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유”를 포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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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유”를 포기했습니다
  • 김홍한
  • 승인 2016.05.02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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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한목사의 이야기 신학, 가족

가족

사랑이 아주 작은 사람은 그 사랑의 영역이 자기 한 몸에 그친다. 보통의 사람은 자기 가족에 한정된다. 조금 큰 사람은 일가친척과 가문, 가까운 친구와 직장 동료에 까지 미친다. 큰 사람은 그 사랑의 영역이 국가와 민족 더 나아가서 온 인류에까지 확장되고 아주 크게는 온 생태계까지 이른다. 그들은 풀 한포기 벌레 한 마리에게도 그 사랑이 미친다.

많은 경우 사랑도 거래다. 주는 만큼 받아야 한다. 주는 것과 받는 것이 균형을 이룰 때 사랑은 지속된다. 물론 주는 것과 받는 것의 형식과 내용은 다르다.

가족 간에도 그러하다. 어떤 이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적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권위주의적이 되어 순종과 복종을 강요한다. 어떤 이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열등감이 생기고 주눅이 든다.

가족의 사랑이 거래라면 가족은 세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주고받는 것이 균형을 이루면 가족은 유지 되지만 그 균형은 언젠가는 깨질 수 밖에 없고 그 때에 가족은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서로의 필요만 충족시키려는 가정은 모양만 가정일 뿐이다.

세상은 잘난 사람은 귀하게 여기고 못난 사람은 천하게 여긴다. 그러나 가족 안에는 잘나고 못난 사람이 없다. 오히려 못난 사람에게 더 큰 관심과 사랑이 가는 것이 가족이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용납하는 것이 가족이다. 가족끼리는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이만큼 해라”는 것은 가족의 모습이 아니다.

좋은 가정을 이루고 유지하려면 상당한 노력을 해야 한다. 그저 좋아하는 감정에 의하여 유지될 수 없다. 서로가 필요하고 서로에게 유익을 주는 것으로 유지될 수도 없다. 감정은 식기 마련이고 서로에게 유익은커녕 커다란 짐이 될 수 있다.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면 서로가 서로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처옥자쇄(妻獄子鎖/ 아내는 감옥이요 자식은 족쇄)

“처옥자쇄”, 이 글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크게 웃었다. 전적으로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내 씁쓸해졌다. 나는 결코 처옥자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동안 나는 이 말을 많이 생각했다. 그리고 처옥자쇄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소위 큰 인물이 된 사람들을 참 모진 사람들이라고 결론지었다. 소크라테스는 전혀 가족을 돌보지 않았다. 오히려 가족에게 짐이 되었기에 아내로부터 심한 구박을 받았다. 석가모니 부처는 아예 처자식을 버리고 출가를 했다. 말이 좋아 출가지 가출과 다름이 없다. 수많은 위인들이 더 큰 일을 한다는 명분으로 처자식을 버리고 떠났다. 과거 우리나라의 독립투사들도 역시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운다는 명분으로 부모와 처자식을 버리고 떠났다. 그래서 소위 위인들의 가족사는 비참한 경우가 참 많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그리도 모질게 처자식을 버릴 수 있었을까? 예수님은 버릴 처자식이 없었다. 돌보아 드려야 할 어머니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있으니 가능했다. 석가모니는 카빌라 성 성주의 아들이었다. 그가 출가를 해도 처자식이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톨스토이백작은 그 많은 재산을 농노들에게 분배하고서도 처자식이 먹고살 재산과 그의 저작에 대한 인세가 있었으니 가능했다. 성현이 되는 것도 주변 여건이 주어져야 가능하다.

출가하여 수행하는 이들은 주로 남쪽 나라 사람들이 많다. 남쪽나라들은 기후가 따듯하여 자연 상태 에서도 호구지책이 가능했다. 추운 북쪽나라의 성현들은 주로 귀족들에게서 나왔다. 본래 가진 것이 많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젊은 나이에는 그만큼 생각이 짧고 경륜이 짧기 때문에 성현이 되기가 힘들다. 성현들은 주로 장수를 했다. 성현이기에 장수한 것이 아니라 장수했기 때문에 성현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장수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절대빈곤은 벗어난 사람들이었다. 옛날사람들의 수명이 짧았던 것은 1차적으로는 못 먹어서 그러했다. 영양이 부족하니 병도 쉽게 걸렸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대학자들은 대부분 귀족이었고 장수한 사람들 이었다.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성현이 드물다. 가족에 대한, 특히 자녀에 대한 책임의식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 이야기 신학 10호(2009.5.16.) 중에서 -

나는 자유를 포기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라는 개념을 최고의 개념으로 삼고 있습니다. 정치적 자유, 경제적 자유, 학문의 자유, 신앙의 자유. 등등. 그러나 나는 자유를 거부합니다. 진정한 자유란 완전히, 깨끗이 소멸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럴만한 자신이 없고 그럴만한 경지에 오르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기독교에 불만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에 불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는 나의 가족들이 엄청난 속박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족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참으로 부조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러한 세상을 방관하시는 하나님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나의 깔딱거리는 내 목숨이 나의 모든 고통의 원천임을 알면서도 나의 목숨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라 주변의 모든 것과 관계하면서 존재합니다. 관계한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서로가 서로를 속박합니다.

자유의 대가는 큽니다. 함부로 자유를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자유는 지금의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유 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내가 노예의 상태에 있다하더라도 노예인한 나에게는 의·식·주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자유 하는 순간 의식주는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자유는 고독입니다.

“자유”라는 말은 함부로 할 것이 아닙니다. 부부 중 누가 “자유하고 싶다”고 하면 이혼하자는 이야기 입니다. 자녀가 자유하고 싶다고 하면 가출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부하직원이 자유하고 싶다고 하면 직장을 그만 두겠다는 것입니다. “너는 자유다”는 선언은 이제 내가 너를 책임지지 않겠다는 이야기이고 너는 나와 관계가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이가 나를 속박합니다. 결혼은 사랑하는 이에게 속박 받겠다는 것입니다. 가정은 한없이 사람을 속박합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소유한 사람은 그 소유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도 자유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로 피조물에게 속박당하고 계십니다.

자유 하고자 하는 이들이 불교 승려들인데 부모도 버리고 처자식도 버리고 일체 무소유로 살겠다는 이들입니다. 불교 승려들 중에 정말 그럴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희망 사항 일뿐 정말 그러한 이는 없습니다. 자유하겠다고 모든 것 훌훌 털고 자유 찾아 떠난다면 그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 것이니 참으로 무책임하고 모진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자유하려면 버려야 합니다. 권력으로부터 자유하려면 권력을 버려야 합니다. 돈으로부터 자유하려면 무소유 해야 합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하려면 죽어야 합니다. 가족에게서 자유하려면 가족을 버려야 합니다. 참 황당하게도 나는 이러한 식의 자유는 거지와 노숙자에게서 봅니다. 자유의 대가가 그것입니다. .....

어떤 이가 나에게 말합니다. “김목사는 참 자유로운 목사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 하나님도 자유하지 못하신데 어떻게 감히 내가 자유 할 수 있습니까? 세상에 자유인은 없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자유를 거부합니다. 아주 작은 자유를 누리려고 해도 그 대가가 너무 가혹하기 때문입니다.

굳이 자유가 있다면 생각의 자유입니다. 생각은 우주 이 끝에서 우주 저 끝까지를 순간에 오고갑니다.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와 깊은 바다 속을 마음대로 오고갑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그 이전부터 종말까지를 순간에 오고갑니다. 그리고 생각으로는 살인도, 간음도, 도둑질도 모두 가능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도전도 가능하고 배교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어쩌지요? 생각도 자유하면 안됩니다. 옛 성현들은 愼獨(신독)하라고 가르치시고 예수님께서는 “음욕을 품는 것은 간음하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아! 그러니 생각의 자유도 없습니다. 생각의 자유도 박탈당한 것입니다. 나는 적어도 생각은 자유하고 싶은데 말입니다.

자유가 억제되어야 할 이유가 또 있습니다. 자유와 평등은 상반되는 개념입니다. 자유가 확대되면 평등은 깨집니다. 역시 평등을 강조하면 자유가 억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자유가 확대되면 될수록 누군가가 고통을 당해야 하기에,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어야 하기에 나의 자유는 억압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 주님, 주님께서 저를 옭아 매셨습니다. 온갖 사랑의 쇠사슬로 저를 꽁꽁 묶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미움의 쇠사슬이라면, 욕심의 쇠사슬이라면 거침없이 끊어버릴 수 있겠는데 그 사슬이 사랑의 사슬이기에 도무지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자유”를 포기했습니다.
- 이야기 신학 30호(2010. 3.16) 중에서 -

물의 문명, 불의 문명

불을 알고 불을 이용하면서 사람은 자연에서 벗어나 솟아오를 수 있었다. 불은 솟아오르게 하는 것이다.
불은 힘(에너지)이다. 불을 이용한다는 것은 인간의 물리적 힘에 머물지 않고 다른 힘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불을 사용함으로 추위를 이긴다. 불을 사용함으로 도자기를 만들 수 있다. 불을 사용함으로 쇠를 제련할 수 있다. 불은 자연상태 에서는 구할 수 없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

불을 담는 그릇이 물이다. 물이 불을 담아 생명을 낸다. 우주에 불은 많되 물은 많지 않다. 우리가 아는 한 지구에만 물이 있어 생명이 자란다. 학자들이 다른 행성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 물이다. 물이 있다면 생명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이 불을 담지 못하면 고체다. 고체에서는 생명이 나오지 않는다. 물이 불을 너무 많이 담으면 기체가 된다. 역시 생명이 나오지 않는다.

인간의 문명이란 물을 기본으로 하고 불을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과 문명은 물과 불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불이 솟아오르게 하는 것이라면 물은 불을 담아 생명을 이룬다. 예수께서는 물세례를 받고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셨지만 사람들은 불세례를 더 중시하고 불같은 성령을 강조한다. 그것이 문제다. 균형을 잃은 것이다.

불의 문명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도 번제를 드린다. 물의 문명사람 들은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한다.

불이 고갈될 때 도시와 나라는 운명을 마친다. 중국의 왕조는 대개 2백년 정도 유지하다 망했다. 대 평원에 땔감이 고갈되면서 도시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대개 5백년이다. 중국의 대 평원에 비해 땔감이 많아서 그렇다. 신라는 경주를 수도로 천년의 역사를 이어갔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헌강왕 때에 경주에서는 “숯으로 밥을 짓는다”고 했는데 호화생활이라기 보다는 천년을 지내는 동안 인근의 모든 땔감이 바닥이 났기 때문이다. 아주 멀리서 땔감을 가져와야 하니 가볍게 숯을 만들어서 가져온 것이다. 그것도 힘들게 되자 신라는 망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도시와 국가가 망하지 않는다. 화석연료를 사용하면서부터 땔감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급하고 빠르게 발전하는 현대의 기술문명은 불(에너지)의 문명이다. 물질문명, 기술문명이다. 문명이 발달하는 만큼 엄청나게 불을 소비한다. 그러면 물의 소비는 줄었는가? 불의 소비가 늘어난 만큼 물의 소비도 늘어났다.

불은 선물인가 재앙인가?

그리스 신화에서 불은 신이 준 선물이다. 그런데 그 선물은 신들의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지극히 사랑한 프로메데우스가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다가 인간에게 준 것이다. 그 죄가 너무 커서 프로메데우스는 3천 년간 카우카소스산의 바위에 묶여서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신들의 제왕인 제우스가 프로메데우스 에게 말한다.

“프로메데우스, 장래일을 미리 아는자야! 너는 내 앞일까지 알면서도 네가 빚은 인간의 앞일은 모르는 자다. 사랑에는 작은 사랑과 큰 사랑이 있다. 네가 인간에게 기울인 것은 작은사랑이요, 내가 인간을 염려하는 것은 큰 사랑이다. 잘 들어라, 네가 내게서 훔쳐다준 불이 비록 오늘 인간의 좋은 종 노릇을 할지 모르나 장차는 인간의 나쁜 상전이 된다. ... 프로메테우스야! 너는 인간이라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 인간은 장차 저희의 부실한 믿음을 부끄럽게 여기는 대신 우리 신들이 세운 질서를 비방할 것이며, 저희가 바뀌는 대신 신들을 바꾸어 놓으려고 할 것이다. 프로메데우스야, 인간에게 미덕이 있는 것을 내 모르는 바 아니다. 그 미덕이 불을 다루면 불은 인간의 충실한 종 노릇을 한다. 그러나 불이 미덕을 태울 때는 우리의 올림포스도 잿더미가 될 것이다.”

불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한 신 프로메데우스의 선물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제우스가 경고한대로 - 인간에게 커다란 재앙일 수 있다.

노자 읽기

인류가 불의 문명에 집착하고 있을 때, 아주 일찍이 물의 문명에 관심가진 이들이 있었다. 서양에는 탈레스가 있고 동양에는 노자가 있다.

노자 8장
上善若水(상선약수) : 지극한 선은 물과 같다.
水善利萬物而不爭(수선리만물이불쟁) : 물의 선함이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툼은 없다.
處衆人之所惡(처중인지소오) : 모두가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故幾於道(고기어도) : 그러기에 도에 가깝다
居善地(거선지) : 땅에 거하기를 좋아하고
心善淵(심선연) : 그 맘은 깊은 곳을 좋아한다.
與善仁(여선인) : 인과 함께 하기를 좋아하며
言善信(언선신) : 믿음직한 말을 좋아한다.
正善治(정선치) : 정의로운 다스림을 좋아하고
事善能(사선능) : 힘을 다한 섬김을 좋아한다.
動善時(동선시) : 때에 알맞는 움직임
夫唯不爭(부유불쟁) : 다투는 일이 없으니
故無尤(고무우) : 책망 받을 일도 없다

BC 4000-2000 고대 물의 문명 탄생했다. 이 시대에는 기온이 지금보다 훨씬 높았던 때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기후는 지금보다 높은 아열대성 기후였을 것이다. 이때 황하문명, 인더스문명, 이집트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탄생했다.

문명의 발상지는 모두 물가이다. 큰 문명들은 홍수가 연례적으로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물가에서 일어났다. 물이 곧 생명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중국의 노자는 물과 어머니를 사상의 핵심으로 삼았다. 노자의 가르침을 요약한다면 부드럽고, 고요하고, 감싸주고, 겸손한 물과 어머니의 모습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지극한 선은 물과 같다)이다.
물이 생명이라면 불은 힘이다. 물은 나무를 만들고 나무는 불을 만들고 불을 가지고 쇠를 만든다. 쇠를 가지고 호미, 쟁기, 칼, 대포를 만든다. 현대문명은 불의 문명이다. 엄청나게 에너지를 소비한다. 불의 나라들(서양)이 불로 만든 쇠 대포로 불을 쏘아대며 물의 나라(동양)들을 유린했다.

물의 종교인 기독교가 불의 문화인 서양을 거치면서 불의 종교가 되었다. 예수께서 받으신 비둘기 같이 온유한(물 같은) 성령보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했던 불같은 성령이 강조된다. 그 후 기독교는 불같이 전투적이고 공격적이 되었다.

세상이 죄로 가득하여 하나님은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다. 청소 하는 데는 물이 제일이다. 작게는 어린아이 낯짝부터 시작하여 크게는 온 대지를 청소한다. 물의 속성은 이렇다.

높은 데를 피하고 낮은 곳으로 향하는 지고의 겸손히 있다.
공허하고 적적하여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만물에게 이로움을 주고도 갚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맑고 고요하여 밖의 형체를 비추어 준다.
모질 수도 있고 둥글 수도 있고 굽을 수도 있어 형체를 따른다.
때에 따라 겨울에는 얼고 봄이 되면 풀린다.
모든 더러움을 씻어 주면서도 스스로는 항상 맑고 화평하다.

그렇다고 물이 마냥 순하고 순한 것은 아니다.
물은 때때로 세상을 너무도 확실히 청소를 한다.
중국 사람들은 물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황하강의 범람위험이 있으면 그들은 피난을 간다. 가까운 산으로 피신하면 좋으련만 끝없이 펼쳐진 평원에는 피할 곳이 없다. 끝없이 이어진 피난 행렬, 굶주림과 지침에 견디지 못하여 쓰러지면 개들이 달려들어 뜯어먹는다. 개는 사람 먹고 사람은 개를 먹고 피난길은 계속된다. 혹시 범람한 황하수가 피난 행렬을 앞지르면 행렬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물이 이렇게 무서우니 예로부터 중국인들은 물을 잘 다스리는 치수(治水)를 정치의 기본으로 여겼다. 법(法)이라는 것도 사람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물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었다. 치(治)와 법(法)은 물(水)과 둑(台, 去) 이 합쳐진 회의문자이다.

하나님이 노아가 살던 시대를 물로 심판 하셨다는데, 그리고는 마음이 심히 괴로우셔서 다시는 물로 심판치 않으시겠다고 아름다운 무지개로 징표를 삼으셨다고 했으니 그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슬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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