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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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자
  • 김홍한
  • 승인 2016.06.17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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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적 삶을 산다는 것

교만과 겸손

신학수업을 마칠 즈음 목회임지를 찾고 있었다. 母교회 목사님께서 이력서를 20여장 만들어 오라 하셨다. 그 말씀에 조금은 당황하고 있는데 그것을 눈치 채신 목사님이 말씀하신다.

“왜, 훌륭한 김홍한 누가 알아준대? 가만히 있으면 누가 모셔간대? 까불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글쓴이 김홍한 목사
아하! 그 목사님은 나의 교만함을 간파하시고 직격탄을 날리신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이라 생각하고 기꺼이 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목회지로 갈 수 있었다.

교만이란, 周易에 이르기를 “負具乘 致寇之(부구승 치구지)/ 삼태기를 짊어질 자가 수레를 타면 도적을 불러온다” - 주역, 계사상 - 고 하였다. 삼태기를 짊어질 자는 소인이요 수레는 군자의 기물이다. 그런데 소인배가 군자의 지위에 있으면 필히 윗사람에게는 교만하고 아랫사람에게는 난폭하여 그 지위를 빼앗기고 만다.

재물을 감출 줄 모르면 도둑을 불러오고 여인이 얼굴을 지나치게 예쁘게 꾸미면 남자들의 음탕한 마음을 자극한다. 그러니 현명한 사람은 마땅히 감출 줄을 알아야 한다.

겸손이란, 周易에 이르기를 “勞而不伐 有功而不德/수고함을 자랑치 않고 공이 있어도 자신의 덕으로 여기지 않는다” - 주역 계사 상 - 고 했다.
老子는 “功成而不居(공성이불거/ 공을 이루어도 거기 머물지 않는다)”를 여러 번 강조해서 말한다. 故 안병무 선생께서 노자공부를 하면서 이 문구를 생의 좌표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의 말을 들어보자.

“어떤 단체든 싸움하는 이면을 들여다보면 공로의식이 뱀처럼 머리를 드는데 그 원인이 있다. 요사이 어떤 분란이 계속되는 교회 사람을 만났다. 그 분란의 원인은 결국 공로싸움이다. 그 교회를 시작했다는 목사가 공로자로서의 위세를 너무 부려서 부목사도 장로도 붙어있을 수 없단다. 그 목사의 일갈은 언제나 '내가 누군데!'라고 한다. 즉 공로자를 몰라본다는 분노이며, 싫은 놈은 나갈 것이고,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는 통에 그는 사람을 다 잃고 한때 명성을 날리던 그가 노망한 노인으로 따돌림을 받고 있단다.
우리 주변에는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가 아니라 '공성이불거(功成而不去)'의 위인을 많이 본다. 어떤 목사는 하도 사임을 하지 않기에 젊은이들이 들것에 떠매여 멀리 내던지고 들어왔더니 얼마 후 다시 돌아와서 "난 못나간다. 너희들이 나 다 나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수십년의 공이 아쉬워 노망이 든 예이다.” - 안병무, <현존> 1971. 3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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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말을 하고 나면 후회가 남는다. 내가 너무 교만하지는 않았는지... 평소 무엇이 교만이고 무엇이 겸손인지 생각한 것이 있어 나의 짧은 생각이나마 독자들과 나누고자 이 글을 쓴다.

“나는 김홍한 입니다. 내 자랑을 들어 보세요. 나는 생각이 깊은 사람입니다. 나는 나름대로 학식이 많은 사람입니다. 나름대로 경전에 밝고 역사에 밝고 신화에 밝고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입니다. 글도 잘 씁니다.”

내가 과도하게 내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결코 내가 교만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자기를 알리는 작업은 홍보다. 자신의 잘남을 알아주기를 기다리면서 도도하게 기다리는 것이 오히려 교만이다. 어떤이는 자신을 과대 포장한다. 허위가 아니라면 과대광고는 그런대로 봐 줄만하다.
재물은 도둑이 훔쳐갈 수 있지만 지식은 그럴 수 없다. 나의 지식을 누군가가 탐내려면 나를 등용해야 할 것이다. 여인이 미모를 자랑하면 몸을 빼앗길 수 있지만 그 덕을 자랑하면 청혼을 받을 수 있다.

자신을 자랑하고 선전해야 하는가? 당연히 그래야 한다. 나는 아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필부에 지나지 않으니 마땅히 그래야 한다. 겸손이란 무엇인가를 크게 이룬 이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고 자랑할 것도 없는 이는 겸손할 것이 없다. 이룬 것도 없고 알려진 것도 없으면서 자신의 조그만 재주를 사람들이 알아주고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면 한심한 일이다. 자존심 있는 행위일지는 몰라도 세상은 그런 이를 알아줄 정도로 여유가 있지 않다.

잘난 사람이 “나는 이렇게 잘났다” 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다.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어찌 교만이겠는가? 사회 초년생인 젊은이가 “나도 잘할 수 있다”는 것도 교만이 아니라 젊은이의 패기다.

그러면 교만은 무엇인가? 자신이 이룬 성과를 자신만의 것으로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이 교만이다. 나만 할 수 있다는 것이 교만이다. 남을 무시하고 얕잡아 보고 그 위에 군림하려는 것이 교만이다.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교만이 아니라 권력을 남용하는 것이 교만이다. 재력이 있음이 교만이 아니라 사치하고 낭비함이 교만이다. 자신을 자랑하고 높이는 것이 교만이 아니라 남을 짓누름으로 자신을 높이려는 것이 교만이다.

겸손은 무엇인가? 흔히 말하기를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것이라 한다. 짧은 생각이다. 억지로 그렇게 한다면 가식적인 행위다. 조직사회에서 그렇게 한다면 조직의 질서가 흔들릴 수 있다. 선배가 후배보다 자신을 낮출 수 없다. 직장상사가 부하직원 보다 자신을 낮출 수는 없다. 그것은 서로에게 불편하다. 겸손이란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다. 아비가 자식을 존중하고 직장상사와 부하직원이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겸손이다. 내가 귀한 만큼 남도 귀하게 여기는 것이 겸손이다.

자신을 숨기는 것이 겸손인가? 역시 짧은 생각이다. 그것은 겸손이라기보다는 처세술이다. 잘난 사람이 시기당하고 죽임당하는 시대라면 마땅히 자신의 재능을 숨겨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신이 토사구팽 당한 것은 그가 교만해서가 아니라 처세술이 부족해서다.

이렇게 학문하자.

나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글이 있다. 中庸에 나오는 말이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고 돈독히 行하라. 배우지 않을지언정 배운다면 능하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묻지 않을지언정 묻는다면 알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생각지 않을지언정 생각한다면 얻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분별하지 않을지언정 밝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行하지 않을지언정 行한다면 독실하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한 번에 능하면 자신은 백번을 하고 다른 사람이 10번에 능하면 자신은 천 번을 한다. 과연 이 道에 능하면 비록 우매하다 할지라도 필히 밝아지며 비록 유약하다 할지라도 필히 강해진다.
중용 20장

내가 학문을 하는데 표준이 된 가르침이다. 이렇게 학문을 하면 오류를 줄일 수 있다. 잘못된 판단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잘못된 소신을 바로잡을 수 있다.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남이 보지 못하는 근본을 볼 수 있다. 남들이 다 옳다 하더라도 그 옳지 못함을 볼 수 있고, 남들이 다 그르다 해도 그 옳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살자

나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또 하나의 글이 있다.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백이(伯夷)는 눈으로는 부정한 것을 보지 않았고, 귀로는 부정한 소리를 듣지 않았다. 바른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고, 바른 民이 아니면 부리지 않았다. 세상이 잘 다스려졌을 때에는 나아가 다스렸고, 혼란할 때에는 물러났다. .... 그러므로 백이伯夷의 기풍을 듣게 되면, 탐욕한 이가 청렴해지고 나약한 이가 지조를 갖게 된다.

이윤(伊尹)은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며, 누구를 부린들 民이 아닌가?’라고 하며, 세상이 잘 다스려졌을 때에도 나아가고, 세상이 혼란한 때에도 나아갔다. ‘하늘이 이 民을 낳으심에 먼저 안 사람(先知)으로 하여금 뒤에 알게 될 사람(後知)을 깨우치게 하고, 먼저 깨달은 사람(先覺)으로 하여금 뒤에 깨닫게 될 사람(後覺)을 일깨워주게 하였다. 나는 天이 낳은 民 가운데서 먼저 깨달은 자(先覺者)이다. 내 장차 이 道로써 이 民을 일깨우리라.’ 라고 하였다. 천하 백성 중에서 아무라도 요순이 베푼 은택을 입지 못한 자가 있으면, 자기의 책임으로 알았다. 天下의 무거움을 스스로 떠맡은 것이다.

유하혜(柳下惠)는 더러운 임금을 부끄러워 않고, 작은 벼슬도 사양하지 않았다. 나아가서는 자기의 어짐(賢)을 숨기지 않고 반드시 그 道理로서 하였다. 버림을 받아도 원망하지 않고 곤궁에 빠져도 근심하지 않았다. 무지한 촌부에게도 너그러워 차마 떠나지 못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비록 내 곁에서 벌거벗고 있다 한들 네가 어찌 나를 더럽히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유하혜의 기풍을 듣게 되면 비루(鄙陋)한 이가 너그럽게 되고, 천박한 이가 후덕하게 된다.” - 孟子 만장 하 제1장 -

나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또 하나의 글이 있다. 성서에서 바울사도가 하는 말이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가 왔습니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날에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월계관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 4장

한없이 깨끗한 백이, 세상의 무거움을 스스로 떠맡은 이윤, 넓고 넓은 유하혜, 하늘의 뜻에 붙들려서 치열한 삶을 살아온 바울사도, 극과 극으로 다른 삶을 산 이들이지만 참으로 멋진 인생들이다. 멋진 삶은 그 자체가 훌륭한 교과서다.

나는 내 인생을 어떻게 살까? 내가 누구를 본받을까? 억지로 그분들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내 인생은 너무 힘들고 피곤하다. 단 하루도 온전히 그분들을 흉내 낼 수 없다. 그러면 어찌하나? 나는 내 인생을 살아야겠다.

中庸에 이르기를 ‘誠者天之道 誠之者人之道’라 하였다. 나는 이 글을 이렇게 해석한다. “성실한 것은 하늘가는 길이요 성실하게 사는 것은 사람 가는 길이다.”
성실하게 살아야겠다. 성실한 것은 하늘이요 성실하게 사는 것은 사람이다. 성실하게 사는 것이 사람 가는 길이다. 성실하게 살다보면 그것이 바로 하늘가는 길이다. 사람 가는 길과 하늘가는 길이 다르지 않다.

성실한 삶은 실패가 없다. 성실함 그 자체가 성공이다. 성실히 사는 삶은 지치지 않는다. 결코 무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실하게 사는 것은 열심히 사는 것과는 다르다.
열심히 사는 것은 욕망을 이루려고 사는 것, 욕망의 삶을 사는 것이다. 열심히 사는 것은 언젠가는 인생에 회의가 든다. 욕망을 이루는 것은 결코 인생의 궁극의 목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열심히 사는 삶은 지치게 된다. 무리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열심히 살지 말고 성실히 살아야 한다.

나는 내 삶에 목적이 없다. 나도 한때는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내 삶의 목적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를 고민한 적이 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한 결과 목적을 찾고 목적을 세우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 목적이라는 것이 결국 나의 욕망이기 때문이었다.
삶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다. 그저 성실히 살 뿐이다. 굳이 내 삶에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세우신다.

진리를 품은 삶

교육이란 그 시대에 필요한 인재양성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교육은 진리와는 관계가 없다. 사람다움과도 관계가 없다. “사회에 필요한 인재양성”이다. 사회에 필요하다는 면에서 교육은 인간 개개인에게는 관심이 없다. 사회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부속품으로서의 인재양성이 목적이다.
교육의 목적이 이러한 것이니 받은 교육에 충실하고 그렇게 살다보면 사회의 부속품으로서 사는 것이다. 부속품으로서의 삶은 아무리 성공적인 삶을 산다 하더라도 자기가 없는 삶이다. 인간은 없고 부속만 있다. 결국 자아상실의 허망함만 남는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사회의 부속품을 만드는 교육에 충실함을 넘어 자신을 찾고 자신의 삶을 찾는 학문을 해야 한다. 진리의 학문을 해야 한다. 진리의 삶을 산 이들을 배우고 그들의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 내가 세상의 부속품이 아니라 내 안에 세상을 품어야 한다. 온 우주의 티끌 같은 존재가 아니라 온 우주를 품는 영적 존재여야 한다. 내게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그것일 것이다.

주체적인 삶

아브라함, 야곱, 선지자들, 사도들의 삶을 보면서 감동을 느끼는 것이 있다. 그들의 삶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선한 삶을 살아서도 아니다. 그들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그들의 삶은 치열했다. 치열한 삶은 괴로움의 연속이다. 치열한 삶은 그 당시로는 고통의 삶이지만 인생 전체로 보면 멋있는 삶이다.

그들의 삶이 멋진 것은 결코 사회의 한 부속으로 산 것이 아니라 온전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주변부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주체적 삶을 산다는 것은 중심부에 빌붙거나 거기를 동경하고 그것을 모방하면서 사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주체적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 붙들린 삶을 산다는 말이다. 사람과 싸우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싸움을 사는 삶이다. 하나님과 싸우면서 살았기에 주변부의 삶이 아니라 온전한 삶이요 평탄한 삶이 아니라 치열한 삶이며 그 어떤 삶보다도 멋진 삶이다.

노자 읽기

노자 4장 이 장의 제목을 ‘노자의 존재론’으로 잡았다.

道沖而用之(도충이용지) : 도는 비어있어서 그 쓰임에

或不盈(혹불영) : 넘치는 일이 없다.

도라는 것은 어떠한 물질개념이 아니고 시간과 공간에 갇혀있는 것도 아니니 단순하게 有와 無로 규정할 수 없다. 道 뿐만이 아니고 모든 형이상학적인 명제들이 그러하다. 혹자들은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를 구별하고자 하는데 부질없는 짓이다. 神은 道와 같이 有無로 구별할 수 없다.

노자는 도는 비어있는 것이라 했는데 꽉 차 있는 것이라 해도 된다. 노자는 꽉 차 있다는 표현보다는 비어있다는 표현이 더 좋았던 모양이다. 없음을 뜻하는 “無”는 본래 꽉차있음을 뜻하는 글자다. 기독교신학에서는 하나님을 표현하기를 “無所不在”하신 분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하나님은 우주공간 어느 곳에도 없는 곳이 없이 꽉 차 있다는 말이다.

“넘치는 일이 없다”는 말은 “남지 않는다”는 말 일터인데 이 말은 반대 표현으로 “모자라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다. 남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으니 더 바랄 것이 없다.

淵兮似萬物之宗(연혜사만물지종) : 깊은 연못과 같아서 만물의 근원이라 할수 있을 것 같다.
挫其銳(좌기예) :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解其紛(해기분) : 얽힌 것을 풀어 주고
和其光(화기광) : 빛을 부드럽게 하고
同其塵(동기진) : 티끌과 하나가 된다

道可道非常道 하고 名可名非常名하니 도를 말함에는 비유로밖에 말할 수 없다. 노자는 도를 말함에 비유로만 말한다. 예수께서도 천국을 말씀하실 때는 모두 비유로 말씀하셨다. 비유가 아니면 말하지 아니하셨다. 아무리 예수라 해도 직접적으로 천국을 말하지는 못한다. 혹 말할 수 있어서 말한다 하더라도 중생들은 못 알아 들으니 소용이 없다.

깊은 연못과 같은 것이 도다.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는 것이 도다. 얽힌 것을 풀어 주는 것이 도다. 번쩍번쩍 빛나는 것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 도다. 도는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티끌과도 같은 것이 도다.

성경의 표현은 반대다. 하나님은 시내산 꼭대기에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과 같다고 하신다. 심령골수를 쪼갠다고 말씀하신다. 묶인 것을 끊어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천국은 눈부시게 빛나는 곳이다. 이렇게 노자의 말씀과 성경의 말씀은 반대의 표현이 많다. 그러나 표현은 반대일 지라도 그 지극함에 이르러는 같다고 해도 무방하다.

湛兮似或存(담혜사혹존) : 깊고 고요하여 뭔가 존재하는 것 같다
吾不知誰之子(오불지수지자) : 누구의 아들인지 난 알 수 없지만
象帝之先(상제지선) : 上帝(상제)보다 먼저일 것 같다(象).


도라는 것은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니 존재라고 할 수 없다. 다만 깊고 고요한 가운데 느낄 수는 있을 것 같다. 노자는 “~인 것 같다”라는 뜻의 似(사), 或(혹), 象(상)자를 즐겨 사용하는데 그것은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의 근원은 무엇일까?” “도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는 마치 “하나님은 누구의 아들일까?” 라는 질문과 같다. 이러한 질문은 끝없는 질문이고 이러한 질문으로 도를 규정할 수는 없다.

대기업 상품 보다는 중소기업 상품을 이용합시다.
대형유통회사 보다는 동네 가게를 이용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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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유성구 원내로 39번길 59 <새교회> 우)34227
☎ 010-3243-2665 E-mail: khhyhy@hanmail.net
후원계좌 / 농협 453047-52-043161 김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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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2016년 6월 16일 159호 김홍한목사의 이야기 신학을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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