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시각으로 본 신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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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시각으로 본 신화 이야기
  • 김홍한
  • 승인 2016.07.19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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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한목사의 이야기 신학

여성의 시각으로 본 신화 이야기

미의 여신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음란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성서에도 아프로디테가 등장하는데 그 이름이 ‘아세라’다.- 그의 아들 에로스가 프쉬케를 사랑하게 되었다. 에로스는 그의 어미를 닮아서인지 사랑의 신이기는 하지만 그 사랑이 육정의 사랑이요 자기본위의 사랑이었다.

에로스는 프쉬케를 아내로 맞이하였지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경고했다. 자신의 모습을 보지 말고 보려고도 하지 말라고. 그런데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남편의 얼굴을 보지 않고 평생을 살 수 있단 말인가? 프쉬케는 결국 잠자는 에로스의 얼굴에 등불을 비추었다. 그러자 에로스는 프쉬케의 믿지 못함을 책망하며 “의심이 자리 잡은 마음(프쉬케)에는 사랑(에로스)은 머물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가고 말았다.

에로스, 참으로 나쁜 놈이다. 처음부터 프쉬케를 파멸시키려고 작정한 놈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무지 지킬 수 없는 그런 조건을 내걸 수가 없다. 프쉬케에게 사랑의 덫을 쳐 놓고는 모든 책임을 프쉬케에게 돌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로스를 향한 프쉬케의 사랑은 식지를 않았다. 고운 마음,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 프쉬케는 모든 잘못이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고 에로스의 어미 아프로디테를 찾아간다. 자신의 죄를 용서하고 다시금 에로스의 사랑을 회복시켜 달라고.

아프로디테는 사악한 음란의 여신, 처음부터 아름다운 프쉬케를 질투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프쉬케를 파멸시키라고 에로스를 보냈는데 그만 에로스가 프쉬케에게 반하여 결혼한 것이다. 아프로디테는 프쉬케가 견딜 수 없이 미웠다. 그런데 프쉬케가 제 발로 찾아왔다. 아프로디테는 프쉬케에게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과제를 내린다. 그러나 너무나 아름답고 깨끗한 프쉬케 이기에 주변의 모두가 도와서 프쉬케는 저승까지 다녀오는 과제를 수행했다.

프쉬케 에게는 더욱 더 어려운 시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저승의 페르세포네로부터 얻어온 아름다움을 담은 상자,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되는 상자를 프쉬케는 열어본 것이다. 프쉬케가 어리석다고? 그럴 수 없다. 본래 “절대”라는 것은 절대로 지켜질 수 없는 것, 절대로 따먹어서는 안 되는 열매는 따먹을 수밖에 없고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되는 상자는 열 수밖에 없다.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은 꼭 그렇게 되고야 마는 것, 그러니 “절대”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를 말한다면 “절대”는 불행을 초래한다. 절대로 빗나가지 않는 창은 사랑하는 이의 가슴을 꿰뚫는다. 절대로 어길 수 없는 맹세는 사랑하는 자식을 죽인다.

프쉬케가 열어본 상자 속에는 아름다움이 들어있던 것이 아니라 잠이 들어 있었다. 프쉬케는 저승으로부터 온 잠, 죽음과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제 안달이 난 것은 에로스다. 비록 프쉬케를 시험하고 함정까지 팠지만 그는 자신이 쏜 사랑의 화살에 자신이 맞
아서 프쉬케를 향한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었다. 결국 에로스는 어머니 아프로디테의 뜻을 어기고 프쉬케에게서 잠을 거두어들인다. 그리고는 제우스신에게 간청하여 프쉬케를 신으로 만들고 정식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렇게 에로스와 프쉬케의 사랑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접하는 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절대로 지켜질 수 없는 사랑의 조건을 강요한 에로스에게 신화는 아무런 책임을 돌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 앞에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함정을 파놓은 에로스의 사랑은 사랑일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의 시각으로 본 춘향전

이도령이 춘향이가 갇혀있는 감옥에 거지꼴로 면회를 갔다. 마땅히 춘향에게는 은밀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어야 했다. 그런데 이도령은 철저히 자신을 숨긴다. 어떠한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혹시 모르니 철저한 보안을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니다. 춘향이를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이튿날, 어사출도를 한 이도령은 춘향이를 죄인의 신분으로 불러낸다. 그리고 춘향에게 수청들 것을 요구한다. 춘향이에게는 이제까지의 그 어떤 시험 보다도 가장 어려운 시험이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이도령이 거지꼴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춘향이는 더 이상 의지할 것도 희망도 없게 되었다. 그런 춘향이에게 새로운 권력자 어사또가 수청들기를 요구한다. 춘향이가 어사또의 요구에 응했다면 이도령은 어찌하였을까? 춘향이를 버리겠다는 것이다.

다행이도 춘향이가 어사또의 수청요구를 거절하자 이도령이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순간 춘향이는 신데렐라가 되었다. 춘향전은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러나 춘향전을 읽는 나는 아쉬움이 남는다. 춘향전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안 된다. 자신을 끝까지 시험하고 또 시험한 이도령에 대해서 춘향이는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어야 한다. “나는 오로지 너 하나만을 믿고 너 하나만을 기다리고 너 하나만을 사랑했건만 너는 끝까지 나를 의심하고 시험했다. 이 나쁜 놈아, 이제 내가 너를 버린다!” 하면서 말이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많은 좋은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편없이 찌질한 모습도 있다. 심청전에서 보듯이 어린이들에게 조차 부모를 위해서 죽음을 강요했다. 마땅히 자식을 위해서 부모가 죽어야지 어떻게 자식에게 부모를 위해서 죽으라고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춘향전에서 보듯이 여인들에게 너무 가혹했다. 남자들은 마음껏 욕정을 채우고자 하면서 여인들에게는 정조를 강요하고 수절을 강요했다. 심지어 기생에게까지도 정조를 강요하니 웃기는 일이다.

여성의 시각으로 본 성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성에 살고 있는데 천사들이 왔다. 롯은 천사들을 자기 집으로 인도하였는데 소돔성의 사람들이 몰려와서 시비를 걸었다. 롯이 제안했다.

“여보시오, 제발 이런 못된 짓은 하지들 마시오. 아시다시피 나에게는 아직 남자를 모르는 딸이 둘 있고. 그 아이들을 당신들에게 내어줄 터이니 마음대로 하시오. 그러나, 내가 모신 분들에게만은 아무 짓도 말아 주시오.” - 창세기 19장 -

또 하나의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어떤 레위인이 첩과 종을 데리고 기브아에 이르렀는데 어느 노인이 그를 자기 집으로 안내하여 대접하였다. 그런데 그 성의 무뢰배들이 몰려 와서 시비를 걸었다.

“그러자 노인이 밖으로 나가 그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들, 그게 어디 될 말인가! 이런 나쁜 짓을 하다니! 이분은 이미 내 집에 들어 왔는데, 이런 고약한 짓을 하지 말게나. 나에게 처녀 딸 하나가 있는데 내어 줄 터이니 욕을 보이든 말든 좋을 대로들 하게. 그러나 이 사람에게만은 그런 고약한 짓을 해서는 안되네.” 그들이 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레위인은 자기 첩을 밖에 있는 자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들은 잔인하게도 그 여자를 밤새도록 욕보였다.”
- 판관기 19장 -

롯은 소돔사람들에게 그의 두 딸을 줄 테니 마음대로 하라고 한다. 기브아의 노인도 역시 딸을 줄 테니 마음대로 하라고 한다. 레위인은 자기의 첩을 무뢰배들에게 내어 주었다. 위 두 이야기에서 여인들은 그냥 물건일 뿐이다. 그들의 인권이나 그들의 생각 따위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용납이 되지 않는다. 그 때 그 사람들은 그래도 되는 거란 말인가? 그 때는 사람이 사는 사회가 아니란 말인가? 이들 만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두 번이나 누이라고 했다. 이삭도 그랬다. 이런 매정하고 잔인하고 찌질한 이들을 우리들은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칭찬해야 한단 말인가?
내친김에 아브라함이야기도 해 보자.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까지 하였다. 그것이 과연 칭찬받아야 할 신앙인가? 그렇다면 오늘날 누군가가 신의 음성을 들었다면서 자신의 자식을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면 우리들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다”고 크게 칭찬해야 할 것이다.
이 즈음에 성서란 무엇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겠다. 성서는, 특히 구약성서는 해석해야 할 것이지 해석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성서는 교훈을 주는 책이 아니라 성서를 통해서 교훈을 만들어 내야 하는 책이라는 생각이다.

여성의 시각으로 본 한국역사

1960년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었다. 1970년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경쟁력은 무엇일까? 지하자원도 없고, 우수한 기술도 없고, 자본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는 맨 몸뚱이 뿐이었다. 맨몸으로는 남자의 몸보다 여자의 몸이 훨씬 상품가치가 높다. 바로 性 상품이다. 독재 권력은 돈이 필요하였다. 미국의 돈, 일본의 돈, 무슨 돈이든지 돈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여성들을 성 상품으로 내놓았다. 공순이, 식모, 시내버스 안내양 같은 우리의 누님들, 여동생들이 관광일꾼이 되어 매춘여성이 되었다.
1962년에 15,000명 이던 외국인 관광객은 1972년에는 37만 명으로 늘었다. 외국인 관광객은 꾸준히 늘어났다. 주로 일본인들의 섹스관광이었다.
1973년에는 매매춘이 국책산업이었다. 외국인을 상대로 한 매춘여성에게는 “당신들이 바로 애국자라”는 자부심까지 심어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허가증이 발급되어 야간통행도 허용되었다. 이러한 매춘관광에 대해서 반발도 있었으나 철저히 억압되었다. 1974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대표 이우정씨가 기생관광 반대 강연회를 하자 중앙정보부는 이를 반정부행위로 간주하여 연행하기도 하였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원나라에 끌려간 수많은 고려의 여인들,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쳐진 여인들, 청나라에 바쳐진 여인들, 그들 중에 고향이 그리워 많은 우여곡절 속에 돌아온 여인들을 還鄕女(환향녀)라 하였는데 그것이 그대로 “화냥년”이라는 욕이 되었다. 가깝게는 일제에 의하여 종군위안부로 끌려가 영혼과 육체를 짓밟힌 여인들이 있었다. 이제는 모두 할머니가 되었다. 거개는 죽고 얼마 남지 않은 이들 중에 용기 있는 이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말 하고 있다.

아! 오랜 옛날부터 이 땅의 바지씨들은 이 땅의 어린 딸들을 강자들에게 상납하고, 팔고 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였다. 혹자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아내와 딸을 빼앗겼을 것이고, 어떤 이들은 살기 위해서 제 스스로 팔았을 것이고, 어떤 이들은 남의 아내와 딸을 빼앗아 상납했다.

사랑

사람은 마땅히 사랑 받아야 사람이다. 그런데 사랑으로만 멈추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마땅히 존중 받아야 한다. 사랑은 자칫 일방적이기 쉽다.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나의 감정대로만 사랑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감정의 표출일 뿐이다. 그러한 사랑은 소유욕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애완동물을 사랑한다. 그러나 존중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랑이 식거나 사랑의 조건이 사라지면 가차 없이 버린다. 역시 사랑이 아니라 소유욕이다.
남성은 여성을 그리워하고 사랑한다. 그러나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자신의 욕구분출 상대로만
삼는 것이다. 역시 자녀를 사랑한다. 그러나 존중하지 않는다면 일방적으로 부모의 욕심만 강요한다. 자녀의 능력, 적성, 희망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부모의 뜻을 강요한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녀를 통하여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망이다. 사랑은 상대에 대한 나의 감정이 아니라 그에 대한 존중과 배려다.

공자 사상의 핵심은 仁이다. 인의 핵심은 恕(서)다. 恕는 如心(너의 마음) 이다. 너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하는 것이다. 어떻게 너의 마음을 알고 배려하는가? 대학에 이르기를

“위에서 싫어하는 것을 아래에 시키지 않고 아래서 싫어하는 것으로 위를 섬기지 않는다. 앞에서 싫어하는 것으로 뒤에서 먼저하지 않고 뒤에서 싫어하는 것으로 앞에서 따라하지 않는다. 오른편에서 싫어하는 것을 왼편에 건네지 않고 왼편에서 싫어하는 것을 오른편에 건네지 않는다.”고 했다.

통치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백성들이 좋아하는 바를 좋아하고 백성들이 싫어하는 바를 싫어하는 사람, 이러한 사람을 백성들의 부모라고 한다.” 고 했다.



죄란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답지 못함이 죄다.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지 못함이 죄다. 마땅히 존중해야 할 것을 존중하지 못함이 죄다. 마땅히 보호해야 할 것을 보호하지 못함이 죄다. 마땅히 책임져야 할 것을 책임지지 못함이 죄다.

원죄란 무엇인가? 160호에서 이야기 한 바가 있다. 인간들, 특히 남성들의 살상본능, 전쟁본능이 원죄다. 본능이기 때문에 원죄다. 본능이기 때문에 치유가 어렵다.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능은 본능으로 억누를 수 있다고 했다. 다행히 남성들의 살상본능, 전쟁본능이 여성들에 의해서 잠재워 질 수 있다고 했다. 여성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성적 본능이 전쟁본능, 살상 본능을 억제할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의 죄를 모르는 것이 죄다. 모르면 거침없이 악을 저지른다. 사람에게 큰 고통을 주고 파멸시키면서도 그것을 사랑으로 아는 경우도 있다.
석가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했다. 이 말을 다른 것들은 다 하찮은 존재요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로 해석하면 안 된다. 세상에 잘나지 않은 것이 없다. 나무도 잘났고 풀도 잘났고 지렁이도 잘났다. 모두가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다.

狂氣(광기) - 이야기 신학 89호에 썼던 글이다. -

사냥을 즐기고 낚시를 즐기는 이들이 한없이 밉다.
성능 좋은 엽총의 총구가 불을 뿜고, 짐승의 몸에 탄환이 박힐 때, 꼬꾸라진 짐승의 몸에서는 피가 솟구치고 짐승은 고통의 숨을 헐떡거리며 죽어간다. 사냥꾼은 그 모습을 보면서 쾌락의 극치를 느낀다.
낚시의 짜릿한 손맛이라니, 그 손맛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물고기가 죽음의 몸부림을 치는 것을 느끼는 것 아닌가?
야! 이 저주받을 사람들아, 차라리 마약을 해라. 차라리 도박을 해라. 차라리 간음을 해라. 어찌하여 생명을 죽이고 그 죽어가는 몸부림을 즐기는가?

사냥을 즐기고 낚시를 즐기는 이들은 생명을 죽이는 쾌감을 최고의 쾌감으로 여기는 미치광이 들이다. 인간 사냥이 허락된 상황이라면 사람 사냥의 쾌감은 짐승사냥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아마도 그 쾌감은 몇 십 곱절 더 증폭될 수도 있을 것이다. 노자는 말했다.

“말달려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馳騁畋獵 令人心發狂)” (노자 12장) 

노자 읽기
5장. 노자의 자연주의적 존재론

天地不仁(천지불인) : 하늘과 땅은 사랑이 없다.
以萬物爲芻狗(이만물위추구) : 모든 것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취급한다
聖人不仁(성인불인) : 성인도 사랑이 없다
以百姓爲芻狗(이백성위추구) : 백성들을 모두 짚으로 만든 개처럼 취급한다

천지는 사랑이 없다는 것은 천지는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격이 아니니 사랑도 없다.
성인은 인격적 존재다. 그런데 성인도 사랑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노자가 말하는 성인은 인위적인 무엇이 없이 순리에 따라 사는 사람이기에 역시 사랑이 없다고 표현한 것이다. 어떤이는 사랑이 제 한 몸에 그친다. 어떤이는 사랑이 제 가족과 친척에 그친다. 어떤이는 사랑이 자기 가문이나 고장에 그친다. 어떤이는 사랑이
온 나라에 미친다. 어떤이는 사랑이 온 천지에 미친다. 성인이 그러한 사람이다. 그래서 성인에게는 조국이 없다. 공자는 중국인이 아니요 석가는 인도인이 아니며 예수는 유대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인에게는 아버지도 없다. 공자는 논어에서 아버지 숙량흘에 대해서 한마디도 한바가 없다. 역시 예수는 단 한마디도 요셉에 대해서 말한바가 없다. 석가는 아버지를 부인했다. 공자, 석가, 예수에게 아버지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 밖에는 없다. 육신의 아버지는 참 아버지가 아니다. 성인의 사랑은 육신의 아버지에게조차 머물지 않으니 오히려 성인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래서 노자는 聖人不仁 이라 했을 것이다.

天地之間(천지지간) : 하늘과 땅 사이는
其猶槖籥乎(기유탁약호) : 풀무의 바람통
虛而不屈(허이불굴) : 비어 있으나 다함이 없고
動而愈出(동이유출) : 움직일수록 더욱더 내놓은 것

하늘과 땅 사이는 텅 비어있다. 그러나 그냥 비어있는 것은 아니다. 바람으로 꽉 차있다. 그래서 풀무의 바람통이라 표현했다. 어떤 때는 고요한 듯 하지만 어떤 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격렬하게 요동친다. 노자는 이 격렬하게 요동치는 바람에서 천지의 힘(에너지)를 보고 그 힘이 만물을 생하게 하는 것으로 본 듯하다.
우주는 텅 비어있다. 빛조차 없는 듯 우주는 검다. 파란 하늘은 낮의 하늘이다. 햇빛에 가려진 하늘이다. 진짜 하늘은 밤 하늘, 수 만 광년 떨어진 별까지 다 보이는 밤하늘이 진짜 하늘이다. 그러면 하늘은 정말 텅 비어있을까? 빛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빛을 받아줄 것이 없어서 어둡다. 빛을 받아줄 것을 만나면 환하게 빛난다. 태양에서 먼 거리를 달려온 빛이 지구를 만나 밝히 빛난다.

多言數窮(다언수궁) : 말이 많으면 궁지에 몰리는 법
不如守中(불여수중) : 중심을 지키는 것보다 좋은 일은 없다

노자를 보고 나름대로 말을 붙이는 짓을 노자는 경계하는 가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을 붙여 해석을 하니 蛇足임에 틀림없다.

독자여러분 안녕하시지요.
뜨거운 여름입니다.
지난해 이맘때처럼 조금 쉬고자 합니다.
10월 1일 162호로 찾아뵙겠습니다.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김홍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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