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뜻 모르듯 국민 뜻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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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뜻 모르듯 국민 뜻 모른다
  • 김홍한
  • 승인 2016.04.18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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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주인은 과연 국민인가?

나름대로 20대 총선 선거 결과를 예측하고 이야기신학 155호를 써 놓았는데 그 예측이 완전히 빗나갔다. 허둥지둥 155호를 다시 썼다. 내 자신이 부끄럽고 한심하고 당황되기까지 하다. 그런데 나만 그럴까? 총선 결과가 이럴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아무도 없었다. 수없이 많은 여론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없었고 투표가 끝나고 출구조사를 해도 알 수 없었다.

모르는 일들

“정말 모를 일이 네 가지 있으니,
곧 독수리가 하늘을 지나간 자리,
뱀이 바위 위를 기어간 자리,
배가 바다 가운데를 지나간 자리,
사내가 젊은 여인을 거쳐 간 자리다.”
- 잠언 30장 -

모르는 일이 어디 이것 뿐이겠는가?
태풍의 진로를 알지 못한다.
지진을 알지 못한다.
내일 아침 증권시세를 모른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
남의 속을 모르는 것은 물론 내가 내 속도 모른다.

작고 개별적인 것은 몰라도 큰 것은 알 수 있다고?
어림없는 말이다. 국가와 민족의 운명도 알 수 없다.

▲ 지난 2015뇬 예수살기 성서학당 강좌에서 이야기 중인 김홍한 목사

도둑같이 온 해방

함석헌은 1945년 해방을 이렇게 말했다.

“1945년 8월 15일 갑자기 해방이 되었다..... 그만두어라, 솔직하자, 너와 내가 다 몰랐느니라. 다 자고 있었느니라. 신사 참배하라면 허리가 부러지게 하고, 성을 고치라면 서로 다투어가며 하고, 시국강연을 하라면 있는 재주를 다 부려서 하고, 영,미를 욕하고, 전향하라면 참 ‘앗싸리’ 전향을 하고, 곱게만 보일 수 있다면 성경도 고치고, 교회당도 팔아먹고, 신용을 얻을 수 있다면 네 발로 기어도 보이고, 개 소리로 짖어도 보여 준, 이 나라의 지사, 사상가 종교가 교육자 지식인 문인에 또 해외에 유랑 몇 십년 이름은 좋아도 서로서로 박사파, 선생파, 무슨 계, 무슨 단, 하와이나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미국인 심부름꾼 노릇을 하며 세력다툼을 하고, 중경, 남경에선 중국인 강낭죽을 얻어먹으며 자리싸움을 하던 사람들이 알기는 무엇을 미리 알았단 말인가? 사상은 무슨 사상이고 정치는 무슨 정치운동을 하였다는 말인가? 이 나라가 해방될 줄을 미리 안 사람은 하나도 없다. 또 설혹 어떻게 해 미리 알았다 하더라도 그래서 미리 싸웠던 사람은 하나도 없다.
알기는 그만두고 믿은 사람도 없었다. 믿었다면 무지한 민중이 무지해서 무지하게 막으로 믿었지, 학식깨나 있고 밥술이나 몸맵시 깨라도 매끈히 내고 다니는 놈에게는 하나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믿었다면 왜 그다지도 비겁하게, 그다지도 소갈머리 없이 하였을까?”
-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중에서 -

해방은 아무도 모르게 도둑같이 왔기에 함석헌은 해방을 “하늘의 선물”이라고 했다.

“이 해방은 하늘에서 온 것이다. 아무도 모른 것은 아무도 꾸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꾸미지 않고 온 것은 하늘의 선물이다.”
-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중에서 -

하늘의 뜻을 모르듯이 국민의 뜻도 모른다

수천만, 수억만 대중의 마음을 모른다. 국민의 표심을 알 수 없다. 여론조사로 알 수 없다. 투표가 끝나고 출구조사에서도 모른다.
개표를 해 봐야 안다. 그러면 개표하면 국민의 맘을 제대로 안 것일까? 역시 그것도 두고 보아야 한다. 투표결과로 나온 국민의 맘은 역시 그 맘의 일부일 뿐 진짜 국민의 맘을 알았다고 할 수 없다.

국민의 표심을 모르는 것은 한 두 번이 아니다. 2002년 12월, 16대 대통령선거에서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리라는 것을 국민의 대다수가 예측하지 못했다. 선거 전날 정치를 같이 하겠다던 정몽준의원이 지지를 철한다고 발표했다. 아마도 그는 노무현 후보는 절대로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확신한 모양이다. 그도 그렇지만 돈 감각에 뛰어난 투기꾼들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당시 노무현 후보는 지금의 세종시로 행정수도 이전을 공약했는데 그의 당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더라면 영악한 투기꾼들에 의해서 그 일대의 부동산 가격의 변동이 있었을 것인데 전혀 그런 현상이 없었다. 그리고 대선이 끝나고서야 그곳의 부동산 가격은 폭등하기 시작했다. 덩달아 가까운 대전의 부동산 가격도 많이 올랐다.

국민의 뜻을 모르는 것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국회가 가결한 것이다. 대통령의 직무는 정지되고 대법원의 최종판결을 기다리게 되었다. 노무현 정권이 출범한지 13개월 되던 때였다. 당시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자민련 의원 195명 중 193명이 찬성하여 가결한 것이다. 그리고 한 달 뒤 17대 총선이 치러졌다. 그 총선에서 놀랄만한 일이 일어났다. 겨우 47석이었던 열린우리당이 152석을 차지했다. 한나라당은 121석, 가장 큰 피해를 본 당은 새천년민주당으로 겨우 9석을 확보했고 자민련은 4석을 얻었다. 심히 분노한 국민들이 그렇게 판결한 것이다.
국민의 뜻이 이러하니 정치인들은 경악했다. 그리고 국민의 뜻에 무조건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절차에 관계없이 대법원은 5월 14일 대통령탄핵 기각결정을 내렸다. 그 잘난 국회의원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국민의 뜻과 정서를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을까? 그것이 너무도 신기하다.

금번 4월 13일 치러진 총선도 우리의 예측을 크게 빗나갔다. 야권이 분열된 상태에서 치른 선거기에 그 결과가 여당은 과반수를 넘어 개헌까지 할 수 있는 의석까지 가능할 수 있다고 전망했는데 그 전망이 여지없이 깨진 것이다. 새누리당은 그렇게 참패한 것에 놀라고 더민주당은 기대보다 훨씬 좋은 성적을 거두었기에 놀랐다. 호남을 국민의당이 싹쓸이 한 것도 놀랄 일이다. 영남에서 야당인사가 여러 명 당선된 것도 놀라운 일이고 호남에서 여당인사가 당선된 것도 놀라운 일이다.

정치에 공식은 없다.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 세상이고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민심이기에 정치에는 어떠한 공식이 있을 수 없다. 정치에 공식은 없지만 원칙은 있다. 원칙을 이야기 하면 그것은 이미 정치라기보다는 철학이다. 정치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무엇이든지 원칙이 깨질 때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가 힘들다. 이번 선거결과는 이런 저런 사안들에 대한 판결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 정치원칙을 어긴 것에 대한 판결이라고 생각한다.
짧은 생각이지만 나름대로 정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민주주의
국가의 주인은 과연 국민인가?


학교는 학생들을 위해서 존재하지만 학교의 주인이 학생은 아니다. 학생은 학교의 허락을 받아 입학하고 등록금을 내고 교육을 받으며 교육이 끝나면 졸업한다. 그런 학생이 어떻게 학교의 주인일 수 있겠는가? 학교의 주인은 학문이다.

▲ 304인을 추모하는 기독인 기도회 모습(사진 한현실님 제공)

국가는 국민을 위해서 존재하지만 국가의 주인이 국민은 아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살아가는 국민이 이 나라의 주인이라면 국민투표해서 이 나라를 미국에 팔아도 되고 일본에 팔아도 된다는 이야기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반만년 역사가 주인이고 자손만대 후손들이 주인이다. 결코 오늘을 사는 우리가 온전한 주인일 수 없다. 보이는 것은 본질이 아니다. 본질은 항상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나라의 주인이 역사이지만 역사는 실질적으로 사람의 이야기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국민이 나라의 주인역할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국민도 실질적으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다수가 주인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주인이 아니라는 것과 같다.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말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동시에 지극히 허구다. 국민은 흩어져 있는 다수다. 흩어져 있으니 뜻도 흩어져 있다. 도대체 국민의 뜻이라는 것이 있을까? 있다 하더라고 대부분 말초적인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국민의 뜻은 없다. 지도자들이 필요에 의해서 만드는 것이 국민의 뜻이다.
국민의 뜻을 어떻게 만들까? 많은 경우 그것은 선전과 선동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소위 언론을 통해서 만들고 여론조사결과를 국민의 뜻이라 한다. 국민의 뜻이라는 것을 만듬에 순리적으로 만들고 합리적으로 만들면 좋지만 억지로 만들고 강제적으로 만들고 조작한다면 그것은 더할 수 없는 범죄다.

민중은 어리석다. 민중은 일차원적 사고를 한다. 민중은 간사하고 잔인하다. 민중은 어리석기에 권력자들은 항상 민심을 조작한다. 예수의 죽음을 보라. 선전선동에 의하여 민중들은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친다.

군중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 하고 소리쳤다.(마27:25)

민중은 지도자의 작은 배려에 감격하여 순종하고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 권력의 공백이 생기면 그 틈을 비집고 폭동을 일으킨다. 그나마 폭동의 지도자가 없으면 즉각 약탈과 무자비한 살상을 자행한다. 민중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강력한 권력자를 원하고 거기에 순종한다.
‘민심은 천심’이라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하늘의 뜻이 민중을 향해 있다는 의미에서만 옳다.

오늘날 민중들은 많이 성숙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은 의(義)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이(利)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면 민중은 정말 힘도 없고 뜻도 없는 무지렁이일까? 민중은 거대한 힘의 덩어리다. 정도전은 말했다.

“백성은 약하지만 힘으로 위협할 수 없고, 지극히 어리석지만 지략으로 속일 수도 없다. 마음을 얻으면 복종하고, 그것을 얻지 못하면 가버린다. 그 가고 옴 사이에는 추호의 여지도 없다.”
-조선경국전 중에서-

지도자의 자세

올바른 지도자는 민중의 욕망에 부응하는 자가 아니다. 무엇이 진정 민중에게 도움이 되는가를 생각하고 수행하는 자다. 옳은 일이라면 대다수 민중이 반대해도 극복해야 하는 것이고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민중을 설득할 수 있는 자가 유능한 지도자다.
민중을 두려워하는 지도자는 옳은 지도자가 아니다. 민중에게 존경을 받고자 하는 지도자도 옳은 지도자가 아니다. 민중의 생사를 짊어졌기에 그것이 두려운 것이고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이 두려운 것이다.

빌라도는 민중을 두려워했다. 빌라도는 민중을 설득하지도 못했다.

빌라도는 그 이상 더 말해 보아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기세가 보였으므로 물을 가져다가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너희가 맡아서 처리하여라.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하고 말하였다.(마27:24)

노련한 정치인 빌라도, 정치적 감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의로운 정치인은 아니다. 빌라도가 죄 없는 개인을 살리기 위해서 - 로마가 자랑하는 - 법대로 판결했는가? 그는 불의와 타협했다.
어차피 인생이란 타협하면서 사는 것, 불의한 세상에서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불의와 타협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에서 타협하느냐가 문제다.

무죄한 자를 죽는데 내어 주는 빌라도의 마음이 편치 않다. 그는 거림직한 마음을 털어내려고 “나는 책임 없다”고 공표했다. 자기 위안일 뿐이다. 그래서 책임 회피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말단 병사에게도 책임이 있다. 아무리 전쟁터라고 해도 무고한 양민임에 틀림없는 이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에 따랐다면 그가 비록 말단 병사라도 책임을 져야 한다. 지휘관이라면 더 말할 것이 없다. 하물며 최고 권력자가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해석 되어야 할 세월호 참사

임경업장군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듭 거듭 겪는 민족의 고난을 두고 말했다.

“하늘이 미워하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

이를 해석하여 함석헌은 말했다.

“환난을 이기는 것은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는 것밖에 길이 없다.”

4.16 세월호 참사를 두고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한다면 그 아픔에 몸부림치는 유족들과 그 터무니없는 사건에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너무 야속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세월호 사건을 단순히 사고로 인한 가족들의 슬픔이 아닌 국가권력에 의하여 저질러진 역사속의 비극이요 더 나아가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염두에 둔다면 그렇게 밖에는 해석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굳이 체념하겠다면 미치는 수밖에 없고 굳이 복수하겠다면 제 가슴을 찌르는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사실 나도 해석이 되지 않는다. 2년 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해석을 요구하는 것이 4.16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2년 가지고 되겠는가? 20년을 해석해야 하고 200년을 해석하야 되지 않겠는가?

먼 산은 그 윤곽이 뚜렷하지만 가까이 가면 갈수록 알 수 없는 것이 산이다. 역사도 그렇다 남의 나라 역사는 몇 마디 글과 말로 정의 할 수 있지만 내 나라 역사는 그게 되지 않는다. 내 나라 역사도 먼 옛날로 올라갈수록 정리되는 바가 있지만 현대사는 정말 어렵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그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필코 알아야 하고 해석해야 하는 것이 현대사다. 그래야 미래를 살 수 있다. 현대를 해석하지 않는 미래는 그저 운명에 맡겨 사는 숙명적인 삶이다. 노예의 삶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세월호 사건은 해석되어야 한다. 억지로라도 해석해야 한다. 아니하면 안 된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그 역할이 있다. 무슨 역할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역할이 있다. 그러면 세월호에서 죽어간 생명들은 무슨 역할을 하고 갔을까? 무엇을 남겨놓고 갔는가? 홍수는 흙을 뒤집어 옥토를 만들고 태풍은 바닷물을 뒤집어 바다에 새기운을 불어 넣는다. 전쟁은 민족을 뒤집어 놓고 혁명은 사회를 뒤집어 놓는다. 그러면 세월호 사건은 무엇을 남겼으며 무엇을 뒤집었는가?

너무도 간단하게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그냥 사건이고 사고다.” “남기긴 무엇을 남기느냐? 뒤집긴 무엇을 뒤집느냐? 그냥 늘 상 일어날 수 있는 사고이던지 통치과정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사건이다”고 과거 오로지 힘에 의하여 다스려 지던 짐승의 때라면 그럴 수 있다. 광기로 가득하여 눈을 번뜩이며 사냥감을 쫓는 사냥개처럼 백성을 사냥하던 군부독재의 시대라면 그럴 수 있다. 개명천지 21세기에 일어난 일이기에 그냥 사건이고 사고라고 할 수 없다.

내가 착각하였는가? 비록 21세기가 되었다지만 아직 우리는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는데 그것을 잠시 잊고 개명천지라고 착각한 것일까? 나와 같이 개명천지라고 착각한 무수한 민중들을 향하여 “까불지 말라, 까불면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저 사악하고 교활하고 무자비한 권력자들의 공갈과 협박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야만의 시대인가?

세월호 유가족들이 일본군종군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말한다. 그동안 “무심해서 죄송하다”고, 역시 세월호 유족들에게 오래전 이런저런 참사로 가족을 잃은 이들이 말한다. “그 때 자신들이 끝까지 싸워서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아~ 나는 그들의 말에서 세월호 사건의 해석을 본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아픔을 겪은 이 백성이다. 그런데 그 아픔을 그저 숙명으로만 알았다. 그저 당하는 이의 운명으로만 알았다. 나만 괜찮으면 다행으로 알았다. 그래서 그 아픔은 반복되고 계속되었다. 이런 바보 같은 백성에게 하늘이 주는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이란 이것이다. “나눔”하면 기껏 물질 나눔만 생각하는 우리에게 “아픔을 나누라”는 것이다. 내 이웃의 아픔을 나누고 내 민족의 아픔을 나누고 온 인류의 아픔을 나누라는 뜻이다.

금번 박근혜 정권에 대한 심판은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외면을 심판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주체가 정부였기 때문이다.

20대 국회여, 당신들의 역할은 분명하다. 국민들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고 그 아픔을 나누는 것이다. 그러면 된다. 당신들이 혹 무능하여 여러 시행착오를 겪는다 하더라도 국민들은 용납할 것이다. 마치 무능하고 못난 아비라도 자녀들은 아비를 외면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여보적자(如保赤子)”라는 말이 있다. 대학에 나오는 말로 “갓난아기(赤子) 돌보듯 한다.”는 말인데 나라를 다스리는 이는 모름지기 백성을 갓난아이 돌보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철없는 젊은 엄마가 갓난아이를 키우는데 경험이 없어서 전전긍긍한다. 오직 하나 있다면 아기를 끔찍이 사랑하는 그 맘 하나가 있다. 그 맘으로 엄마는 아기를 키울 수 있다.

* 지면관계상 노자읽기는 쉽니다.

* 이야기 신학 독자들에게 작은 실천운동을 제안합니다. 함께 동참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대기업 상품 보다는 중소기업 상품을 이용합시다.
대형유통회사 보다는 동네 가게를 이용합시다.

작은 실천이 많은 것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선거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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