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평등과 평화 '하나님 나라' 구현
상태바
복음, 평등과 평화 '하나님 나라' 구현
  • 김홍한
  • 승인 2016.11.01 10: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노자가 우리에게 하늘가는 길 알려준다

김홍한목사의 이야기 신학(2016년 11월 1일 164호)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붕괴할 것이라고 했다.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하면 중산층도 결국 대자본에 흡수됨으로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한다. 부의 양극화 속에 절대 다수의 프롤레타리아들은 마침내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가 다스리는 세상이 되면 노동량과 일치되는 임금이 지불될 것이고 모든 경제활동은 국가에 의하여 운영될 것, 그리고 궁극에는 공산주의 사회가 되는데 공산주의 사회는 계급이 없어지고 임금제는 폐지될 것이며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다. 자본가들이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적절히 대응했을 수도 있고 노동자들이 노동쟁의 등을 통하여 그들의 소득과 권리를 확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국가로서 소련이 붕괴함으로 마치 공산주의가 실패한 것으로 인식되지만 결코 그럴 수 없다. 마르크스의 예언은 여전히 유효하고 인류가 계속되는 한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예언이라는 것은 그것의 성취여부에 관계없이 마땅히 그래야하기 때문에 예언이다. 어쩌면 참 예언이란 영원히 성취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성취되는 예언이란 성취되는 순간 사라지기 때문이다.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도 반공이데올로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는 우리나라는 심한 지적 불균형상태에 있다. 특히 기독교가 그러하다. “기독교=반공” 이라는 도식은 복음을 크게 왜곡시켰다.

인간사회의 두 개의 중요한 덕목이 “자유”와 “평등”이다. 그런데 이 두 개념은 서로 상대적인 개념이다. 자유가 강조되면 평등이 깨진다. 반면 평등을 강조하면 자유가 억압된다. 소위 자본주의는 자유를 강조하고 소위 공산주의는 평등을 강조한다. 서로 강조하는 바가 다를 뿐이지 자본주의라고 평등을 외면할 수 없고 공산주의라고 자유를 외면할 수는 없다. 살기 좋은 사회란 자유와 평등이 잘 조화를 이루는 사회일 것이다.
한국기독교가 반공에 집착하면서 평등과 평화의 세상을 구현해야 할 기독교의 사명을 외면하고 천국만 외친다. 마치 그것이 기독교의 전부인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자본주의가 극성을 부리고 있는 사회다. 그래서 억지에 억지를 더하여 기독교를 자본주의화 하고 자본주의로 해석한다. 복음이 말씀하시는 평등과 평화의 “하나님 나라” 구현을 적당한 자선사업, 구제사업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두 가지가 있다. 생산수단으로서의 자본을 사유하자는 사유재산제도와 그것을 공유하자는 공산주의이다. 우리는 흔히 공산주의를 자본주의에 대립하는 이데올로기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둘 다 자본의 소유관계를 다르게 하고자 하는 자본주의의 두 모습이다.

공산주의는 종교적이다.

“강자는 약자를 끊임없이 억압하고 착취하며 약자는 끊임없이 강자에게 반항하고 투쟁 한다”는 계급투쟁의 역사, 참으로 명료하고 명쾌한 역사관이다.
언제까지 이러한 계급투쟁의 역사가 계속될 것인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고 하면 과학이고 “완전한 공산사회로 역사가 완성된다.”고 하면 종교다. 공산주의는 과학적 역사인식으로 시작하였건만 종말론적 미래를 꿈꾸었다. 그런 의미에서 공산주의는 매우 종교적이다.

공산주의는 노동자 농민이 다스리는 평등과 평화의 사회를 꿈꾸었다. 너무나도 훌륭하고 너무나도 당연한 꿈이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고 모두가 알듯이 공산주의는 종말론적 미래를 맞이하지 못하고 종말을 고했다. 아마도 평화를 위한 종교적 희생 없는 과학적 투쟁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적 이상향은 투쟁이 아니라 희생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종교적 희생이 없기에 공산주의는 종교적이되 종교는 아니다.
끊임없이 이루어야 할 것을 이미 이루었다고 했으니 거짓이다. 그래서 망했다. 그런데 아시는가? 망한 것은 제도로서의 공산주의지 이상으로서의 공산주의가 아니다. 이상으로서의 공산주의는 결코 망할 수 없다.

공산주의가 간과한 것

인간세상의 영원한 숙제가 욕망의 문제이다. 욕망은 아무리 경제가 발전해도,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채울 수 없는 원초적인 것이다.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욕망의 문제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높아지고, 많이 갖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이데올로기로 억제할 수 있겠는가? 엄청난 폭력으로 일시적으로 그리할 수는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번창한 이유는 인간의 욕망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번창했지만 역시 몰락도 그로 인해서일 것이다.

무신론자들

사유재산제도를 옹호하는 소위 자본주의자들은 인간의 능력을 무한히 확대하고자 한다. 그래서 오히려 자본주의자들은 신에 도전하려는 무신론자들이다.

오늘날 가장 자본주의적이고 가장 자본주의를 찬양하는 이들이 누구일까? 매우 흥미롭게도 “신본주의”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사용하는 이들이다. 기독교는 신본주의라고 한다.

“신본주의”라는 말은 사전에 없다. 왜 없을까? 없는 말을 “왜 없냐?”고 사전에게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혼자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신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규정할 수 없고 대상화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억지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규정하고 대상화 할 수 있다면 상품화 할 수 있다. 사람의 노동력과 토지는 나름대로 값을 정할 수 있는 상품이다. 유감이지만 지식도 상품이고 사랑도 상품이 될 수 있다. 더욱 유감인 것은 신의 은총, 신의 사랑, 구원까지도 상품화될 수 있다. 그들에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시장이다. 중세 가톨릭이 면죄부를 판매한 것이 그것이다.

“신본주의”를 말하는 자들은 신까지도 상품으로 삼는 이들이다. 감히 자신들이 신을 독점하고 신의 은총을 팔고, 복을 팔고, 구원을 팔수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다. 신을 자본주의의 상품으로 삼는 이들이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고파는 시장을 믿는다. 신본주의를 말하는 자들이 자본주의를 찬미하는 이유다.

아! 불쌍한 그들은 그러한 자신을 알지 못한다. 어디 그들뿐이랴? 너무나 많은 이들이 신을 상품화 하고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역사 이야기
교회의 거룩함과 타락함

955년 교황 요한네스12세가 18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가 어린 나이에 교황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가 로마의 가장 유력한 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권력을 탐했다. 그는 로마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기 위하여 독일국왕 오토 1세를 로마로 초빙하여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세우고(962년) 그와 정치적 동반자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방탕함과 권력남용은 오토1세 마저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오토는 그를 파면하였다.

그에 대한 기록들은 하나같이 부정적이다. 특히 성적 타락이 지나쳤다. 그의 궁전은 매음굴이 되었다고 했다. 게다가 그는 성직자의 인자함은 찾을 수가 없는 호전적인 인물이었으며 사냥과 노름과 술에 절어 살았다. 그의 말은 전혀 믿을 수가 없었는데 심심찮게 위증을 했다.
그가 교황의 자리에 있었던 기간은 9년이다. 그 기간 동안 지극히 타락한 생활을 했다. 그의 죽음도 극적이다. 어떤 유부녀와 난잡한 행위를 벌이던 와중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고도 하고 분노한 남편의 손에 맞아 죽었다고도 한다. 교황이 이렇게 타락했으니 교회의 권위가 설 리가 없다. 세속권력자들은 그를 경멸했다.

정 반대의 경우도 있다. 1073년 그리고리우스 7세가 교황으로 등극했다. 그의 선임 교황인 알렉산더 2세의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 군중들이 거의 폭동적으로 그레고리우스 7세를 성 베드로 성당으로 모셔다가 교황으로 삼은 것이다. 그만큼 그는 대중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교회가 “세상의 올바른 질서”를 창출할 책임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직자들이 거룩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일, 그래서 그는 교회를 개혁했다. 성직매매금지, 성직자 독신, 성직자들의 절대적인 복종과 순결을 요구했다. 그는 평신도들에게 말하기를 “간음을 저지르는 사제들의 미사집전을 거부하고 그들을 교회에서 추방하라”고 했다. 그의 교회 쇄신운동으로 유럽곳곳에서 자숙운동이 일어났다. 기독교의 이미지도 새로워졌다. 성직희망자도 급증했다.

교회타락의 큰 원인중 하나가 세속권력이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이었다. 황제가 자신의 시종을 교황으로 삼기도 하고 전혀 자격이 없는 이를 교황에 임명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성직임명권을 세속권력으로부터 빼앗아왔다. 그로 인한 사건이 1077년에 있었던 카놋사의 굴욕 사건이다. 황제 하인리히4세가 그에 반발하여 교황의 폐위를 선언했으나 교황은 도리어 하인리히 4세를 파문했다. 그런데 제후들이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편을 들어 황제의 폐위하고자 하자 황제는 교황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어찌하여 제후들은 교황 편을 들었을까?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따졌을 수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경건함에 머리를 숙인 것이다. 그의 경건함이 막강한 권위가 되어 황제를 무릎 꿇게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교회가 새로워지는 길

요한네스 12세와 같이 지극히 타락한 이가 교회의 수장으로 있다고 해서 교회가 모두 타락했던 것은 아니다. 반면 그레고리우스 7세와 같이 지극히 경건하고 개혁적인 이가 교회의 수장으로 있다고 해서 교회가 모두 거룩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의 수장이 어떠한 사람이냐에 따라서 교회가 멸시를 받기도 하고 존경을 받기도 한다.
교회의 권위가 크게 올라가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레고리우스 7세에 의해서 막강해진 교회권력은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는 힘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교회가 거룩하고 성직자가 경건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나 그로 인하여 부와 권력이 모이는 것은 크게 경계해야 할 일이다.

종교가 거룩해지면 사람이 모인다. 재물도 모인다. 사람이 모이고 재물이 쌓이면 권력이 된다. 그것이 종교의 타락이다. 종교가 타락하면 사람들은 방황한다.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권력자들까지도 경건한 종교인들에게는 스스로 머리 숙이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헌금하여 풍요로워 졌다하더라도 종교의 풍요로움을 아름답게 보지 않는다. 실제로 종교의 부와 권력은 타락이다. 일부러 타락하려 해서가 아니라 기왕에 얻은 부와 권력을 잃지 않고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종교가 무엇인가를 많이 소유하게 될 때 종교는 종교적 가치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가치관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종교적 진리를 유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부와 권력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교회 재산을 지키는 것이 교회를 지키는 것으로 착각한다. 종교지도자들은 신도수가 줄고 종교의 재산이 줄고 권력과 멀어짐을 종교의 쇠퇴로 간주한다.

사람이 있고 돈이 있고 힘이 있어야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한다. 세상은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종교는 반대다. 종교가 아무것도 없을 때, 순결하고 청빈하고 열정만 있을 때 종교는 종교답다. 종교가 무엇인가 많이 갖게 되었을 때, 종교는 본질에서 벗어난다. 세상으로부터는 물론이고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는다. 다 뺏기던지 다 버리던지 해서 벌거벗었을 때 다시금 종교는 종교다워진다.

교회의 부가 곧 타락이라는 것은 교회사 속에 그대로 드러난다. 베네딕트 수도회, 클뤼니 수도원, 시토수도원, 프란체스코회, 예수회, 도미니쿠스회 등의 수도회들은 참으로 경건했다. 그들은 노동, 순종, 순결, 학문적 열정 등으로 무장했다. 그들은 참으로 존경할만한 사람들이었다. 민중들은 물론 권력자들도 머리 숙이고 존경했다.
520년 베네딕트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수도사들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노동했고 선교했고 공부했다. 서로마가 멸망한 후 베네딕트 수도원은 새롭게 서로마의 주인이 된 게르만족들에게 신앙과 생활의 모범이 되었고 문명의 전달자들 이었다. 민중들은 물론 권력자들도 그들을 존경했다. 존경받을 만한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베네딕트 수도원 출신이었다. 사람들은 아낌없이 수도원에 재산을 헌납했다. 그 결과 수도원은 부요해 졌다. 그러면서 수도원은 처음의 정신이 퇴색하고 수도원은 부패하게 되었다.

그러자 910년 클뤼니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교회의 부패가 만연된 가운데 그들은 극도로 경건한 삶을 살았다. 교회의 부패를 원천적으로 막고자 모든 성직자의 독신을 표방했다. 클뤼니 수도원은 급속히 확산되었고 많은 이들이 클뤼니 수도원을 지원했다. 세력이 커진 클뤼니 수도원도 교황을 배출했다. 역시 존경받을 만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클뤼니 수도원 출신이었다. 클뤼니 수도원의 위세가 극에 달했을 때 교황이 역시 클뤼니 수도원 출신 우르반 2세였다. 그는 막강해진 교회의 힘으로 성지 예루살렘을 이교도들의 손에서 구원하자고 십자군전쟁을 시작했다. 이렇게 막강해진 교회이기에 역시 타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막강해져서 타락한 것이 아니라 막강해짐이 곧 타락이다. 수도사와 수녀들은 노동하지 않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지 않았으며 수도원에는 각종 보화들이 넘쳐났다.

그러자 1098년 새롭게 시토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21명의 수도사들이 청빈과 노동을 강조한 베네딕트의 규칙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프랑스의 시토부근에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했다. 이어서 1210년에는 프란체스코 교단, 1216년에는 도미니쿠스 교단, 1540년에는 예수회가 설립되어 활동하였다. 이 수도원의 수사들도 참으로 경건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권력이 주어졌다. 이단을 박멸하고 마녀를 색출하고 고문하고 사형에 처하는 권한이다. 그들이 권한을 남용한 것인지 정말 그렇게 믿어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열성적으로 이단박멸, 마녀색출에 몰두했다. 권력이 주어진다는 것은 곧 타락이다.

교회 타락의 본질은 교회의 부와 권력이다. 윤리적 타락은 부와 권력이 주어지면 발생하는 부산물이다. 부와 권력을 지닌 교회와 성직자는 아무리 경건하려해도 경건할 수 없고 아무리 근검절약하고 겸손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돈방석 위에서 청빈한척 하는 위선으로 본다.

그러니 한국교회가 새로워지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가난해 지는 것이다. 권력 주변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산다.

노자 읽기

9장 물러남
持而盈之(지이영지) : 넘치도록 가득 채우는 것은
不如其已(불여기이) : 그만두는 것만 못하다. * 已/ 말다, 그치다
揣而銳之(췌이예지) : 날카롭게 벼리고 갈면
不可長保(불가장보) : 오래 유지할 수 없다.
金玉滿堂(금옥만당) : 금과 옥이 집에 가득하면
莫之能守(막지능수) : 이를 지킬 수가 없다
富貴而驕(부귀이교) : 부귀로 교만해짐은
自遺其咎(자유기구) : 스스로의 허물이다.
功成名遂身退(공성명수신퇴) : 공을 이루어 이름을 얻으면 물러나는 것
天之道(천지도) : 하늘가는 길이다

높은 것은 깎아내고 낮은 것은 채우는 것이 자연이다. 예리한 것은 무디게 하고 번쩍이는 것은 흐릿하게 한다. 굵고 강한 팔과 다리, 그 굵고 강함도 세월이 흐르면 가늘고 약해진다. 황소의 숨길도, 지칠 줄 모르던 심장의 박동도 소멸되는 것이 자연이 하는 일이다.
자연에서 에너지의 근원은 태양의 강한 빛이요 생명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 산소다. 그런데 태양빛과 산소만큼 강한 파괴자도 없다. 태양빛은 힘의 원천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모든 것을 분해시킨다. 역시 산소는 모든 것을 태운다. 심지어 강한 쇠도 산소 앞에서는 속절없이 녹이 슬어 분해된다.

국가도 개인도 생성소멸 한다. 하물며 부유함과 명예일까? 부유함과 명예도 높아지면 낮추는 것이 자연이다. 자연이 낮추기 전에 스스로 낮아짐이 현명한 것, 큰 공을 세워도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현명한 것, 그것을 알면서도 사람은 부유하려 하고 높아지려한다.

노자 9장을 보면서 앞의 그들과 통하는 것이 있음을 본다. 그레고리우스 7세의 경건함과 개혁은 크게 고무적이다. 당연히 그리했어야 한다. 성직자 임명권도 찾아와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교회의 권위가 섰다. 수도원들이 경건하니 재물이 모인다. 권력도 생긴다.
재물이 생기고 권력이 생기는 것이 문제다. 거부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거부하기가 더 어렵다. 거부할 수 없다면 어찌할까? 재물은 모으지 말고 생기는 즉시 소비해야 한다. 교회당을 꾸미는데 소비할 것이 아니다. 성직자의 호화로운 생활에 쓰라는 것이 아니다. 좋은 일을 위한 기금마련도 옳지 않다. 흔적을 남기지 말고 조건도 없이 재물이 필요한 이들에게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 교회에는 재물이 남아 있으면 안 된다. 남아있으면 그것이 불행이다. 권력자들을 멀리해야 한다. 간혹 성직자들 중에 권력자들과 가까우려 하고 가까운 것을 자랑하는 이들이 있는데 천박한 이들이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믿는다는 증거다.

노자가 우리에게 하늘가는 길을 알려준다.

金玉滿堂(금옥만당) : 금과 옥이 집에 가득하면
莫之能守(막지능수) : 이를 지킬 수가 없다
富貴而驕(부귀이교) : 부귀로 교만해짐은
自遺其咎(자유기구) : 스스로의 허물이다.
功成名遂身退(공성명수신퇴) : 공을 이루어 이름을 얻으면 물러나는 것
天之道(천지도) : 하늘가는 길이다.

대기업 상품 보다는 중소기업 상품을 이용합시다.
대형유통회사 보다는 동네 가게를 이용합시다.

======================================================
대전 유성구 원내로 39번길 59 <새교회> 우)34227
☎ 010-3243-2665 E-mail: khhyhy@hanmail.net
후원계좌 / 농협 453047-52-043161 김홍한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