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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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만나자
  • 김홍한
  • 승인 2016.10.19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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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6. 163호, 김홍한목사의 이야기 신학

매일 매일 똑같은 삶이면 산 삶이 아니다. 오늘은 어제와 달라야 오늘이다. 어제도 그제도 오늘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말을 하면 고루한 사람이다. 소위 선생이라 하는 이들 중에 그런 이들이 참 많다. 되지도 않는 고루한 생각을 가지고 평생을 우려먹는다.

샘을 파야 한다. 샘을 판다는 것은 학문하는 것이다. 생각을 하는 것이다. 자신을 찾는 것이다. 샘이 터질 때 까지 파야 한다. 샘이 터지면 그것이 제 생각이고 그것이 제 말이다. 학문을 어떻게 할까? 中庸에 이르기를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고 돈독히 行하라. 배우지 않을지언정 배운다면 능하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묻지 않을 지언정 묻는다면 알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생각지 않을지언정 생각한다면 얻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분별하지 않을지언정 밝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行하지 않을지언정 行한다면 독실하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한 번에 능하면 자신은 백번을 하고 다른 사람이 10번에 능하면 자신은 천 번을 한다. 과연 이 道에 능하면 비록 우매하다 할지라도 필히 밝아지며 비록 유약하다 할지라도 필히 강해진다. - 중용 20장 -


어설피 판 샘물은 맑지 못하다. 그나마 가뭄이 들면 말라버린다. 어설피 판 샘물은 빨래나 하고 설거지나 할 물이지 마실 물이 아니다. 그러한 샘물이 고루한 가르침이다. 생명을 살리는 물이 아니라 병들게 하는 물이다. 샘을 파려면 깊이 파야한다. 맛이 좋고 마르지 않는 샘을 파야 한다.

이야기 신학 97호를 내고 8개월 정도 쉰 적이 있다. 샘이 말랐기 때문이었다. 왜 샘이 말랐을까? 학문을 게을리 해서 그렇다. 깊은 샘을 파지 못해서 그렇다. 무궁한 내용을 담은 고전과 한없이 풍부한 역사를 자료로 해서 쓰는 글인데 어떻게 글의 샘이 마를 수 있단 말인가? 틀림없이 게을러서 그렇다. 학문의 양이 적어서 그렇다. 그리고 생각이 깊지 못해서 그렇다. 생각은 씹고 또 씹는 것이다. 성현의 말씀은 씹고 또 씹어야 한다. 그래야 소화가 되고 힘이 된다. 어설픈 경전지식과 이해는 성현의 가르침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오히려 반대로 간다. 틀림없이 대중의 마음을 훔치고 현혹하는데 이용될 뿐이다.

샘물이 터진다는 것은 입장을 가진다는 말이다. 아무리 고전지식이 풍부하고 아무리 많은 역사지식이 풍부하더라도 그것을 꿰어서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다. 물줄기가 터져 나오지 못한다. 말이 터지지 못하고 글이 이어지지 못한다.

입장을 갖는 것이 먼저인지 많은 지식을 쌓는 것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어느 것에 조금 더 강조점을 둘 수는 있어도 어느 하나를 무시할 수는 없다. 입장 없이 지식만 쌓을 수는 없다. 아무리 지식을 쌓아도 남는 것이 없다. 자기 말은 한 마디도 할 수 없다.

역시 지식 없이 입장이 설 수 없다. 지식 없는 입장은 매우 위험하다. 간혹 입장은 섰는데 그것이 학문으로 검증받지 않은 이들이 있다. 그들이 홀로 즐기면 소위 “道士”소리는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쩌다 추종자들이 있다면 邪敎(사교)집단을 이루기 십상이다.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이다.

목적이 있는 학문은 학문이 아니다. 그것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이를테면 기술습득이다. 자격증 따기다. 판검사가 되기 위한 학문, 의사가 되기 위한 학문, 학위 따기 위한 학문 등은 학문이 아니다.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학문은 아무리 많이 해도 진리와는 관계가 없다. 인격과도 관계가 없다. 사람이 변화되지 못한다. 진정한 학문은 목적이 없다. 학문 자체가 목적이다.

학문의 길은 날로 더하는 것, 도의 길은 날로 덜어 내는 것

언제까지 학문을 할 것인가? 배우는 학문, 지식 쌓기 학문만을 하다보면 영원히 쌓아도 이루는 것이 없다. 학문의 양은 한계가 있고 우리가 모르는 세계는 무한하기에 그렇다. 무한한 무지의 세계에 비한다면 유한한 학문의 세계는 없는 것과 같다. 그러니 유한한 학문의 길은 아무리 쌓아도 무지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고백만이 나온다. 그러니 쌓은 학문이 질적 변화를 해야 한다. 道가 되어야 하고 信仰이 되어야 한다.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의 길을 가고자 하는 이들은 덜어낼 줄 알아야 한다. 아직 나이가 어리고, 학문이 덜 쌓이고, 수행이 덜되었을 때는 쌓아야겠지만 어느 정도 쌓이게 되면 그 다음으로는 필요 없는 것들, 군더더기들, 비본질적인 찌꺼기들을 제거해 나가야한다. 노자는 말했다.

絶學無憂(절학무우) : 배우는 일을 그만두면 근심이 없어질 것이다 - 노자 20장 -

爲學日益(위학일익) : 學하는 것은 날로 더하는 것
爲道日損(위도일손) : 道를 따르는 것은 날로 덜어 내는 것
- 노자 48장 -

노자는 “덜어내고 또 덜어내라(損之又損)”고 한다. 장자는 “잊고 또 잊으라.” 한다. 도대체 노자가 버리라는 것은 무엇이고 장자가 잊으라는 것은 무엇인가? 노자가 버리라는 것은 학문이고 장자가 잊으라는 것은 존재다.

내가 기껏 학문하여 노자를 배웠더니 노자가 말하는 것이 학문을 버리란다. 내가 학문하여 장자를 배웠더니 장자 기껏 하는 말이 지식을 폐기하라고 한다. 육체를 벗어나라고 한다. 바울선생도 비슷한 말을 했다. “내 안에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산다.” 고 했다. 내가 성경에서 길을 찾고자 성경을 꼼꼼히 살폈더니 바울선생이 하는 말이 죽으란다.

잊으라는 것, 버리라는 것, 죽으라는 것, 그것은 머리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수없이 들어서 이미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러니 이제 몸에 퍼져 삶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것이 신앙이다.

신앙의 세계, 도의 세계에서는 학문을 버려야 하는 것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잊고 버려야 할 것은 학문과 지식, 존재가 아니라 욕망이다. 욕망이 이끄는 학문을 버리라는 것이고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지식을 버리고 욕망을 추구하는 자기 존재를 버리라는 것이다. 돈에 팔리는 학문과 지식을 버리라는 것이다. 명예를 높여주는 학문과 지식을 버리라는 것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학문과 지식을 버리라는 것이다.

욕망을 금해야

소위 신심이 강하다는 이들이 자주 금식을 한다. 금식이란 가장 원초적인 욕망인 식욕을 금하는 것, 금식은 욕망을 없애는 훈련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금식의 목적이 욕망을 채우고자 함이다. “내 욕망을 채워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굶어 죽겠습니다.”가 금식이다. 금식을 하면서 욕망까지 버릴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과연 그러할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음식을 금할 것이 아니라 욕망을 금해야한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금식하는가? 끼니를 끊을 수 있을 만큼 의지가 강하다면 그 의지로 욕망을 금해야 한다.

검증받아야 할 신앙

버려야 할 것은 학문과 지식만이 아니다.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도 그렇다. 우리의 신앙은 진실이라는 예리한 칼 앞에 검증받아야 한다. 진실하지 못한 믿음은 아무리 깊어도, 아무리 간절해도 가짜다.

진실의 칼날 앞에 선다는 것은 두려움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나의 소신, 신앙, 삶이 송두리째 부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예 시도하지조차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진실의 도전을 받게 되면 심히 당황하고 벌컥 화를 내고, 매우 불쾌해 하고 철저히 자신을 방어한다. 그래서 진실의 칼날은 그 누구도 들이댈 수 없다. 오직 자기 자신과 성령님만이 진실의 칼날을 겨눌 수 있다.

“진실해라”하면 좀 막연하지만 “거짓을 버려라”하면 좀 수월하다. 거짓을 버리자, 좀 초라해지면 어떠랴? 그래야 바울선생의 말씀대로 “내 안에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는”것이 아닌가?

살자, 살아보자, 진짜 살아보자. 거짓된 내가 죽자. 거짓된 지식, 거짓된 욕망을 떨쳐 버리자. 거짓된 신앙을 포기하고 진실한 신앙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 산다.

하나님을 만나자

하나님은 절대자이시나 당신 스스로 당신을 상대화시키심으로 인간은 물론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 상대해 주신다. 우리는 오로지 상대화된 하나님만을 알고 성경은 상대화된 하나님만을 말한다.
인간들의 큰 오류, 신학의 가장 큰 오류는 자꾸 절대자 하나님을 말하려고 하는 것에 있다. 그것은 큰 착각이고 아무리 알려고 해도 공염불이다. 하나님이 절대자라면 아무리 알려 해도 알 수 없고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상대해 주실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알고 말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이 상대적 존재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깨달은 것이 과정철학, 과정신학이다.

나는 오랫동안 절대자 하나님만을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상대화된 하나님은 우상이고 허상이며 인간의 자기 투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동안 하나님은 높고 두꺼운 벽처럼 느껴졌다. 내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기도가 아니라 내 스스로에게 하는 자기암시일 뿐이었다.

“절대”를 말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상대화시키셨는데 어떻게 절대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지금도 끊임없이 당신을 상대화하여 우리에게 계시하고 계시다.

역사 이야기

삼국사기

어느 날, 고려 17대 국왕 인종이 김부식에게 말했다.

“古記는 문자도 졸렬하고 빠진 사실도 많아 임금의 선정과 잘못, 신하의 충성과 사익이며 국가의 안정과 위태로움, 인민의 순종과 반항 등이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아 교훈을 남길 수가 없소. 마땅히 재주와 학문과 식견이 있는 인재를 찾아 일가견을 세운 역사책을 만들어 영원히 물려주어 해와 별처럼 빛나게 해야겠소.”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은 삼국사기의 편찬에 착수하여 1145년 삼국사기를 완성하여 인종에게 바쳤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最古의 역사기록이요 국가가 편찬한 正史이다. 그 임금에 그 신하다. 인종은 백성을 사랑하여 근검절약하고 선정을 베풀었으며 역사정신이 있는 임금이었다. 김부식은 그에 부응할 수 있는 학식과 경륜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삼국사기는 세계 어느 나라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는 역사서다. 역사기록의 정확성, 수려한 문체, 역사기록의 입장, 예리하고 객관적인 평가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삼국사기에 대한 평가는 호의적이 아니다. 특히 근대에 이르러 민족사학자 신채호선생의 비판은 호되다.

“조선 근세에 종교나 학술이나 정치나 풍속이나 사대주의의 노예가 됨은 무슨 사건에 원인하는 것인가?... 나는 한 마디 말로 회답하여 말하기를, 고려 인종13년 서경(평양)천도 운동, 즉 묘청이 김부식에 패함이 그 원인으로 생각한다..... 그 실상은 낭가(郎家)와 불교 양가 대 유교의 싸움이며, 국풍파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묘청의 천도 운동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이겼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인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다. 만약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엄혹한 식민지시대에 초라해질 대로 초라해진 우리민족의 기상을 살리고자 고군분투했던 신채호선생의 눈에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정한 묘청은 참으로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이었고 그의 몰락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신채호선생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그의 지나친 민족의식이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의 가치를 반감시켰다. 오히려 신채호선생이 묘청의 난을 과대평가한 것은 당시의 시대 형편을 외면하고 일제강점기에 민족적 감정에 치우쳐 합리성을 상실한 것이라 생각한다.

1127년 김부식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송나라가 망해가는 모습을 목도했다. 송나라(북송)의 휘종과 흠종은 금나라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적병을 군사로서 막아야 하는데 그들은 그럴 군사가 없었다. 도교적 신비주의에 흠뻑 젖어있던 휘종과 흠종, 그리고 대신들은 호언장담하는 도사 곽경 이라는 자에게 수도 경비를 맡겼다. 군사가 아니라 도술로서 적병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결과는 비참했다. 송나라는 망하고 휘종과 흠종을 비롯한 왕족 470여명과 3천명의 대신들은 금나라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나마 흠종의 동생 조구가 간신히 남으로 도망하여 남송을 세우게 된 것이다.

송나라의 몰락을 현장에서 보고 돌아왔는데 고려의 형편은 어떠했던가? 송나라처럼 고려에도 풍수지리설과 도참설, 음양오행설 등의 신비사상이 유행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묘청과 정지상, 백수한 등이었다. 그들은 합리적 근거가 없고 믿을 수도 없는 신비적인 주장으로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자고 주장하였다. 그곳에 궁궐을 짓고 천도하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고 금나라도 저절로 항복할 것이며, 그밖에 많은 나라가 와서 조공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자신들의 주장이 먹혀들지 않자 여러 가지 술수로 뜻을 관철하려 하였으나 그나마도 어려워지자 평양을 중심으로 난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신채호 선생은 묘청과 김부식의 대립을 “낭가(郎家)와 불교 양가 대 유교의 싸움이며, 국풍파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라고 하였으나 실은 “신비주의대 합리주의”의 싸움이며 혼란한 시류에 부합하여 권력을 잡고자 하는 이들과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이들의 권력싸움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라 평하는 것은 잘못이다. 당시 김부식이 금나라를 큰 나라로 섬겼을 리는 만무하다. 그러면 송나라를 큰 나라로 섬겼겠는가? 한심하고 또 한심한 모습으로 속절없이 무너지는 송나라를 큰 나라로 섬길 수는 없다. 이런 혼란한 시대에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고 기상을 세우는 일이라는 역사의식에서 인종임금과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저술하게 된 것이다.

역사에 관심 있는 나는 요즈음 걱정거리가 하나 있다. 소위 재야사학자라 자처하는 이들 중에 민족우월주의에 경도되어 우리의 고대사를 지나치게 과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대사 주장의 사실여부에 관계없이 민족우월주의는 매우 위험하다. 힘이 없을 때는 민족주의이지만 그것은 힘이 생기면 제국주의로 돌변한다. “우리민족이 가장 우월하니 다른 민족들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인류의 발전을 위하여 열등한 민족들은 멸종시켜야 한다.”고 할 수도 있다. 과거 독일민족주의가 그랬다. 혹 국내적으로 큰 어려움이 닥치면 그 희생양으로 국내에 있는 외국인들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 일본민족주의가 그랬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외국인 이주민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몇 세대가 지나면 그들은 그냥 우리가 된다. 그런데 민족주의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들은 우리가 되지 못한다. 혹 사회적으로 큰 어려움이 닥치면 그들을 희생양 삼을 수 있다. 소름끼치도록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께서는 나라와 민족을 말씀하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다.

노자 읽기
7장. 천지(영원)

天長地久(천장지구) : 하늘과 땅은 장구하다.
天地所以能長且久者(천지소이능장차구자) : 하늘과 땅이 그러한 까닭은
以其不自生(이기부자생) :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이다
故能長生(고능장생) : 그러기에 능히 영원할 수 있다.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시이성인후기신이신선) : 그러므로 성인도 뒤에 서기에 앞서게 된다.
外其身而身存(외기신이신존) : 자기를 버리기에 자기를 보존한다
非以其無私邪(비이기무사사) : 사사로이 하지 않기에
故能成其私(고능성기사) : 오히려 자신을 이룰 수 있다.

내 사색을 결과 “목적”이라는 것은 없다. 인간이 만들어내고 인간이 꾸며낸 것들은 목적이 있을 수 있어도 자연에는 목적이 없다. 자연 그 자체가 목적이다. 천지는 무엇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제 스스로 그냥 있는 것이다. 그래서 自然이다. 그래서 장구하다.
사람도 그렇다. 무엇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있음” 그것이 목적이다.
삶도 그렇다. 사람의 삶에 목적이 있을 수 없다. “삶” 그자체가 목적이다. 만일 삶에 목적이 있다면 그 목적이 삶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인데 도대체 삶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신심이 좋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산다고 한다. 그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라”를 외치는 자들, “국가를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를 외치는 자들, “… 위하여”를 외치는 자들이야말로 지극히 위험한 자들이다. 인류의 재앙은 대부분 그렇게 만들어 졌다. 그러니 사람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 자체로서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은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다. 지극히 사람을 존중하는 이가 성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뜻은 무엇이고 하나님 나라는 무엇일까? 내 짧은 생각으로는 “먹거리가 풍부한 세상”, “욕망이 채워지는 세상”, “질병이 없고 죽지 않는 세상”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세상, 사람이 서로를 존중하는 세상이다. 그러한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이 실현되는 세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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