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죽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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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까?
  • 김홍한
  • 승인 2016.07.01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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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생명사랑은 자기희생

病(병)

병에는 아픈 병이 있고 아프지 않은 병이 있다. 치료할 수 있는 병이 있고 치료할 수 없는 병이 있다.
치료할 수 있는 병은 아프다. 치료할 수 있으니 몸이 스스로 치료하려고 한다. 그것이 아픔이다. 때로는 스스로 치료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 때에 의원이 필요하다. 의원은 몸이 치료해 달라고 아파하는 병만 치료할 수 있다.

치료할 수 없는 병이 있다. 치료할 수 없는 병은 아프지 않다. 치료할 수 없기에 몸이 반응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프지 않다. 미리 알면 치료할 수 있을까? 미리 알아도 치료할 수 없다. 혹 조금 생명을 연장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대가를 치러야 한다. 목숨을 연장한 만큼 고통을 겪어야 한다. 살아있으되 산 것이 아니다.

미리 건강검진을 받는 이들이 많다. 오늘날에는 그것이 당연시 되고 있다. 어리석은 짓이다. 치료할 수 없는 병은 미리 알아도 치료할 수 없다. 치료한다고 하다가는 그나마 남은 수명도 단축할 수 있다. 혹 수명을 연장한다 하더라도 엄청난 고통과 많은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본인도 힘들지만 가족도 힘들다.
때로는 병이 아닌 것을 병으로 알고 치료하려고 한다. 긁어 부스럼 만드는 꼴이다.

믿음이 좋다는 목사, 장로들이 어찌하여 그렇게 건강에 집착하고 생명에 집착하고 노후준비에 집착하는지 답답한 노릇이다. 결정적인 때가 되면 천국에 대한 소망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는 말에 집착한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마라”는 주님의 말씀이 분명한데 그 말씀은 그저 공허한 말씀일 뿐 매달 나오는 연금을 생명줄로 아는가보다.

“절망”, “불안”, “공포” 실존철학과 심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들이다. 이러한 개념들을 학자들은 어렵고 복잡하게 말하지만 그 핵심은 쉽고 간단하다. 공포는 두려움의 대상이 있는 것, 불안은 두려움은 있는데 대상을 모르는 것, 절망은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공포”는 나를 죽일 수 있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다. 공포에서 벗어나는 길도 있다. 그 존재를 제거하던지 내가 아주 멀리 도망하는 것이다. “불안”은 알 수 없음이 불안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는 한 발작을 내딛기 어렵다. 내 앞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적이 분명하면 공포다. 적을 모르면 그것이 불안이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죽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죽음을 안다면 이사 가는 마음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절망과 해탈의 차이가 무엇일까? 잘 구별이 되지 않는다. 절망은 희망이 끊어진 상태다. 해탈은 욕망(희망)을 내려 논 상태다. 희망과 욕망도 잘 구별되지 않는다. 희망이 끊어졌다면 욕망도 끊어진 것이다. 욕망을 내려놓았다면 역시 희망도 내려 논 것이 아니겠는가? 절망과 해탈, 눈에 보이는 차이가 있다. 절망에 빠진 자는 죽음을 택한다. 해탈한 자는 죽음도 내려놓는다.

죽어서 살리는 것이 생명이다. 살아있는 쌀알이 내 안에 들어와 죽음으로 나를 살린다. 소고기 한 점 이, 김치 한 조각이, 멸치 한 마리가 내 속에 들어와 죽어서 나를 살린다. 내 한 몸 살리기 위해서 수많은 생명들이 사의 찬미를 부르며 내 안에서 죽어 내가 산다. 그 뿐인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내 아버지가 죽었고 내 어머니가 죽는다. 그 뿐인가? 예수께서 죽으시고 하나님께서도 죽으신다.

내가 살기 위해 무수한 생명이 죽듯이 죽음이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먹이가 되는 것이다. 죽는 것이 두려운가? 그러면 나를 위해 죽은 무수한 생명들은 무엇인가? 釋迦는 生·老·病·死를 苦라 했는데 그 말에 반감이 생긴다. 생노병사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연현상인데 그것이 苦라면 어쩌자는 것인가? 생노병사가 苦가 아니라 내가 무수한 생명을 먹으며 산다는 것이 苦다. 내 생명이 끝나는 날, 내가 살상을 멈추는 날이다.

이런 글을 쓴다고 해서 내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을까? 나는 죽음이 두렵다. 질병도 두렵다. 준비되지 않은 노후가 두렵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한 불안과 공포 속에 산다는 것을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죽음을 직시하고자 한다. 일단은 철저히 나와는 관계없는 남들의 이야기로 객관화 시켜보고자 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정리가 되면 내 이야기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어떤 이들은 죽음이라는 것은 없다고 한다. 마치 에너지 보존칙에서 보듯이 에너지는 그 양태가 바뀔 뿐 소멸되지 않는 것처럼 생명도 사라지지 않고 다른 형태로 바뀔 뿐이라는 면에서 죽음은 없다는 것이다. 대중들은 이런 말에 위로를 받는다.

불교에서는 윤회를 말한다. 생명이라는 것은 소멸하지 않고 다시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고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역시 대중들은 이 윤회사상에서 위로를 받는다. 그러나 아시는가? 불교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윤회에서 위로를 받으라는 것이 아니다. 생노병사가 계속되는 윤회야 말로 고통이니 이 윤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해탈이다. 달리 말하면 완전히 소멸하자는 것이다.

5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생각이 다르다. 지식도 다르다. 내 몸을 구성하는 세포도 다르다. 50년 전 뿐만 아니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다. 그러니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년 전의 나와 오늘의 나에게는 이어지는 무엇이 있다. 그래서 나다. 그것이 아마도 나의 정체성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나의 정체성이 끊어지는 것이다. 거듭남이라는 것은 나의 정체성이 바뀌는 것이다.

윤회는 그저 이야기 일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에게 전생이 있다면 전생의 내가 지금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나에게 전생에 대한 기억이 없다. 또한 지금의 내가 죽어 미래에 다시 태어날 나를 조금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러니 전생의 나,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와 관계가 없다. 전생의 그 누구는 결코 내가 아니다. 정체성이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면서 피할 수 있는 것과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죽음이다. 피할 수 없기에 담담히 받아들여야 한다. 죽음을 피하려는 것이 어리석은 것처럼 죽음을 앞당기려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성현들은 죽음을 피하려고 한 이가 없다. 또한 스스로 죽음을 앞당기려 한 이도 없다.

죽음은 피할 수도 앞당길 수도 없는 것이니 내 소관이 아니다. 삶은 나의 삶일지 몰라도 생명은 내 것이 아니다. 生命은 살라(生)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러니 현명한 사람은 生과 死의 문제를 깊이 생각은 하되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저 삶을 성실히 살 뿐이다.

어떻게 죽을까?

죽음의 모습은 다양하다. 갑작스런 죽음에는 대처할 여유도 없고 방법도 없지만 늙어 죽든지 병들어 죽는다면 나름대로 죽음을 맞이할 방법이 있다. 나는 죽음을 순종함으로 받으려 한다고 늘 다짐하지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가끔 죽는 연습을 한다. 잠자리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을 때, 문득 그 연습을 한다.

죽음이 임박한 내가 정신이 멀쩡하다면 어찌할까? 굶어 죽어야 겠다. 굶어 죽는 것이 어려울까? 죽을 때가 되지 않은 사람이 억지로 굶는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힘들겠지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사람은 먹는 것이 굶는 것 보다 더 힘들다. 몸이 이미 음식을 거부하니 굶는 것이 더 쉽다. 굶으면 힘이 없어 아프지도 않다. 아픈 것은 힘이 있어서 아픈 것이지 힘이 없으면 아프지도 않다. 굶으면서 몸이 작아진다. 몸이 작아지는 만큼 맘이 커진다. 굶고 굶어서 가벼워진 몸으로 하늘에 오를 것이다. 새는 하늘을 날기 위해서 뼛속까지 비우지 않는가?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엉뚱한 짓이다. 하나님 앞에는 죽은 이가 없다. 육신을 가진 이와 육신을 벗어난 이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 앞에는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살아있고 모세도 살아있고 나도 살아 있다. 그런데 살려 달라고 매달리면 얼마나 엉뚱한 일인가?
죽을병 걸린 사람이 다급한 나머지 “이번 한번만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신다면 … 하겠습니다.” 한다. 그러나 용케 죽지 않고 살아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쉽게 잊고 만다. 그가 거짓말한 것은 아니다. 그는 그 때 정말로 그런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이제까지 쭉정이로 남아 있다가 추수 때가 되어 밑동이 잘릴 위기에 처하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한다. 그러나 추수를 늦춘다고 쭉정이가 알곡 되지는 않는다. 무르익은 곡식들은 낫을 기다리듯이 충실한 삶을 산 이들은 죽음을 기다린다.

죽음의 그림자가 덮일 때 살려달라고 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이다. 하나님도 모르고 성경도 모름은 물론이요 인생도 모르는 필부에 불과하다.

전쟁과 살상의 본성

인간세상에서 생명만큼 소중한 것이 없고 죽음만큼 거룩한 것이 없다. 그래서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살인죄고 사람의 일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일이 죽은 자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소위 영웅이라는 자들은 생명을 너무 가볍게 여긴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본성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살상본능, 전쟁본능 때문일 것이다.
성경은 인류 초기부터 살인을 이야기 한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다. 그리고 그 카인의 후손인 라멕에 이르러는 그 포악함이 극에 달한다.

“아다야, 실라야,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나를 다치지 말라. 죽여 버리리라.
젊었다고 하여 나에게 손찌검을 하지 말라. 죽여 버리리라.
카인을 해친 사람이 일곱 갑절로 보복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치는 사람은 일흔 일곱 갑절로 보복을 받으리라.”
창 48장


이에 대해서 성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다시금 아담과 하와에게서 출생한 ‘셋’이 대를 잇는다는 말씀만 있다. 하나님께서 라멕을 심판하셨다는 말씀도 없다. 그냥 조용히 촛대를 옮기신 것이다.

그리스 신화 이야기를 소개한다. 아버지를 뛰어넘는 아들을 낳으리라는 신탁대로 여신 테티스는 아들을 낳았다. 테티스는 아들 아킬레우스를 저승을 흐르는 강물에 담갔다. 그럼으로 아킬레우스의 온 몸은 창에도 칼에도 상하지 않게 되었다. 어머니 테티스가 강물에 담그기 위해서 붙잡은 발목 힘줄만 예외였다.
아킬레우스에게 내려진 신탁은 트로이전쟁에서 죽는다는 것,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여장을 하고 여인들 속에 숨어들었다.
오디세우스는 방물장수로 변장하고 아킬레우스를 찾아 나선다. 거울, 빗, 귀걸이, 목걸이 등 온갖 장식물을 여자들 앞에 펼쳐 놓는다. 그런데 그 물건들 속에 어울리지 않게 예리한 칼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여인들은 칼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나 딱 한 사람 칼을 집어 드는 이가 있었다. 아킬레우스였다.

나는 딸 둘을 생산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의 집에는 그렇게 가르친 것이 아닌데도 딸아이들의 장난감은 예쁜 인형, 소꿉놀이기구 등이었다. 어쩌다 아들만 있는 이들의 집에 가면 아이들 장난감이 온통 총, 칼, 탱크, 전투기, 로봇 등이었다.

아킬레우스의 살상 본능이 칼을 집어 들었다. 남자 아이들의 장난감도 온통 그런 것들이다. 남자는 선천적으로 살상과 파괴 본능이 있는 모양이다.

중국 선불교의 큰 스승 남악이 마조를 만났다. 그 때 마조는 참선에 열중하고 있었다. 남악이 물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참선을 왜 하는가?”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말없이 돌아선 남악이 무엇인가를 숫돌에 간다. 그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참다못한 마조가 짜증 섞인 소리로 말한다.

“무엇을 하십니까?”
“기왓장을 갈고 있네”
“기왓장을 갈아 어쩌시려고요?”
“거울을 만들고 있지”

어이없다는 듯 마조가 말한다.

“기왓장을 갈아 거울이 되겠습니까?”

남악이 말한다.

“참선한다고 부처가 될까?”


인간들, 특히 남성들의 본성 속에 전쟁과 파괴본능이 들어있다면 인류에게는 소망이 없다. 기왓장으로 어찌 거울을 만들겠는가? 본성은 교육으로 바꿀 수 없다. 법으로도 바꿀 수 없다. 그런데 다행히도 남성들의 전쟁본능, 살상본능이 여성들에 의해서 잠재워 질 수 있다. 여성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성적 본능이 전쟁본능, 살상본능을 억제할 수 있다.

 


여성들의 생명사랑

이집트에서 노예살이 하고 있는 히브리인들의 숫자가 무섭게 불어났다. 이집트인들은 그것이 두려웠다. 지금은 그들을 노예로 부리고 있지만 그들의 숫자가 더 늘어나면 그들이 이집트를 뒤엎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히브리인들의 숫자를 조절하려했다.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는 것이었다.
히브리인들의 사내 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는 파라오의 명령은 거역할 수 없었다. 히브리인 남성들은 그저 굴복할 뿐이었다. 그런데 여인들이 저항하고 나섰다.

그 즈음 모세가 태어났다. 모세의 어머니는 몰래 모세를 키웠다. 더 이상 숨겨서 키울 수 없을 때 모세의 어머니는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다.

 

태풍이 일 때 가장 안전한 곳은 태풍의 핵이다. 파라오의 명령에 가장 안전한 곳은 그 명령이 나온 곳, 파라오의 궁전이었다. 모세의 어머니는 지혜롭고 담대한 사람이었다.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아기를 파라오의 궁전 깊숙이 집어넣을 계획이다. 먼저 아기를 키울 수 있는 사람을 선정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생명의 고귀함을 알고 일단은 아기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남자보다는 여자가 적합하다. 그리고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의지가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 있는 권세가 있어야 한다.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거기에 따른 치밀한 계획에 의하여 파라오의 딸이 선정하였다. 그들은 이미 수집한 정보에 의하여 파라오의 딸이 나일강으로 목욕하러 나오는 시간, 장소 등을 고려하고 아기를 물에 띄울 때 물 흐름의 방향도 계산에 넣었다. 그리고는 파라오의 딸이 발견하게 하고는 그 모성애를 자극하는 것이다. 적합한 시각에 아기의 누나를 등장시켜 유모를 소개해 준다. 유모로는 물론 아기의 친 어미가 소개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기를 키우고 싶어도 양육하는 것 때문에 걱정하는 공주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면서 동시에 아기는 자기의 친 어미에 의해서 양육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이 성공되면 아기의 양육비까지 받으면서 지극히 안전한 가운데 양육될 것이다. 계획은 성공하였다.

그 계획은 사기극이 아니다. 언뜻 보면 파라오의 딸이 계략에 속아 넘어간 듯 보이지만 실은 동조한 것이다. 파라오의 딸도 아기가 히브리인의 아기인줄 알고 있었으며(출2장6절) 곧이어 등장한 소녀가 유모를 소개해 준다는 제안은 충분히 계획된 것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파라오의 딸은 그 아기로 인하여 자신에게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기를 자기의 양자로 들일 것을 결심하고 유모를 소개해 주겠다는 소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생명을 해치고자 하는 권세 있는 남자들의 악한 행동에 파라오의 명령을 거부한 산파들, 모세의 어머니, 모세의 누나, 이집트의 공주, 그리고 시녀들, 여인들의 직업과 신분을 초월한 생명보호의 노력들이 있었다. 이 여인들에 의하여 역사는 준비된 것이다. 그 역사는 이데올로기의 역사가 아니다. 제국주의의 역사도 아니다. 생명 보호를 위한 자기희생적인 역사이다. 인류의 역사가 온통 전쟁과 살인, 착취로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면면히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여인들의 생명보호를 위한 자기희생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자 읽기

노자 5장 순서이나 바꾸어 6장을 이야기 한다. 앞의 글들과 연결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노자 6장의 제목을 여성으로 정했다.

6장. 여성

谷神不死(곡신불사) : 계곡의 신은 결코 죽지 않는다
是謂玄牝(시위현빈) : 그것은 신비한 암컷
玄牝之門(현빈지문) : 암컷의 문은
是謂天地根(시위천지근) : 하늘과 땅의 근원
綿綿若存(면면약존) : 끊임없이 존재하는 것
用之不勤(용지불근) : 써도 써도 다할 줄을 모른다


노자는 山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谷만 이야기 했다.
男性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女性에 대해서만 말했다.
불을 말하지 않았다. 물만 이야기 했다.
아버지를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만 이야기 했다.
谷은 谷神으로 女性은 玄妙함으로 표현했다.

노자에서 남성은 죽은 것이요 여성은 살아있는 것이다.
남성은 일시적인 존재요 여성은 영원한 존재다.
남성은 말초적인 것이요 여성은 근원적인 것이다.
남성은 유한한 존재요 여성은 무한한 존재다.
노자야 말로 인류 최고의 페미니스트다. 여성학자들은 도대체 노자를 공부하지 않고 무엇을 공부하는지 모르겠다.

대기업 상품 보다는 중소기업 상품을 이용합시다.
대형유통회사 보다는 동네 가게를 이용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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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유성구 원내로 39번길 59 <새교회> 우)34227
☎ 010-3243-2665 E-mail: khhyhy@hanmail.net
후원계좌 / 농협 453047-52-043161 김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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