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성주는
9월에 여름 휴가를 다녀왔다. 올여름, 유별난 무더위를 피하다 보니 휴가가 늦어졌다.섭씨 40도에 육박하는 낮 기온과 열대야가 한 달 가까이 이어져 피서 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 어딜 가나 집보다 못할 것 같았다.
성주(星州)에 들렀다. 휴가 일정에 그곳을 끼웠다. 따로 시간을 내어 그곳에 갈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 정부가 성주를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지역으로 발표하기까지 나는 거기를 몰랐다. 청주에서 성장한 나는 이제까지 살면서 성주 인근의 김천, 왜관 ,칠곡, 구미, 상주 등은 알았지만 그곳은 모르고 지냈다.성주는 시가 아니라 군이다. 별고을-성주군의 전체 인구 4만 5천 명 가운데 1만 2천명 정도가 읍내에 모여 살고 있다. 애당초 사드 배치 장소로 선정한 성산은 성주 읍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아니 읍내에서 주민들과 함께 몸 부대끼며 살아가는 야산(해발 389 미터)이다. 만약 성산에 사드포대를 배치한다면 읍내는 강력한 사드 레이더의 전자파 영향권에 고스란히 들어가게 된다.
김천을 지나 성주군에 들어서자 비닐하우스가 즐비했다. 그 안에는 대개 농작물이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참외 농사를 위한 비닐하우스였다. 지금은 수확 철이 지난 시기다. 성주는 참외로 먹고 사는 동네였다. 참외 생산이 전국 생산량의 70%가 넘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비교적 부유한 농촌에 속했다. 젊은 층과 아이들도 여느 농촌보다 더 많아 보였다. 그런데 성주군 입구에서부터 읍내에 이르기까지 비닐하우스만큼이나 즐비한 것들이 또 있었다. 사드 반대 현수막이다. 김천에도 그것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지만 성주군에는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읍내 중심엔 거리마다 더 이상 걸 곳이 없을 정도로 빼곡했다.
현수막에는 성주 주민들의 생각과 주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매일 저녁, 군청 마당에서 열리는 사드반대촛불문화제에 굳이 참여하지 않아도 주민들의 생각을 충분히 알 듯했다. '성주사드배치철회투쟁위원회'를 비롯한 각종 단체와 개인들이 내걸은 주장들을 보자.
'사드 배치 결사 반대'
'참외도 기가 막혀 . 사드 배치 결사 반대'
'사드 배치 성주 지역 결사 반대한다'(성주군 기독교연합회)
'아빠, 엄마가 지켜줄 께 , 사드 절대 접근 금지'(원불교 성주교당)
'무기로 이룬 평화 없다'(성주지역 천주교회)
'전자파는 성주 죽이지만 사드는 대한민국 죽인다'
'사드 가고 평화 오라'
'한반도 평화 위협하는 사드 배치 철회하라'
'대한민국 어디에도 사드 배치 최적지는 없다'
'내년 대선 어림없다. 새누리당 반대한다'
'사드 배치 결사 반대. 대한미국이 아닌 대한민국에 살고 싶다'
'사드는 미국으로, 평화는 이 땅으로'
'일방적인 사드 배치 온몸으로 저지한다.'
'주민 동의 없는 일방적인 사드 배치. 즉각 철회하라'
'행정 절차 무시한 일방적인 사드 배치 철회하라'
'국회 동의 없는 사드 배치 철회하라'
읍내를 걸어서 돌아본 뒤 '성밖숲'에 이르렀다. 성주 읍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개천변에 있는 그곳엔 수령 300년이 넘는 왕버들 나무 50여 주가 버티고 있었다. 지난 8월 15일엔 거기서 성주 주민 900여 명이 삭발을 했다. 사드 배치 철회를 촉구하는 집단행동이었다. 왕버들 아래서 휴식을 취한 우리 일행은 저녁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매일 열리는 사드반대 촛불문화제가 두 달 가까이 열리고 있었다. 평일 저녁인데도 400여명이 촛불을 밝히고 있었다. 최근 새누리당을 탈당한 군의원 4명도 함께 했다. 사회자의 선창에 따라 주민들은 여러 가지 구호를 힘차게 외쳤다. 집회는 심각하기만 하지 않았다. 소위 민중가요보다 대중가요나 동요의 가사를 바꾸어 모두가 함께 부르거나 율동을 했다. 주민이 악기 연주나 시 낭송을 하는가 하면 자유발언들이 이어졌다. 인터넷방송을 통해 매일 생중계 되는 집회를 볼 때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집회를 마치고 읍내를 빠져나오는 동안에도 나의 눈길을 자꾸만 끄는 게 있었다. 현수막에 새겨진 글씨였다. 그것들은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여전히 살아 있었다. 팔딱 팔딱거리는 활어처럼 뛰는 그 말들 가운데 유난히 날 사로잡는 낱말이 있었다. 캄캄한 성주군을 완전히 벗어난 뒤에도.
'일방적인'
별고을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일방적인 처사에 대한 분노였다. 그들은 국가(정부)의 일방적인 결정과 집행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몸서리 치며 항거하고 있었다. 성주가 사드 배치 지역으로 결정되어 발표되는 날까지 그들은 정부로부터 그 배치에 대한 단 한마디의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사전에 형식적인 협의조차 없었던 것이다. 사드는 결코 단순한 무기체계가 아니다. 미국 육군이 만든 사드 운용 교본에 의하면 사드포대 전방엔 사람이 살 수 없다. 즉 레이더가 있는 포대 전방 3.6 킬로미터까지는(130도 각도 안에서) 사람이 살 수 없다. 그리고 사드의 레이더는 전방 1,000 킬로미터 이상 지역까지 손금을 들여다보듯 할 수 있기에 중국과 러시아가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최대 무역국인 중국은 자국의 핵심 이익을 침해하는 무기라며 사드 배치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그리고 보복을 누차 천명했다. 유사시 성주는 우선적으로 타격을 받는 지역이 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사드는 성주만이 아니라 남한 전체 주민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사안이다. 성주의 반발이 일자 최근 정부는 성산이 아닌 제 3의 부지로서 한 골프장(성산에서 12킬로미터 떨어진 )을 고려한다고 했지만 그곳은 김천 혁신도시 바로 곁으로서 주민의 생존권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건 마찬가지다. (김천도 매일 저녁 김천역 마당에서 사드반대집회를 열고 있다.)
또한 성주 주민들은 사드가 북한핵, 미사일 방어용이 아니라(사실 사드는 고고도미사일로서 북한의 저고도 단거리 미사일 앞에 무용지물이다.) 중국 견제용 미국 무기라는 사실, 그리고 사드 배치는 주변 강대국들의 고래싸움에 새우가 휘말려 들어가게 만드는 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욱 분노하고 있었다. 사드 배치는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미, 일, 한 삼각 군사동맹의 강화를 꾀함으로써 동북아시아의 신냉전체제를 조장할 것이다. 그 배치는 종미從美 사대주의 정책을 강화하고, 한-일 간 군사협력을 도모할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별고을 주민들은 자신들의 생존권과 삶의 기반이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결정과 집행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무너질 위기를 맞아 분노하고 있다. 그들은 국가안보라는 명분 뒤에 숨은 특정 세력의 사사로운 수단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이제 그들은 성주만이 아니라 국내 어디에도 사드의 배치를 반대하는 평화운동으로 나아가고 있다.
권위주의적인 정권(국가)은 일방적인 성격을 갖는다. 일방통행적인 행정 집행을 하는 정부는 폭력적이다.국가를 사적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사람(집단)이나 사사로운 정치적 야망을 위해 권력(공권력)을 능란하게 사용하는 사람이 운영하는 국가는 시민(국민)에게 폭력적이다. 자고로 정의가 없는 국가는 조직폭력배 조직만도 못하다. 더구나 정부(국가)가 독점자본의 심부름센터 역할이나 할 경우 국가는 그 자체가 흉기다. 시민의 안보나 생존에 치명적이다. 시민의 안보나 생존권을 보장하기는커녕 수탈, 착취, 억압하는 사악한 조직이 된다. 국가 안보를 흔히 내세우나 실제 그 안보는 다수의 희생을 통한 소수 집단( 특권 계층)의 안보인 경우가 많다.(참고로 최근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고위공직자들의 병역면제 비율이 일반인의 33배나 된다.) 왕왕 국익을 내세우기도 하나 그것도 알고 보면 소수 지배 계층의 이익인 경우가 흔하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요구하는 논리도 알고 보면 소수 기득권층의 이익을 위한 논리인 경우가 허다하다. ' 먼저 국가가 있고 내가 있다.' 는 말이 허구가 되지 않으려면 국가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라야 한다. 자유로운 개인(시민)이 먼저 있어야 진정한 국가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주는 그동안 권위주의적인 정권을 세우는 데 어디보다 앞장선 지역이다. 그 지역 주민은 대선이나 총선 등에서 그런 정당이나 인물에게 몰표를 몰아주었다. 뼛속까지 일방통행적인 사고방식과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나 정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온 사람들이 정부의 지극히 일방적인 정책과 그 시행에 직면해 분노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몹씨 당황스러운 일이다. 제 스스로 벼린 칼에 제가 찔려 피를 흘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격이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문화는 한국사회 전반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다. 사회 구석구석(가정, 학교, 교회 등)에 표범의 무늬처럼 새겨져 있다. 사람의 성격이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되듯 한국사회의 권위주의적인 체질은 장기간 형성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전체주의적 통치, 미군정 통치, 군사독재 통치는 우리 사회의 골격을 ,상명하복적인 군대와 주입식교육에 매진하는 학교는 피와 살을 만들어 왔다. 또한 자유시장경제를 철저히 훼손하는 재벌구조는 권위주의에 길들여진 인재를 선호한다. 이른바 '질문이 있는 교육'을 받은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사람을 대기업들은 절대 원치 않는다.우리 사회에서 개혁, 진보라고 불리우는 진영 안에도 권위주의는 깊이 못처럼 박혀있다. 지난 시기 권위주의적인 세력에 맞서 싸우면서 스스로 권위주의적인 습성을 키운 것이다. 괴물과 맞서 싸우다가 저도 모르게 괴물이 되는 수가 있는 것이다. 한편 수령주의에 입각한 전체주의 국가인 북한은 또 어떤가.3대 째 세습을 한 김씨 왕조체제인 북한의 맹독성 권위주의는 지구촌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어찌 보면 남한과 북한 모두 조선왕조시대-수직적인 권위주의 시대의 늪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 손으로 왕의 목을 자른 역사적 경험이 없는 우리 민족에게 근대화(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들의 수평적인 사회)란 아직도 먼 미래인지 모른다.
제가 자초한 고통으로 말미암아 깨달음을 얻는다면 고통도 때로는 유익이라는 생각을 한다. 성주 주민 상당수는 뜨거운 햇볕에 달궈진 아스팔트 광장이나 길 위에서 촛불을 밝히거나 시위를 하면서 분명 깨닫고 있었다. 날바닥에서 소나기를 맞으며 하는 연대 투쟁을 통해 그들은 분명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다. 일방통행적인 정권, 권위주의적인 국가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를 몸으로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그들은 언론의 정체도 차차 알아가고 있었다. 불통 정권이나 자본의 나팔수 노릇을 하는 매체와 진실을 추구하는 매체를 분별하는 지혜를 조금씩 얻어가고 있었다. 거짓과 왜곡된 정보를 대량 생산해 내는 거대 언론의 실상을 목도하며 경악하는 주민들이 많았다. 그들은 그동안 세월호사건의 진상규명조차 방해하는 세력을 대변하며 세월호 유가족들을 매도하는 언론에 놀아난 자신을 반성하고 있었다.'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선언이 현실화되려면 시민이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를 그들은 또한 알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군사주권을 스스로 포기한 권위주의적인 국가에 길들여진 국민이 아니라 깨어있는 자유로운 시민으로 거듭나는 데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도 점차 인식하고 있었다. 촛불집회에서 자유발언에 나선 어느 주민은 '내 손가락을 자르고 싶다'는 말을 했다. 주민들은 권위주의적인 정권을 세우기 위한 투표를 누누이 해온 자신을 반성하는 그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참회하는 박수를 쳤다.
지금 성주와 예수
나는 성령의 활동을 느꼈다. 선한 싸움을 하고 있는 성주 주민들 속에서 예수의 영을 감지했다. 그들은 외부의 권위주의적인 세력만이 아니라 자신 안에 박혀 있는 권위주의도 거부하고 있었다. 성령은 인간이 자신의 안과 밖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권위주의를 직시하며 그에 저항하도록 도우시는 영이시다.

'성육신成肉身'- '말씀(Logos)이 사람이 되신 사건'(요한복음1:14)은 모든 권위주의를 분쇄하는 대사건이다. 인류사에서 예수의 출현은 그 결정적인 분기점이다. 모든 권위주의를 무너뜨리는 원동력이 되는 성육신사건은 하나님의 '자기비허'自己卑虛(Kenosis)의 극치다. 사도 바울은 이 자기비허를 사도 요한보다 더 밀고 나갔다.(빌립보서2:5-11)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되 종從으로 살다가 고난까지 당했다는 데까지 밀고 나갔다. 종으로 낮아지신 예수는 다른 종들과 하나 되어 온갖 권위주의적인 세력에 저항했다. 로마제국 그리고 그에 빌붙은 이스라엘의 정치, 경제, 종교 권력가들에게 비타협적으로 맞섰다. 권위주의적인 통치가 횡행하는 세계 즉 소수가 다수를 돈과 주먹으로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정한 사랑은 종(약자, 피지배자, 소외된 자, 가난한 자)의 편에 서는 것이다. 아니 아예 종이 되는 것이다. 계급사회에서 사랑은 상대에 따라 그 얼굴이 달라진다. 예수는 권위주의적인 지배자들과 지배를 당하는 사람들을 달리 대했다. 그의 사랑 방식과 태도는 상대에 따라 사뭇 달랐다.
진정한 '권위'란 타인의 성장을 돕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사랑과 생명이신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그 사랑과 생명을 활짝 펼치며 살 수 있도록 돕는 게 참 권위다. 그러나 권위주의는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것으로서 다양한 수단과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사랑과 생명을 오히려 억압하고 짓밟는다. 특히 권위주의적 국가(정부)는 강력한 공권력을 동원해 시민들을 폭력적으로 억누르고 짓밟는다. 가부장적인 가정도 가족을 다양한 폭력(언어폭력 등)으로 억압하고 짓밟기는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스스로 높아진 기득권자들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는 교회에 들어가 의식적인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게 아니다. 그런 교회에 적을 두고 십일조를 바치며 교회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게 아니다. 북아메리카에서 원주민 3천만을 죽이는 데 앞장선 백인교회가 만들어 전해준 기독교근본주의 신학과 신앙고백을 달달 외운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건 더욱 아니다. 중남미에서 원주민 5천만을 죽인 역사를 거룩한(?) 가운으로 덮어두고 있는 천주교회에 들어가 교리공부를 하고 영세를 받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인 되는 게 아니다. 해방 뒤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의 고압적인 통치 아래서 특혜를 누리며 성장한 교회, 권위주의적인 권력과 유착된 교회에 몸을 담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게 아니다. 패권주의적인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로 각색된 거짓복음을 해외에까지 갖고 나아가 전파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게 아니다. 본질적으로 옛 이집트의 바로체제와 크게 다를 바없는 현대사회에서 노예도덕을 가르치는 교회에 길들여지는 것은 오히려 구원과 영생을 잃어버리는 첩경이다. 종교적인 포장을 한 서열문화와 상명하복적인 문화에 길들여진 목회자(교인)는 성령을 심히 거스른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마음 즉 '자기비허심自己卑虛心'을 품고 사는 사람이다.(빌립보서 2:5)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는 그 마음을 품고 사느냐에 달려 있다. 모든 주종관계가 타파된 세상-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를 마음에 모시고 그를 따르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계급사회에서 대개의 인간은 권위주의에 물들어 있다. 강자는 약자를 힘으로 통제하고, 약자는 그 강자에게 굴종하며 산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인간이 대부분이다. 돈이나 지위, 주먹이나 꾀로 남을 억누르고 으뜸이 되고자하는 욕망에서 벗어나는 길은 좁은 길이고 고통스러운 길이다. 자기비허에는 자기의 생살을 베어버리는 것과 같은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길을 기꺼이 가기로 결단하고 그 길을 예수와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다. 눈에 보이는 교회에 이름을 걸든 걸지 아니하든 간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게 중요하다. 개신교회가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칭의(以信稱義)도 그 완성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는 데 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사는 삶이다. 예수의 영은 교회 안과 밖을 넘나들며 활동하신다. 바람같은 성령은 권위주의를 타파하는 사람들 속에서 불처럼 활동하신다. 때로는 촛불처럼, 때로는 들불처럼.
나는 군사독재 시대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줄곧 병영국가 체제 안에서 주입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런 나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이나 행동을 내가 객관적으로 관찰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 권위주의적인 기질과 일방적인 성향에 절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며 절망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오늘도 나는 예수의 성령을 내 마음 중심에 초대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다음 말씀으로 내가 새로 빚어지기를 갈망하며.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5-8)
글쓴이 김달성님은 평안감리교회 목사이며, '옆구리 뚫린 아담의 기쁨'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