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나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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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을 나누라
  • 김홍한
  • 승인 2016.05.18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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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아픔을 나누라는 것

남들보다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하고
남들보다 더 우월해야 행복하고
남보다 더 예뻐야 행복하고
남보다 더 좋은 집에 살아야 행복하고
남보다 더 똑똑해야 행복한 이들은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다.
상대적 풍요로움 속에서 얻어지는 행복은 가짜 행복이다.

가짜 행복에 낄낄 거리지만
그 안에 허망함을 어찌할꼬?
자기만 못 한이 에게는 오만한 행복을 만끽하지만
자기보다 더 많이 가진 자들 에게는 비굴한 질투에 괴로워하는 것이 가짜 행복이다.

어떤이는 만족할 줄 알아야 행복할 수 있다고 한다.
지당한 말이다.
그러나 아직 갈증이 있는데
아직 배고픈데
아직 필요한 것이 많은데
스스로에게 “채워졌다. 채워졌다” 하면 채워진 것일까?
그것은 만족이 아니라 체념이다.

행복을 추구하지 말라
행복이라는 것이야 말로 허구다.
그냥 살아라.
- 이야기 신학 113호 중에서 -

모두가 행복하면 행복이 아니다. 모두가 불행하면 역시 불행이 아니다. 모두가 부유하면 부유한 것이 아니다. 모두가 가난하면 역시 가난한 것이 아니다. 행복과 불행, 부함과 가난함은 상대적인 것, 행복이라는 것은 남보다 더 우위에 있을 때 갖게 되는 감정적인 것이다.

이러한 행복은 일시적인 것, 얼마간 지속되면 일상이 된다. 일상이 되면 행복은 더 이상 행복이 아니다. 행복이 지속되려면 지금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맘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스스로가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행복은 허접한 행복이다. 행복이라기보다는 남들의 불행을 보고 위로를 받는 사악한 행복이다. 그러면 이러한 사악함에서 벗어난 성인들은 진정한 행복을 향유하는 분들일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내 가족이 불행한데 나 혼자 행복할 수 없다. 내 이웃이 불행한데 우리 가족만 행복할 수 없다. 보통의 선한 사람도 그러하니 성인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분들은 오히려 남들의 불행을 자신의 불행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니 영원한 불행에 시달리는 이들이다. 성인들이야 말로 행복과는 담쌓고 사는 저주받은 인생들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행복해도 단 한 사람 불행한 사람이 있으면 그로 인하여 고통을 겪으니 참으로 불행한 인생들이다. 세상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데 어찌 나 홀로 행복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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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오기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 내가 아는 선배목사 중 그러한 사람이 있다. 그는 평생을 구질구질하게 목회한 듯하다.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더라도 소신이 있고 자존심이 있어야 하는데 그는 오로지 큰 교회만 바라보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산다. 그러면서 툭 하면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억대헌금 할 수 있는 교인을 보내 주시면....”한다. 그건 믿음도 아니고 희망도 아니다. 요행수를 바라는 것이다.
그에게는 그러한 행운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가 비록 구질구질한 목회를 해 왔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시기에 그런 행운을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행운이라는 것은 재앙이다. 행운이 찾아오면 많은 경우 그동안의 소박한 행복이 깨져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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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에 동물원에 갔다. 거기서 철창에 갇힌 동물들을 보면서 나는 “저 동물들은 참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갇혀있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굶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천적이 우글거리고 끊임없이 먹거리를 찾아서 헤매야 하는 불안한 야생의 상태를 벗어나있기 때문이다. 혹 병에 걸리면 수의사가 치료해 줄 것이고 ...

어느 거지가 있었다. 썩어 들어가는 무릎을 드러내고 그것으로 밥벌이하는 거지다. 그것을 본 어떤 의사가 불쌍히 여겨서 치료해 준다고 했다. 거지는 거절했다. 썩어가는 무릎으로 밥벌이 했는데 밥벌이가 끊어질까 불안했기 때문이다.
장자에 나오는 말이다. 초나라 위왕이 장자를 재상으로 삼으려고 사람을 보냈다. 그때 장자는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스스로 즐길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즐겁게 살고 싶소.”

화려한 노예로 사는 것 보다는 초라한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본다면 더러운 시궁창에서의 자유로움을 잃는 것이 두려워서 벼슬살이 하는 것을 거부한다고 볼 수 도 있다. 썩어가는 무릎으로 몇 푼 동냥을 얻는 것에 만족하는 거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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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행복할까? 재벌들은 행복할까? 뭇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동경의 대상이 되는 연예인들은 행복할까? 2008년 10월, 귀엽고 발랄한 여배우 최진실이 죽음을 택했다. 취중의 어떤이는 화가 난 듯 외친다.

“돈 있지, 예쁘지, 뭇 남성들의 사랑을 받지, 그런 년이 죽으면 우리는 어떻게 살란 말이냐?”

사람들은 행복을 인생의 최고 가치로 여긴다. 돈을 쫓는 것도 돈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을 많이 가질수록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 쌀밥에 고깃국 한번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1950년대, 1960년대 우리의 대부분은 그랬다. 오늘날 쌀밥에 고깃국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데 우리는 만족할까? 웬만한 이들은 자가용 자동차를 가지고 있어도, 손에는 최첨단 휴대폰이 들려있어도 그것은 행복과는 관계가 없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말이다. 지옥 문 앞에는 이런 글이 있다. “여기 들어오는 이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지옥이 희망이 없는 세상이라면 천국은 희망으로 가득 찬 세상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희망으로 가득 찬 세상이란 지금은 매우 불만족하다는 것이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인데 지옥이 희망을 버려야 하는 곳이라면 천국은 아마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희망이 필요 없는” 곳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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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조건은 밖에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행복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인가? 불교의 가르침은 그렇다. 그리고 그 가르침보다 더 설득력 있는 가르침이 없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좀 다르다. 행복해서는 안 된다. 행복을 추구해서도 안 된다.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누가복음 6장)

예수님의 말씀이 이러하시니 감히 행복해서는 안 된다. 행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지금 행복하다면 그것은 두려운 일이다. 내 이웃의 누군가는 처절한 고통 속에 있는데 나는 지금 행복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죄악이다. 오히려 스스로 불행을 택해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욕을 먹고 누명을 쓰면 너희는 행복하다.”
(누가복음 6장)

* 해마다 5.18 직전주일은 광주 망월동 국립묘지에서 내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예수살기” 주최로 현장예배를 합니다. 금년 현장예배에 “세월호 유가족을 위로”하는 기도를 맡았습니다. 기도를 준비하면서 새롭게 느낀바가 위의 내용입니다. 5.18 광주의 희생자들과 그 유족들, 세월호의 희생자들과 그 유족들의 아픔 앞에 감히 행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 기도문입니다.


세월호 진상규명과 유가족들 위로의 기도

주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세월호를 침몰시킨 저들을 용서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용서합니까?
죄가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용서합니까?
오히려 죄를 뒤집어씌우는데 어떻게 용서합니까?
주님은 용서하실 수 있으십니까?
용서를 구하지 않는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거짓말을 기꺼이 속아줄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주님, 이 땅의 선량한 백성들은 저들의 빤한 거짓말에 어쩔 수 없이 속고 어쩔 수 없이 속아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찌하나요? 저 거짓말 하는 이들의 거짓말에서 사랑과 진실을 조금도 느낄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저들에게는 국가안보는 없습니다. 정권안보만이 있을 뿐입니다. 국민행복도 없습니다. 자신들만 행복하면 그만입니다. 국민은 빚더미위에 있어도 자신들의 주머니만 두둑하면 그만인 이들입니다. 백성을 향한 애정이 조금만 있어도 이런 저런 거짓말들에 눈 꾹 감고 속아줄 수 있겠는데 도무지 그 애정을 느낄 수가 없으니 어떻게 속아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하는 이에게 환란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 세월호 참사도 하나님의 사랑인가요? 세월호 참사를 두고 “사랑하는 이에게 주시는 환란”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잔인한 말이지요. 그 아픔에 몸부림치는 유족들과 그 터무니없는 사건에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 말은 너무 야속한 말이지요.
그러나 어찌하겠습니까? 그것이 단순히 사고가 아닌 국가권력에 의하여 저질러진 역사속의 비극이니 해석해야 합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염두에 둔다면 더더욱이 해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월호 사건은 해석되어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해석해야 합니다. 해석하지 않는 미래는 그저 운명에 맡겨 사는 삶이고 노예의 삶이며 참사가 반복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세월호에서 죽어간 생명들은 무슨 역할을 하고 갔을까?
무엇을 남겨놓고 갔는가?
홍수는 흙을 뒤집어 옥토를 만들고
태풍은 바닷물을 뒤집어 바다에 새기운을 불어 넣는다고 하는데
전쟁은 민족을 뒤집어 놓고 혁명은 사회를 뒤집어 놓는다고 하는데
세월호 사건은 무엇을 남겼으며 무엇을 뒤집었는가?

세월호 유가족들이 일본군종군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말합니다. 그동안 “무심해서 죄송하다”고, 역시 세월호 유족들에게 오래전 이런저런 참사로 가족을 잃은 이들이 말합니다. “그 때 자신들이 끝까지 싸워서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아~ 주님, 역사적으로 수많은 아픔을 겪은 이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 아픔을 그저 숙명으로만 알았습니다. 그저 당하는 이의 운명으로만 알았습니다. 나만 괜찮으면 다행으로 알고 이웃의 아픔을 외면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픔은 반복되고 계속되었습니다.

세월호는 이런 바보 같은 백성에게 하늘이 주는 가르침이라 받겠습니다. 물질 나눔만 생각하는 우리에게 “아픔을 나누라”는 것, “서로의 아픔을 나누라는 것” 내 이웃의 아픔을 나누고 내 민족의 아픔을 나누고 온 인류의 아픔을 나누라는 것으로 받겠습니다.

오 주님, 세월호 유족들에 대한 위로의 기도를 하라 하는데 부족한 저는 그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부족한 나는 감히 세월호 유족들 앞에 서지도 못했습니다. 아픔을 나누기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 그것을 안고 있는 그분들을 대한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어설픈 위로의 말이 오히려 상처에 상처를 더할 수 있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니 주님, 주님이 위로해 주옵소서.

주님, 이대로 잊으라고 하지 마옵소서. 이제 잊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하지 마옵소서. 잊으라 하시면 미치는 수밖에 없는데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 복수할 수도 없습니다. 복수하겠다면 제 가슴을 찌르는 수 밖에 없는데 어떻게 복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주님이 복수해 주옵소서.
저들의 머리위에 숯불을 쌓아 주옵소서.
감히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해 주십시오. - 아멘 - 

노자읽기, 2 장

天下皆知美之爲美(천하개지미지위미) : 세상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여기는 것이
斯惡已(사악이) : 이미 추한 것이다
皆知善之爲善(개지선지위선) : 선한 것을 선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斯不善已(사불선이) : 이미 선하지 못한 것이다
故有無相生(고유무상생) :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이 서로에서 나고
難易相成(난이상성) : 어렵고 쉬움도 서로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
長短相較(장단상교) : 길고 짧음은 비교에서 나오는 것
高下相傾(고하상경) : 높고 낮음은 기울기에서 나오는 것
音聲相和(음성상화) : 악기 소리와 목소리는 서로의 어울림에서 나오는 것
前後相隨(전후상수) : 앞과 뒤는 서로의 따름에서 나오는 것
是以聖人處無爲之事(시이성인처무위지사) : 이것이 성인은 무위로써 일을 처리하는 것이고
行不言之敎(행불언지교) :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이다

도대체 아름다움이란 무엇이고 추함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한다.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꽃 그 자체가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아리따운 여인을 보면 그 아리따움으로 인하여 한 번 더 눈길이 간다. 그런데 정말 꽃이 아름다워서 아름답다고 하는 것인가? 옛 사람들이 아리땁다고 하는 여인들이 오늘날에도 아리따울까? 그건 아닐 수 있다. 우리나라 옛 선조들이 아름답다고 한 이들을 오늘날 미인대회에 출전시키면 모두다 예선탈락이다. 옛 미인들은 키가 작고 몸매는 약간 뚱뚱해야 했으며 눈은 갸름해야 했다. 예나 오늘이나 공통의 아름다움은 곱고 흰 피부이다. 그나마 피부색은 흑인들의 경우와는 다른데 흑인들의 경우는 검고 윤이나는 피부가 아름다운 피부이다.

도대체 선이란 무엇이고 악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대개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이를 선하다 하고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이를 악하다 한다. 또한 시대에 따라서 어느 시대에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 것이 오늘날에는 큰 죄악으로 인정되는 경우들도 많다. 이렇게 자기의 이익에 따라 선악이 판단되고 시대에 따라서 선악이 뒤바뀌는 경우가 다반사이니 선악의 기준 자체가 모호하다.

미추, 선악, 유무, 난이, 장단, 고하 등은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 기준은 없다. 그래서 성인은 그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으니 無爲하고 不言할 수밖에 없다.

萬物作焉而不辭(만물작언이불사) : 모든 일 생겨나도 마다하지 않고
生而不有(생이불유) : 모든 것을 이루나 가지려 하지 않고
爲而不恃(위이불시) : 할 것 다 이루나 거기에 기대려 하지 않고
功成而弗居(공성이불거) : 공을이루어도 주장하지 않는다
夫唯弗居(부유불거) : 공을 주장하지 않기에
是以不去(시이불거) : 이룬 일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는다

공을 이루고 그 대가로 부귀영화를 누리던 이들 중에는 비명횡사한 이들이 많다. 많은 경우 공이 크다는 것은 적도 많고 시기하고 경계하는 이도 많다는 것이니 그 공으로 인한 지위를 유지하는 것도 힘들다. 그러다 시대가 바뀌고 권력이 바뀌면 공로자는 졸지에 역적이 될 수도 있다. 그 때는 이루었던 공과 그로인한 상이 화가 되어 돌아온다.
통치자의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논공행상이다. 공에 어울리는 상을 주어야 한다. 공에 못 미치는 상을 주면 섭섭해 하고 공에 넘치는 상을 주면 시기한다. 많은 경우 상을 주는 이는 인색하고자 하고 상을 받는 이들은 더 많은 받기를 원한다. 비록 공을 세웠다하나 과도한 상을 요구하고 과도한 권세를 누리다 보면 필경을 화를 당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변 사람들이 경계함은 물론 상을 주는 이도 경계한다. 혹 권세의 판도가 바뀌면 죽은 후에도 화를 당할 수 있다.
그러니 공을 세운 이는 그에 어울리는 상보다도 더 적은 것에 만족해야 할 것이고 마땅히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야 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모든 상을 거부하고 물러나는 것이 현명하다.
주역에 ‘亢龍有悔(항룡유회)’라는 말이 있다. ‘높이 오른 용은 후회할 일이 있다’는 말이다.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功은 정치적, 군사적 공이 아니라 성인이 인류를 위하여 세운 공이다. 그러한 공은 상으로 보답할 수 없고 지위로 보상할 수 없으며 숫자로 표기할 수 없다.

대기업 상품 보다는 중소기업 상품을 이용합시다.
대형유통회사 보다는 동네 가게를 이용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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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유성구 원내로 39번길 59 <새교회> 우)34227
☎ 010-3243-2665 E-mail: khhyhy@hanmail.net
후원계좌 / 농협 453047-52-043161 김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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