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장론과 산상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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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장론과 산상설교
  • 김달성
  • 승인 2016.10.18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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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주권의 전이에 달려 있다

남한의 핵무장론

최근 북한은 제 5차 핵실험을 했다. 북한은 이번 실험을 '핵탄두 폭발시험'이라고 밝혔다. 이는 미사일에 핵탄두를 싣기 위한 실험으로서 핵무기의 소형화, 표준화, 다종화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이제 단순한 핵보유 단계를 넘어 핵무기의 대량생산이 가능한 단계로 점점 나아가는 듯하다.


핵무장을 위한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는 북한에 맞서 남한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최근 다시 나오고 있다. 북한 군사비의 30배가 넘는 돈(일년에 약 40조)을 국방비로 쓰고 있는 우리가 핵무장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주로 수구, 극우세력에서 이 주장이 이전에도 종종 나왔지만 최근 그 목소리가 더욱 커지는 추세다. 일반인에게도 퍼지는 경향이 보인다. 며칠 전 애국단체총협의회와 나라사랑기독인연합 등 극우 단체들은 한국의 핵무장을 촉구하며 ‘생존을 위한 핵무장 국민연대’ 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그들은 '정부는 즉시 자위적 핵무장을 결단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해야 한다', '한국의 핵무장 선언은 자유통일을 이룩하는 시발점으로, 동맹국도 우리의 자주적 결단과 노력을 존경할 것이다.'등 핵무장을 촉구하는 입장을 내놓았다. 핵무장론은 시민단체 차원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연일 대북 강경 발언과 정책을 터트리는 정부를 지원하는 집권 여당에서도 나온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얼마전 새누리당 의원 31명은 핵무장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국민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핵은 핵으로' 대응하자는 주장이었다.

지금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핵무장은 가능한가? 우리의 핵무장은 '독자적 핵무장'과 '미국의 전술핵 배치',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모두 불가능하다고 본다. 먼저 전술핵 배치는 미국이 이미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기에 불가능한 일이다. 괌에서 핵무기를 실은 전투기가 평양까지 오는 데 2시간이면 되기에 미국은 남한에 전술핵 배치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면 남은 건 독자적 핵무장인데 그것도 불가능해 보인다. 독자적 핵무장을 하려면 풀어야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한-미 동맹을 깨야 한다. 왜냐하면 자국의 국가 이익에 매우 충실한 초강대국 미국이 우리의 핵무장을 철저히 반대하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동맹을 파기하며 미국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핵무장을 추진할 역량과 의지가 한국 국민 다수에게 과연 있는가? 없다고 본다. 또한 핵무장을 하려면 핵확산금지조약(NTP)을 탈퇴해야 한다. 우리가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려면 이 조약을 탈퇴해야 하는데 ,이 탈퇴는 곧 강력한 국제적 경제제재를 부르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 제재를 감당할 의지와 역량이 있는가? 한국의 대외무역 의존도는 90%가 넘고, 식량자급도는 고작 23% 밖에 안 된다. 스스로 자초할 국제적 왕따의 길, 불량국가의 길을 한국사회는 결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풀어야 할 문제를 더 살펴 볼 필요도 없다. 이렇게 두 가지 문제만 놓고 봐도 핵무장론의 허구성이 금방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핵무장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훤히 알 만한 사람들이 핵무장론을 버젓이 내세우는 까닭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요즘 핵무장론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무엇보다 나는 이승만과 그 추종자들의 얼굴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아울러 한국 고위공직자들의 병역면제율이 일반인의 33배나 된다는 최근 통계도 자꾸만 상기하게 된다.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고 떠벌이던 이승만은 한국전쟁이 터지자 도망가기 바빴다.6.25 전쟁이 터지자 ,평소 북진통일을 외치던 그는 혼자 대전으로 도주했다. 그리고는 대국민 방송을 했다. 국군이 서울을 잘 지키고 있으니 모두 안심하고 일상 업무에 충실하라고. 또한 도주한 이승만은 한강다리를 폭파해 버렸다. 다리 위에는 피난민들이 빼곡했지만 아무 예고도 없이 그냥 폭파했다. 서울 시민은 고립되었고, 퇴로가 막힌 국군은 큰 희생을 치뤘다. 그런데 연합군에 의해 서울이 수복되자 그는 인민군에 부역했다며 고립되었던 많은 서울 시민을 죽였다. 소위 보도연맹 사건으로도 무고한 국민 100만 명 이상을 죽인 이승만 정권은 국민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오로지 제 정권 유지,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 물건으로 보았다. 인민을 단지 그리 보고 , 취급한 건 김일성도 마찬가지다. 이승만이 북진통일이라는 망상을 가진 것처럼 김일성도 남진통일이라는 망상을 갖고 있었다. 망상은 현실을 왜곡하고 오판하게 만드는 마력을 갖고 있다. 그런 마력에 사로잡힌 사람은 사람을 얼마든지 수단, 물건으로 삼는다. 그 망상이 탐욕적 사명감과 만나면 광기를 발한다. 그 사람이 권력을 가질수록 그 폐해는 더 커진다. 김일성은 500만 명이나 죽은 한국전쟁을 일으킨 주범이 되었다. 전후 그는 제가 주도해 일으킨 전쟁의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고 자신의 우상화-신격화에 몰두했다. 김일성 정권은 미국을 원수로 설정하는 정책을 강화하고 ,그 정책을 이용하여 인민을 요리하고 압제했다.

남북한의 군사적 충돌과 전쟁은 해방 뒤 한반도 안에 두 개의 정부가 세워졌을 때 충분히 예상되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과 김일성 정권은 서로 마주보고 달리는 기차와 같았다. 이 두 기차는 결국 500만 명을 죽이는 동족상잔을 일으켰다. 그것도 모자라 두 기차는 지금도 여전히 마주 보고 내달리기만 한다. 60년이 지나 70년이 되도록 .이 내달림은 우리 민족의 자해행위다. 출혈이 너무 심하다. 분단되어 적대적 관계에 깊이 빠진 민족은 주변 강대국들에게 좋은 먹잇감이다. 우리 민족에게 허락된 축복의 기회를 잃어버린다. 가령, 미국은 한국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기를 팔아 떼돈을 번다. 6.25전쟁으로 일본은 엄청난 돈을 벌었다. 일본은 한국전쟁을 신이 내린 큰 선물이라며 깊이 감사한다. 최근 일본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사할린을 거쳐 동경까지 연장하려는 협의를 러시아와 하고 있다. 형제끼리 매일 피터지게 싸우는 집안을 어느 누가 존경하겠는가. 조롱하며 이용이나 해 먹지. 값진 살림살이나 재산 훔쳐갈 궁리나 하고.

하지만 남북 대결의 와중에 남한과 북한의 권력가들, 지배층은 혜택을 톡톡히 본다. 양쪽에는 '적대적 공생관계'를 짐짓 도모하며 엄청난 이득을 보는 세력이 있다. 갈수록 분단을 고착시키는 가운데 정치, 경제, 사회적 기득권을 강화하며 호의호식하는 무리가 있다. 북쪽은 세습왕조의 틀을 굳건히 세우고 남쪽은 세습 자본주의의 틀을 강고히 다지고 있다. 저쪽은 김일성 가족이 대를 이어 왕 노릇하고 이쪽은 돈(재벌)이 왕 노릇한다. 저쪽이 김씨왕조국가라면 이쪽은 기업국가다. 저쪽이 사회주의와 거리가 멀듯 이쪽도 자유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일반 국민의 고통은 늘어가기만 한다.1:99의 사회 ,헬조선사회로 치닫고 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를 넘어

그동안 남과 북 양쪽을 지배한 세력이 공통적으로 꼭 쥐고 있는 규범이 있다. 그 골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이다.(마 5:38) 한국전쟁 이후 수십년 간 남북한 권력자들은 대개 서로 적대하는 정책을 도모하며 펼쳐왔다. 겉으로 평화 통일을 말할 때도 있었으나 일관된 적대 정책은 변함이 없다. 그 정책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규범을 기초로 한다.그들은 이것을 국민(인민)에게 교육이나 사이비 언론(선전)매체를 통해 쉼없이 주입해 왔다.'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사고방식은 일반 국민 상당수의 핏속에 녹아들어가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 규범에 젖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 따라 형성된 사회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일은 매우 불경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때로는 집단 따돌림 당하기 십상이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그 규범에 의한 사회체계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에 따라 살기를 거부하면, 누구라도 안녕하지 못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런 사회 규범에 이의를 제기한다. 아니요! 라고 말하고 행동했다. 산 위에서 외친 말씀, 유명한 산상설교에서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을 말아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 주어라.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말아라."(마태 5:38-42)

예수께서는 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차원을 뛰어넘으라고 가르치셨을까? 그 차원으로 살면 결코 평안, 평화, 행복, 안보, 경제적 풍요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반드시 고통과 번뇌, 불안과 공포를 짊어지고 살게 되기 때문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날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과 가정은 물론 나라와 민족 그리고 세계 모두에게 시공을 뛰어넘어 적용되는 진리이다. 이 진리를 일찍이 깨달은 백범 김구는 증오와 적개심을 갖고 서로 으르렁거리는 남과 북 모두에게 경고했다.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지기 이전에 그는 이미 이렇게 설파했다.

"만일에 우리 동포들이 양극단의 길로만 돌진한다면, 앞으로 남북의 동포는 국제적 압력과 도발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동족상잔의 비참한 내전이 발생할 위험이 없지 않으며 ,재무장한 일군이 또다시 바다를 건너서 세력을 펴게 될지도 모른다."(조선일보 1948년 8월 15일)

이 경고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남한과 북한이 서로 증오와 적개심을 품고 , '강 대 강'으로 계속 맞선다면 6.25보다 더 큰 비극을 맞이할 수 있다.서로 무기경쟁을 하며 힘겨루기에 몰두하면 그 비극은 반드시 온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어디 있었나? 무슨 말을 하고 행동을 했나?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교인들의 활동은 어떠했는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를 따라 살았나, 그것을 뛰어넘어 살았나? 동족 간의 증오와 적개심을 부추기는 일을 했나, 화목을 도모하는 일을 했나? 해방 뒤 주류 한국교회는 이 땅에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정 치하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끌어안은 이승만 정권과 손잡았다. 많은 한국교회는 이제까지 동족 간의 증오와 적개심을 조장하고 부추기는 일에 적극 참여해 왔다. 탈냉전 이후 시대에도 그 성격은 여전하다.

예수의 성령은 한반도를 두루 다니며 찾고 계신다.'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를 뛰어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찾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동족 간의 대결을 조장하는 세력을 견제하는 일이다. 남과 북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도모함으로써 이득을 보는 세력을 견제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는 절실히 필요하다. 성령은 그런 사람들을 일으켜 ,전쟁 위기를 돋우고 전쟁을 도모하는 세력을 제어하도록 도우시는 활동을 하신다.

불행하게도 주류 한국교회는 성령과 매우 어긋나 있다. 예수와 하나됨을 추구하기보다 예수 이름을 이용하여 부자가 되거나 높아지기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교회는 성령을 거스른다.'칭의稱義의 복음'을 단지 내세 천국에 들어가는 허가증을 받는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함-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단지 의인이라는 신분을 얻는 게 아니라, 의의 열매(성령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의의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것까지라는 진리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생활의 방종을 허락하는 허가장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대다수는 마치 내연남을 두고 사는 여자와 같다. 예수를 믿어 예수의 신부가 되었지만 신부다운 생활은 하지 않고, 돈(맘몬)을 지극히 사랑하며 그것과 하나가 되어 살기 때문이다. 많은 목회자와 교인들은 신랑 예수 이름을 이용하여 황금송아지와 짝하고 그와 놀아난다. 하지만 예수는 결코 인간에게 이용당하시는 분이 아니다. 예수를 이용하고자하는 사람은 저주와 심판을 자초하게 된다. 내연남을 둔 교인들이 믿는 신과 메시야는 허명일 뿐이다. 인간이 만든 신일뿐이다. 기독교라는 간판을 달아놓은 곳에서 인간이 만든 신(금송아지)을 경배하며 춤추는 사람들에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를 뛰어넘는 차원의 삶을 요구하는 건 크나큰 무리다. 연목구어다.

그래도 성령께서는 증오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사람에게 쉼없이 접근하신다. 인내하시며 사람에게 임하시는 그는 '주권의 전이'(Lordship change)를 도모하신다. 인간이 자신의 마음과 삶의 주권을 바꾸어 살도록 도우신다. 진정한 칭의- 구원은 주권의 전이에 달려 있다. 마음을 지배하는 생각과 감정을 바꾸는 일은 구원의 출발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의 변화를 꾀하며 사는 사람을 견인하신다. 이제까지 잘못 산 죄를 용서하시고 새길을 열어주신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규범의 지배를 받고 살던 사람이 이제 그 규범을 마음에서 밀어내고 예수의 말씀을 좇아 산다면 그는 칭의 -구원의 은총에 들어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칭의 -구원은 '주권의 전이'라고 가르쳤다(골로새서1:13-14). 칭의란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 복음의 구원론적 표현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받으며 사는 삶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좇아 사는 삶이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차원을 넘어 살라는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

글쓴이 김달성님은 평안감리교회 목사이며, '교회에서 신을 만드는 사람들'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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