고 생각한다. 달리 표현할 방법도 없다.
“맘”이라 표현할 때 우리에게 이 말은 매우 친숙하다. 종교적인 언어,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언어일수록 우리말을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언어들은 체화되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해석되어야 할 언어로 남는다.

2)
專氣致柔(전기치유) 能嬰兒乎(능영아호)
그 기운이 부드러워 갓난아이 같을 수 있는가?

갓난 아이 만큼 부드러운 존재가 없다. 어느 누구도 갓난아기 앞에서 힘자랑 할 수 없다. 갓난아기 앞에서는 모든 힘과 권위가 무용지물이다. 갓난아기는 모든 강함을 다 빨아들인다.

3)
滌除玄覽(척제현람) 能無疵乎(능무자호)
몸과 맘을 깨끗이 닦고 맑게 하여 흠이 없을 수 있는가?

노자가 갓난아기를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정한 것은 그 본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때 묻지 않음을 말한다. 장성한 사람이 갓난아기와 같이 본능에 따라 움직이고 무능하고 무지함을 이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 그 때 묻지 않음을 이상으로 삼는 것이다. 필자는 그 모습을 백이(伯夷)에게서 본다. 孟子 말하기를

"백이는 눈으로는 부정한 것을 보지 않았고, 귀로는 부정한 소리를 듣지 않았다. 바른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았고, 바른 백성이 아니면 부리지 않았다. 세상이 바를 때에는 나아가 다스렸고, 혼란할 때에는 물러났다. 포악한 정치를 하는 조정에나 포악한 백성들이 사는 곳에는 차마 살지 않았다. … 주(紂)의 세상 때에는, 北海의 변두리에 살면서 天下가 맑아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므로 백이의 기풍을 들으면, 탐욕한 이가 청렴해지고 나약한 이가 지조를 갖게 된다.” -맹자 만장하 1장-

예수께서는 말씀 하시기를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나를 받아 들이 듯이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마태복음 18장-

사람은 그 몸이 갓난아이가 될 수는 없으되 그 맘이 갓난아이처럼 될 수는 있다. 그 갓난아이처럼 되고자 함이 滌除玄覽(척제현람/ 몸과 맘을 깨끗이 닦고 맑게) 하여 能無疵乎(능무자호/흠이 없게) 하는 것이다.

4)
愛民治國(애민치국) 能無爲乎(능무위호)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억지가 없을 수 있는가?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하였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은 것이다.-『장자』 「지락(至樂)」

새는 새가 사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 행복하듯이 백성의 삶도 백성들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백성을 사랑하는 방법도 그와 같다. 무심한 것처럼, 백성을 사랑하지 않아 마치 芻狗(추구/짚으로 만든 개)로 여기는 것처럼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도 같다. 법을 만들고 예를 정하고 성곽을 쌓고 군대를 양성하고 세금을 거두고 하는 것은 모두 백성을 괴롭히는 것, 최상의 정치는 백성들이 마치 임금이 없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無爲하는 것이다.

내가 노자를 논하지만 노자에 전적으로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감히 노자의 가르침에 反하는 이야기를 하고자한다.
노자의 愛民治國(애민치국)의 방법이 지극히 낭만적이다. 사람이란 - 그가 혹 무지한 촌부라 할지라도 - 그저 호구지책이 해결됨으로 만족하지는 않는다. 어떤 이들은 재물을 추구하고 어떤 이들은 권세를 추구하고 어떤 이들은 학문을 추구한다. 혹 어떤 이들은 거룩함을 추구하고 어떤 이들은 쾌락을 추구한다. 이런 다양한 욕구가 있는데 어찌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사는 소박한 자연의 삶만을 이상적인 삶으로 규정지을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다양한 욕구들이 서로 충돌하기에 그것을 조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역할이라도 필요하다. 또한 어떤 이들은 불행이 거듭 닥쳐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 이들을 구제할 역할도 필요하다. 無爲가 능사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현실적인 한계 때문에 노자의 가르침은 국가와 사회의 지도이념이 될 수가 없고 개인 차원에서 머물렀다. 노자의 가르침과 함께 불교의 가르침도 역시 그러하다. 불교는 근본적으로 탈세상적이기에 그러하다. 국가와 사회의 지도이념은 언제나 유가의 가르침이 주도하였다.

5)
天門開闔(천문개합) 能無雌乎(능무자호)
하늘 뜻을 행함에 어머니의 마음 같을 수 있는가?
明白四達(명백사달) 能無爲乎(능무위호)
밝은 뜻을 사방에 펼침에 억지가 없을 수 있는가?

하늘 뜻을 행함에 왜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고 어머니의 마음일까? 아버지의 마음은 장자의 바닷새 이야기에서 보듯이 노나라 임금의 마음에 가깝다. 바닷새의 형편과 처지를 고려하지 않은 자기방식의 사랑이 강한 것이다. 이에 비하여 어머니의 마음은 바닷새의 형편과 처지에 맞춘 사랑이다. 즉 孔子가 말하는 恕의 마음, 絜矩之道(혈구지도), 易地思之의 마음이다.
우리나라 조선의 성군 세종은 백성들을 위하여 아무리 좋은 제도라 생각되더라도 백성들의 의견을 묻고 또 물어서 행했다.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형편과 처지를 헤아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묻고 또 물었다. 좋은 것이라고, 선한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恕이고 絜矩之道다.

6)
生之畜之(생지축지) 生而不有(생이불유)
자식 낳고 길렀으되 내 소유가 아니다.
爲而不恃(위이불시) 長而不宰(장이불재)
공을 세우되 대가를 바라지 말라.
是謂玄德(시위현덕)
이를 일컬어 지극한 덕이라 한다.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고 소멸하는 것은 하늘과 땅과 온 천지만물의 조화속에 이루어지는 것이지 어느 하나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다. 자식도 역시 그러하건만 어리석은 이들은 자식의 태어나고 자람을 온전히 자신의 힘이라 생각한다. 역시 어리석은 농군은 곡식을 심고 거둠을 자신의 힘이라 생각한다. 역시 어리석은 이들은 역사를 이끔이 자신의 힘이라 생각한다. “나”라는 존재조차도 내 소유가 아닌데 하물며 자식일까? 하물며 사물일까? 하물며 역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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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유착을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재벌의 횡포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청년실업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거창한 경제정책을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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