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포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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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포기했습니다
  • 김홍한
  • 승인 2016.09.30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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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평등은 상반되는 개념

많은 사람들이 “자유”라는 개념을 최고의 개념으로 삼고 있습니다. 정치적 자유, 경제적 자유, 학문의 자유, 신앙의 자유. 등등등. 그러나 나는 자유를 거부합니다. 진정한 자유란 완전히, 깨끗이 소멸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럴만한 자신이 없고 그럴만한 경지에 오르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기독교에 불만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에 불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는 나의 가족들이 엄청난 속박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족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참으로 부조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러한 세상을 방관하시는 하나님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나의 깔딱거리는 내 목숨이 나의 모든 고통의 원천임을 알면서도 나의 목숨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라 주변의 모든 것과 관계하면서 존재합니다. 관계한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서로가 서로를 속박합니다.

자유의 대가는 큽니다. 함부로 자유를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자유는 지금의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유 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내가 노예의 상태에 있다하더라도 노예인한 나에게는 의·식·주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자유 하는 순간 의식주는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자유는 고독입니다.

“자유”라는 말은 함부로 할 것이 아닙니다. 부부 중 누가 “자유하고 싶다”고 하면 이혼하자는 이야기 입니다. 자녀가 자유하고 싶다고 하면 가출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부하직원이 자유하고 싶다고 하면 직장을 그만 두겠다는 것입니다. “너는 자유다”는 선언은 이제 내가 너를 책임지지 않겠다는 이야기이고 너는 나와 관계가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이가 나를 속박합니다. 결혼은 사랑하는 이에게 속박 받겠다는 것입니다. 가정은 한없이 사람을 속박합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소유한 사람은 그 소유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도 자유 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로 피조물에게 속박당하고 계십니다.

자유 하고자 하는 이들이 불교 승려들인데 부모도 버리고 처자식도 버리고 일체 무소유로 살겠다는 이들입니다. 불교 승려들 중에 정말 그럴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희망 사항 일뿐 정말 그러한 이는 없습니다. “나는 자유하겠다”고 모든 것 훌훌 털고 자유 찾아 떠난다면 그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 것이니 참으로 무책임하고 모진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것에 구속됩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자유하려면 버려야 합니다. 권력으로부터 자유하려면 권력을 버려야 합니다. 돈으로부터 자유하려면 무소유 해야 합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하려면 죽어야 합니다. 참 황당하게도 나는 이러한 식의 자유는 거지와 노숙자에게서 봅니다. 자유의 대가가 그것입니다.

나는 1959년생입니다. 내가 중·고등학교 때 학교는 군대의 축소판이었습니다. 많은 억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부자유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직 어렸기 때문입니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정치적 자유를 간구하는 이들을 더러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정치적 억압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정치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유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 것은 신학을 공부하면서 부터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는 정치적 자유가 아니고 경제적 자유도 아니고 신학적 자유이고 신앙적 자유였습니다. 교회 전통이 나에게 교리를 강요했습니다. “교리에 얽매이지 말라 성서가 진짜다” 라고도 하지만 여전히 교리는 콘크리트입니다. 적어도 삼위일체 교리,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교리 등은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서가 믿음을 강요합니다. “성서가 우리 믿음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성서는 너무 많은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성서가 신앙의 표준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막연히 성서가 신앙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그 말은 선언적 의미밖에는 없습니다. “신학은 교회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말도 선언적 의미 밖에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교회가 엄청난 자체모순을 가지고 있는데, 그 모순 투성이의 교회를 향해서 “저 성전을 헐라”는 예수의 말씀이 생생한데, 그 말씀에서 자유로운 교회가 하나도 없을 터인데 교회를 위한 신학이라니….

내가 자유하고 싶었던 것은 이러한 교리, 성서, 교회에서부터 자유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열심히 말하는 신학으로부터 자유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자유를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말하는 순간 나는 기독교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황당하게 나는 내 스스로 내가 자유하고 싶은 기독교 신학과 기독교 신앙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그것을 강요한이가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나의 결단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어떤이는 이러한 것을 하나님의 강권에 의하여 붙들린바 된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 말이 그 말입니다.

어떤이가 나에게 말합니다. “김목사는 참 자유로운 목사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 하나님도 자유하지 못하신데 어떻게 감히 내가 자유 할 수 있습니까? 세상에 자유인은 없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자유를 거부합니다. 아주 작은 자유를 누리려고 해도 그 대가가 너무 가혹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신학을 통해서 이러한 글을 쓰는 것도 큰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나는 많은 부분 포기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굳이 자유가 있다면 생각의 자유입니다. 생각은 우주 이 끝에서 우주 저 끝까지를 순간에 오고갑니다.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와 깊은 바다 속을 마음대로 오고갑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그 이전부터 종말까지를 순간에 오고갑니다. 그리고 생각으로는 살인도, 간음도, 도둑질도 모두 가능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도전도 가능하고 배교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어쩌지요? 생각도 자유하면 안됩니다. 옛 성현들은 愼獨(신독)하라고 가르치시고 예수님께서는 “음욕을 품는 것은 간음하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아! 그러니 생각의 자유도 없습니다. 생각의 자유도 박탈당한 것입니다. 나는 적어도 생각은 자유하고 싶은데 말입니다.

자유가 억제되어야 할 이유가 또 있습니다. 자유와 평등은 상반되는 개념입니다. 자유가 확대되면 평등은 깨집니다. 역시 평등을 강조하면 자유가 억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자유가 확대되면 될수록 누군가가 고통을 당해야 하기에,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어야 하기에 나의 자유는 억압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 주님, 주님께서 저를 옭아 매셨습니다. 온갖 사랑의 쇠사슬로 저를 꽁꽁 묶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미움의 쇠사슬이라면, 욕심의 쇠사슬이라면 거침없이 끊어버릴 수 있겠는데 그 사슬이 사랑의 사슬이기에 도무지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자유”를 포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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