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 신 체험할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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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 신 체험할 필요 없다
  • 김홍한
  • 승인 2016.10.10 09: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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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한목사의 이야기 신학 162호

독자여러분 안녕하세요? 가을이 되었습니다. 두 달을 쉬고 속간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글쓰기를 하면서 생각하기를 “남들이 다 하는 이야기는 하지 말자.”였습니다. “내 이야기를 하자.”였습니다. 그리고 그간 이야기 신학을 통해서 한 말이 꽤 됩니다.


언제부터인지 내 글이 반복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게으른 것도 원인이겠지만 나의 기본 논리가 이미 다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기본 논리는 한 줌 밖에 되지를 않는데 그것 가지고 많이도 풀어먹었습니다.

복음서를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될까? 4복음서에 중복되어 기록되어 있으니 그것 정리하고 복음서 기자의 해설을 정리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얼마 되지를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양에 비한다면 내 글의 양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도 바울 보다도 많고 공자보다도 많습니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참 말을 해야지요. 그래서 유감입니다.

내가 이야기 신학을 왜 쓸까? 감히 문서선교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독자들의 신앙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혼란을 줄 수 있지요.

처음 이야기 신학을 시작한 것은 절실한 이유, 생활에 도움이 될까 해서였습니다. 새로 교회를 시작하면서 도무지 교회를 통해서는 호구지책이 될 것 같지 않아서였습니다.

나는 지금도 이야기 신학을 씁니다. 지금 쓰는 이유는 나를 위해서입니다.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이 이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인정받고 싶어서입니다. 부질없는 욕망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부질없는 욕망을 붙들고 있으면서 다른 욕망들을 많이 줄일 수 있었으니 욕망 치고는 비교적 건전한 욕망이라고 스스로 위로를 삼습니다.

5호에 게재했던 <뾰족한 돌 이야기> 라는 우화가 있습니다. 독자들이 많이 좋아하는 글입니다. 그 후속편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뾰족한 돌 이야기>를 모르는 이들을 위하여 다시 한 번 그 글을 게재하고 후속편을 게재했습니다.

뾰족한 돌 이야기

옛날, 숲 속 동물나라에 오솔길이 있었어요
그 오솔길은 아주 평평하고 편안한 길이었어요
그런데 길 한가운데에 뾰족한 돌이 하나 솟아올라 있었지요.
동물들은 편안하게 길을 가다가 그 돌에 걸려서 넘어지곤 했습니다.

어느 날, 성질 급한 멧돼지가 그 길을 가다가 걸려서 넘어졌어요
멧돼지는 화가 나서 그 돌을 힘껏 걷어 찾지요.
자기 발만 더 아팠어요 멧돼지는 투덜거리며 지나갔답니다.
어느 날, 토끼가 깡충깡충 뛰어서 길을 가다가 그 돌에 그만 코를 찧고 말았어요
토끼는 너무 아파서 엉엉 울면서 집으로 갔어요.
또 어느 날, 커다란 곰이 어슬렁어슬렁 길을 가다가 그만 그 돌을 밟았어요.
저런, 곰의 발바닥이 찢어지고 말았어요.
곰 발바닥에서는 피가 뚝뚝 흘렀어요.
곰은 다리를 절룩거리며 돌아갔어요.

이러한 일은 하루, 이틀 계속되었어요.
이러한 일은 한달, 두 달 계속되었어요.
이러한 일은 일년, 이 년 계속되었어요.
이러한 일은 백년, 이백 년 계속되었어요.
그래서 동물마을 어른들은 아기동물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게 주의를 주었어요.
“길에 있는 그 뾰족하게 튀어나온 돌을 조심하라”고....

어떤 착한 사슴이 있었어요.
그 사슴은 동물들이 그 돌에 걸려 넘어져서 다치는 것이 너무너무 마음 아팠어요.
그래서 사슴은 매일매일 그 돌이 있는 곳에 와서 살면서 지나가는 동물들에게 돌을 조심하라고 일러주었어요.
동물들은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지나갔지요.
온 동물마을에 착한 사슴 소문이 쫙 퍼졌어요.
그래서 동물마을 시장님이 착한 사슴에게 표창장을 주었어요.
그리고 착한 사슴은 눈이오나 비가 오나 그 돌 옆에 앉아서 지나가는 동물들이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지요.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 그 착한 사슴도 할아버지가 되었어요.
어쩌다 사슴할아버지가 동물마을에 내려오면 동물들은 모두 절을 하며 사슴할아버지를 존경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먼 나라에서 한 나그네가 동물마을에 나타났어요.
그 나그네는 남루한 옷차림에 매우 지친 표정이었지요.
그 나그네도 그 숲 속 길을 걷게 되었어요.
한참을 걷다가 돌 있는 곳에 다다랐어요.
그러자 사슴할아버지가 소리쳤어요.
“돌을 조심하세요, 너무나 많은 동물들이 그 돌에 걸려 넘어져 다쳤답니다.”
나그네는 사슴할아버지에게 물었어요.
“당신은 왜 여기에 앉아있지요?”
사슴이 대답했어요.
“그야 동물들이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지요, 아주 옛날부터 수많은 동물들이 이 돌에 걸려 넘어져 다쳤답니다.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요. 그런데 내가 이곳에 앉아 주의를 준 이후로는 어느 누구도 넘어져 다치지 않았답니다” 하며 자랑스럽게 말했어요.

나그네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얼마 후 나그네는 다시 그 자리에 나타났어요. 손에는 쇠망치가 들려 있었지요.
나그네는 쇠망치로 돌을 쪼기 시작했어요.
“쿵, 쾅, 쿵, 쾅”
그 소리를 듣고 숲 속 나라 동물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잠시 후 뾰족한 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동물들을 괴롭혀온 그 돌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었어요.

그런데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기쁘고 즐거워해야 할 동물들이 그 나그네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어요.
특히 사슴할아버지는 매우 분해하면서 소리쳤어요.
“저놈을 잡아라, 저놈이 우리의 신성한 돌을 깨뜨렸다 !”.
그 소리와 함께 동물들은 다 같이 우르르 나그네에게 달려들어 마구 때렸어요.
나그네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어요.
동물들은 나그네를 마을 밖으로 내다 버렸지요.
나그네는 큰 슬픔에 잠겨서 그 마을을 떠났습니다.

나그네가 떠나고 난 후 사슴할아버지는 동물들을 모아놓고 말했습니다.
“어서 빨리 전에 것보다 더 크고 뾰족한 돌을 구해다가 그곳에 다시 두어야 합니다…”
동물들은 사슴할아버지의 말대로 더 크고 더 뾰족한 돌을 가져다가 그곳에 두었습니다.
사슴할아버지는 다시 그곳에 자리 잡고 앉아서 지나가는 동물들에게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시오”하며 말했습니다.
그 할아버지의 손자, 그 손자의 또 손자, 그 손자의 손자의 손자가 오늘날에도 그 길에 앉아있습니다.
그리고 지나는 동물들에게 말합니다.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시오”.

* 기독교가 뾰족한 돌이 아니기를, 기독교 성직자가 사슴할아버지가 아니기를 바라면서 ….

<뾰족한 돌 이야기> 후속편

“가증스럽습니다. 어찌하여 그곳에 더 크고 더 뾰족한 돌을 가져다 두셨습니까?”

“필요악이라는 것을 아는가?”

“종교가 악이라는 것입니까?”

“종교가 선인지 악인지를 모르겠으나 필요한 것은 분명하지.”

“분명히 말씀해 주십시오. 어찌하여 그곳에 더 크고 뾰족한 돌을 가져다 두셨습니까?”

“우리들은 고마운 존재를 섬기지 않아. 두려운 존재를 섬기지.
뾰족한 돌은 두려운 존재야 그래서 섬기지.
그런데 두려워서 섬긴다고 하면 그것은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닌가? 그래서 거기에다가 신성성을 부여했지.
두렵고 신성한 것은 꼭 필요하네, 그것이 우리들을 윤리적으로 만들고 하나로 만들지. 그것이 없다면 인간사회는 범죄로 가득하고 사분오열 되어 서로를 죽이고 우리들이 사는 이 숲은 파멸에 이르고 말 것일세.”

“뾰족한 돌을 제거한 그 나그네는 어떤 분입니까? 그분이야 말로 진정한 우리의 구원자 아닌가요?”

“짧은 생각이네 뾰족한 돌은 결코 제거할 수가 없네, 제거할 수도 없고 제거해서도 안 되지. 그것은 신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라네. 그것을 제거하려는 것이 바로 신에게 도전하는 것이고 신성모독이지.”

“너무 우습군요. 뾰족한 돌을 신의 선물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성하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우상이고 신성모독 아닙니까?”

“자네 뾰족한 돌이 정말 뾰족한 돌이라고 생각하나? 그게 돌이면 어떻고 나무면 어떠하며 무서운 맹수면 어떤가? 벼락이나 폭풍, 지진, 해일 같은 무시무시한 자연현상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오늘날은 고도로 발달한 이성의 시대야. 그런 자연현상은 더 이상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야. 오히려 오늘날 우리들에게 뾰족한 돌은 핵무기라고 하면 더 적합하겠네. 그런데 사실은 그것도 아니야. 진정한 뾰족한 돌은 우리 안에 들어있는 불안과 공포야.”

“불안과 공포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공포는 대상이야.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이 나에게 큰 고통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공포지. 공포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것을 제거 하던지 그것으로부터 아주 멀리 도망치는 것이야. 나그네는 뾰족한 돌을 공포로 보았어. 그런데 그는 매우 용기 있는 사람이야. 도망치지도 피하지도 않고 그것을 제거해 버렸거든. 그런데 그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제는 불안이야. 불안은 대상이 아니거든. 그것 자체가 불안이야. 불안이야말로 사람을 견딜 수 없게 만든다.”

“대상이 아니다?, 그러면 불안을 극복할 방법이 없단 말입니까?”

“있지.”

“무엇입니까?”

“간단해. 불안을 공포로 바꾸는 거야. 그것이 내가 뾰족한 돌을 다시 만들어 세운 이유지.”

“그래서 필요악이라는 것인가요?”

“그렇지. 감당할 수 없는 불안을 감당할 수 있는 공포로 바꾼 것이지. 공포는 통제가 가능하거든.
사람들은 뾰족한 돌을 두려워하지. 그래서 도망하던지 피하던지 하지. 간혹 그 나그네처럼 제거하려는 이들도 있고. 그렇지만 나는 그 뾰족한 돌을 두려워하지 않아. 도망하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고 굳이 제거하려고 하지도 않아. 그저 친근하게 옆에 앉아있지. 그것을 내가 만들었거든.”

“인류의 가장 큰 위험이 무엇인줄 아는가? 바로 그 나그네야. 우리가 애써서 불안을 공포로 바꾸어 놓았는데 그 공포를 제거하려는 그 나그네 말이야. 그런 자들이 거듭거듭 나타난다면 그것이야말로 인류의 재앙이지. 사람들은 그를 영웅으로 알지만 말이야.”

“결국 사람들이 뾰족한 돌의 실체를 알 날이 올 것 아닙니까?”

“오겠지. 이미 알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네. 그러나 상관없어. 아는 이들은 그 필요성도 아니까.”

“아! 내 안에 분노가 일어납니다.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사람들을 농락하나요. 당신은 감히 신의 역할을 하는군요. 신이 두렵지 않습니까?”

“신이 두렵냐고? 두렵지. 보통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그 두려움은 나도 느끼고 있다네. 그러나 뾰족한 돌 건으로는 두렵지 않네. 나는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거든. 죄가 있을 때 신이 두려운 것 아니겠나?”

“당신은 양심은 물론 영혼조차 타락했군요. 신이 두렵지 않느냐고 물은 것을 취소합니다. 그 질문은 신의 존재를 믿는 이 에게라야 할 수 있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신을 믿지 않는 것 아닌가요?”

“허허~ 자네가 흥분했군. 그것은 학문의 자세가 아니야. 신앙의 자세도 아니지.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보게. 나는 신을 믿네. 그것도 아주 신실하게 믿지. 내가 신을 믿기에 뾰족한 돌을 세운 것 아니겠나?”

“무슨 괴변입니까? 바로 그 것이 당신의 악마성을 드러내는 것 아닌가요?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걸 믿음이라니요?”

“종교의 역사는 신의 우상화의 역사라네. 대중은 신을 알고 싶어도 알 수가 없고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네. 그래서 신의 형상화를 요구하지. 거기에 부응하여 ‘이콘’ 이라고도 하고 ‘상징’이라고도 하는 것을 만들었지. 소위 깨인 사람들은 그것을 우상이라고 한다네.”
“우상이 나쁜 것일까? 그럴 수 있지. 그렇지만 종교는 그 필요성에 의하여 무수히 많은 우상을 만들어 오지 않았나?
우상이란 꼭 형상을 가진 것만은 아닐세. 교리도 우상이고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는 것도 우상이지. 자기의 신앙을 절대시 하는 것도 우상이고.... 사람은 그가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신을 (자기 방식대로) 우상화하지 않을 수 없다네.”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신을 만나고 신의 음성을 듣고, 신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들이 만나고 음성을 듣고 경험한 것도 모두 우상이란 말입니까?”

“신을 경험했다고 하는 것은 그만의 경험이고 그만의 진리일세. 결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경험일 수 없다네. 만일 그것을 일반화하고 보편화 하여 남들에게도 강요한다면 우상이 되지.”

“그러면 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아무 표현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말하고 표현하면 우상이 되니까요.”

“말은 할 수 있지. 표현도 할 수 있고. 그것을 못하게 한다면 그것도 또 다른 강요 아닌가? ‘나는 이렇게 들었다.’ ‘나는 이렇게 보았다.’ ‘나는 이렇게 경험했다.’ ‘나는 이렇게 알고 있다.’로 족해야지. 그것이 신앙고백이네.”

“어리석은 질문 하나 더 하겠습니다. 당신은 신을 만났습니까?”

“내가 만났다면 믿겠는가? 내가 만난 신을 자네도 만날 수 있는가? 내가 신을 만나고 못 만나고는 자네하고는 관계가 없네. 신에 대한 믿음의 문제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일세.”

“혹시 당신이 만난 신은 당신의 관념의 산물, 즉 당신이 만든 것 아닌가요? 나는 그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 의구심은 당연하고 나름대로 일리 있는 의심일세. 어떤 이들은 말하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고. 충분히 그럴 수 있네. 그러나 인간이 창조한 것은 신이 아니라 우상일세. 상상으로 만든 우상, 관념으로 만든 우상, 환상가운데 만든 우상, 교리로 만든 우상, 이념으로 만든 우상, 손으로 만든 우상, 등등 인간이 만든 우상의 모습은 실로 다양하지.
인간은 신을 만나고자 열망할 수는 있어도 신을 만나고 못 만나고는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전적으로 신의 이지에 달렸지. 신이 인간에게 다가와야 비로소 인간은 신을 경험할 수 있다네. 그리고 그 신 경험은 각자가 다르기에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없네.
다시 한 번 정리한다면 내가 만든 건 우상이고 (신에 의해서) 내게 만들어 진 것은 신 체험 일세.”

“주의할 것이 있네. 신체험은 체험일 뿐이야.”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자네가 경험한 신은 신의 실체와는 별개라는 것이지. 마치 자네가 아는 나와 진짜 나는 별개인 것처럼 말이야. 자네가 경험한 신과 다른 이가 경험한 신은 다르거든. 모두가 신에 대한 이미지일 뿐이지. 신체험이 신 자체를 만났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

“아! 신을 체험한 이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글세~ 동의할 수 없네. 신을 체험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야. 그 순간부터 그의 삶은 신에게 붙들린 삶이지. 고난의 시작일세.”

“평범한 사람들은 신을 체험할 필요가 없다네. 평범한 사람들이야 말로 건강한 영혼의 소유자들일 수 있지. 건강한 이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듯이 건강한 영혼들에게는 신체험이 필요 없지. 신체험이 강렬한 소위 위대한 영혼이라는 이들은 어찌 보면 병든 영혼들일 수 있지 않겠나?”

대기업 상품 보다는 중소기업 상품을 이용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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