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시대는 말의 홍수시대이다. 가스와 연기로 세상이 더러워지고 공해가 생기는 것보다 무책임한 말, 언어의 남발로 세상이 질식할 만큼 오염되었다. 아첨하는 말, 중상 모략하는 말, 공갈협박, 남을 흉보고 헐뜯는 말…. 길을 걷거나 자동차를 운전해 가노라면 온통 울긋불긋 써 붙여 놓았다. “나를 사세요” “나를 잡수세요” “나좀 타세요” “나하고 같이 자요” 수많은 광고판이 우리의 눈을 어지럽게 한다. TV의 약 광고, 화장품 선전이 골치가 아프고 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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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보더라도 “사기 당했다. 고소했다. 간음했다. 도둑질했다. 살인했다. 떼먹었다” 현기증이 난다. 남의 밑구멍을 들여다본 기분이 든다. 그런 것을 읽고 그런 것을 듣기 보다는 차라리 백지 한 장을 들여다보는 것이 독방에서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시간이 얼마나 명쾌한 시간이겠는가.
맑은 샘물에 얼굴이 비치듯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시간이 우리의 참 모습을 비추는 것이다. 침묵하는 시간은 우리의 속사람을 살찌게 한다. 우리의 내면적인 삶을 풍요하게 만들어 준다. 내가 벙어리가 아니라고 소리치고, 내가 이만큼 안다고 떠드는 동안, 실은 자신이 올라가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얼간이가 되며 주책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단순한 진리를 망각하고 살아간다. 이것은 외부적인 소음 때문이다. 이러한 저질 문화의 홍수에 맹종할 것이 아니라 분명한 자기 질서를 갖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말은 가능한 적게 해야 한다. 한 마디로 충분할 때는 두 마디를 피해야 한다. 인류역사상 사람답게 살다간 사람들을 한결같이 침묵과 고독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현대인의 특징은 조용히 사색하고 명상하며 기도하는 침묵의 시간을 잃은데 있다. 그 시간을 잃어버림으로 천박한 생각, 얕은 꾀만 늘었다. 그 천박하고 얄팍한 생활을 살아가려하니 스스로 자신의 올무에 넘어지게 되는 것이다. 약은 사람이 늘 잔꾀에 넘어진다.
사람들을 만나 떠들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렇게 마음이 공허하고 허전할 수가 없다. 공연히 지껄여 댄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후회스러울 때가 있다. ‘침묵은 금이다‘라는 속담은 말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선조들의 가르침이라 생각된다. 의미 없이 쏟아놓는 말보다는 무언(無言)이 향기롭고,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할 바에야 아예 말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낫다는 뜻으로 보여 진다. 표현력과 발표력으로 지식의 척도가 측정되는 요즘, 말을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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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을 못하지 않는다는 것이 말 잘한다는 것과 반드시 일치하는가? 말을 잘한다는 것은 무수한 표현력을 구사해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이 아니라 농도 짙은 말을 아껴서 하는 것일 게다. 또한 말을 잘한다는 것은 그 말이 현실성을 담고 있을 때이고, 표현된 말이 진짜 가치를 발휘할 때는 그 말에 책임이 따를 때이다.
이레네우스 사상가가 “내가 말한 다음 후회한 적은 있어도 침묵을 지킨 것을 후회한 일은 없다“고 했다. 가톨릭 수도원에서는 수도원생들에게 침묵훈련을 시킨다. 신부들은 1년에 한 차례 개인피정을 하면서 하루 동안은 하루 종일 침묵하는 수행을 한다고 한다. 인도의 간디는 월요일은 ‘침묵의 날’로 정해놓고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용히 자연을 산책하거나 침묵의 훈련을 했다고 한다.
위대한 사상, 위대한 인격과 신앙은 침묵의 산물이다. 야고보 선생은 “혀를 재갈 물리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리는 사람이다“고 했다. 침묵하기를 배운 사람은 자기 인격과 삶을 통제하기를 배운 사람이다. 속에 든 것이 없는 사람일수록 더 떠들어대고 자기를 선전한다.
참 높은 인격, 참 무게 있는 사람은 함부로 입을 벌려 떠들지 않는다. 침묵 속에 오히려 많은 것을 말한다. 침묵은 말보다 강하다. 나는 가끔 설교를 할 때마다 차라리 침묵으로 이 시간을 메웠으면 하는 때가 있다. 공연히 진리를 설명하느라고 긴말을 하다보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값싸게 만들고 왜곡시킬 때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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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의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괴테) 진리는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설명하다보면 비슷한 모조품이 된다. 시방 나는 구도자(求道者)의 길을 제대로 걸어 왔는가. 사람들에게 말로 가르칠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본을 보여야 할 것 아닌가. 가급적 말을 적게 하고 그러나 따스한 가슴은 지니고 살아야 할 것 아니겠는가.
너무 많이 말함.
너무 급히 말함.
깨달은 바를 장황하게 말함.
불쾌하게 말함.
아이들을 큰소리로 나무람.
말 상대를 무시함.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함.
-료칸(良寬)의 ‘하지 않도록 조심할 것’
박철 목사(좁은길교회.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