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잃은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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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잃은 사회
  • 김홍한
  • 승인 2016.04.07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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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한목사의 이야기 신학 154호

꿈을 잃은 사회

오늘날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가 침체된 것이 아니다. 정치가 혼탁한 것도 아니다. 청년실업이 심각한 것도 아니다. 저출산도 문제가 아니다. 심한 빈부격차도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꿈을 잃은 것이다. 개개인이 꿈을 잃었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민중들이 꿈을 잃었다. 아무리 성실히 일해도 빚이 늘어나니 어쩌란 말인가? 기껏 꿈이라고는 복권당첨의 허황된 꿈밖에 없다. 청년이 꿈을 잃었다. 게다가 나라도 꿈을 잃었다. 민주주의가 저만치 멀어졌다. 민족도 꿈을 잃었다. 통일이 까마득히 멀어졌다. 그리고 과거 지긋지긋 했던 폭력이 되살아나고 있다. 가장 크고 가장 잔인한 국가폭력이 되살아나고 있다. 군대마귀 보다 더 조직적이고 치밀하고 거대한 국가마귀다.

폭력사회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친구>는 학교폭력의 생생한 모습을 담고 있다. 영화의 내용은 학생들의 폭력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 배경이 되는 시대에 학교폭력의 주범은 교사들이었다. 교사들의 무자비하고 잔인한 폭력에 학생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였다. 교사들의 폭력이 너무 커서 학생들 간의 폭력은 그냥 청소년들의 성장과정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아무도 교사들의 폭력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을 말하면 그것은 선생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일종의 폐륜으로 여겼다.


일제강점기에도 조직폭력배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마치 협객이나 되는 냥 미화되었다. 일제의 폭력이 너무 거세어서 조폭들의 주먹싸움은 오히려 낭만처럼 여겨진 것이다.

해방 후 이 땅의 최고의 폭력집단도 국가였다. 자유당 때의 국가폭력은 무차별적 이었다. 국가가 국민을 마치 사냥감 대하듯 하였다. 집단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재판도 없이 그냥 죽였다. 골짜기로 끌고 가서 죽였다. “골로 갔다”는 말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배에 태워서 바다가운데에 그냥 수장하였다. “물먹었다”는 말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자유당 때의 국가폭력이 즉흥적이고 무차별적이었다면 군부독재시대에의 폭력은 조직적이고 계획적이었다. 중앙정보부가, 군 보안사가, 경찰이 목표를 세우고 의도적으로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대표적인 조직폭력배 김두한, 그는 이승만의 충실한 개가 되어 닥치는 대로 물어뜯었다. 그러던 그가 군부독재시대에도 그렇게 행동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그리고 폐인이 되었다. 몸은 야위고 눈빛은 흐려졌으며 말은 어눌해졌다. 군부독재의 폭력은 조직폭력배를 이용할 필요조차 없는 강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국가폭력이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사라졌다. 국가폭력이 사라지고 나자 비로소 눈에 보이지 않던 폭력이 보이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교사들의 폭력이 사라졌다. 그리고 비로소 학생들 간의 폭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군대 내에서의 의문사가 대폭 줄어든 이후에 비로소 군대내 폭력이 문제되기 시작했다. 그냥 묻혀 졌던 폭력의 희생자들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에서의 조직적이고 폭압적인 폭력이 줄어들면서 비로소 가정폭력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남편에게 맞아죽고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부모에게 죽임을 당했는지 모른다. 그러한 죽음들은 그냥 묻혀 졌었다. 특히 어린이들의 죽음은 거적에 말아서 산에 묻으면 그만이었다.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 보다 더 큰 힘 앞에서는 너무나도 나약하고 비굴한 존재가 된다. 너무 비굴해서 불쌍해 보일정도다. 처자식을 두들겨 패는 찌질한 남자들이 그러하고 조직폭력배들의 모습이 그러하며 자유당정권과 군부독재권력이 미국에 보인 태도가 바로 그러했다.

일전에 취객이 파출소에서 난동을 부렸다면서 공권력이 너무 약하다고 한탄하는 보도를 본적이 있는데 나는 그 보도를 보면서 “아~ 우리나라가 참 좋아졌구나. 이제 취객이 파출소에서 난동을 부릴 수도 있다니...” 했다. 국민에게 군림하는 공권력이 아니라 국민의 뒤치다꺼리 하는 공권력의 모습에서 나는 위로를 받았다.

아! 그런데 그것도 잠깐 스멀스멀 국가폭력이 되살아나고 있다. 살겠다는 민중에게 폭력을, 억울해 가슴을 치는 이들에게도 폭력을, 거짓과 불의에 항거하는 이들에게도 폭력을.... 저들은 국가안보와 사회질서가 폭력으로 유지되는 줄 아는가보다. 그런데 그 국가안보와 사회질서라는 것조차도 실은 저들의 권력안보요 권력질서다.

목숨을 빼앗는 폭력 앞에는 인권, 노동쟁의, 환경운동, 시민운동 등은 없다. 공정한 재판도 없다. 의로운 자들의 죽음만 있을 뿐이다.

국가폭력이 되살아나면 폭력은 더 이상 폭력이 아니라 일상이 된다. 폭력이 일상화 된 사회는 지옥이다.

함석헌은 말했다.
“씨ᄋᆞᆯ은 어느 역사에서나 참혹한 존재지만, 이 씨ᄋᆞᆯ 같은 것이 어디 또 있느냐? 이것은 먹이를 아니 주고 짜 먹는 염소다. 짜 먹다 못해 피가 나왔다. 그래도 짜먹었다. 마지막에 죽는 날 가서야 잘못인 줄 알지만 그 때는 짜 먹던 놈, 저도 죽었다.”

꿈을 꾸자,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꿈을 꾸어야 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어야 한다. 꿈은 제멋대로 꾸는 꿈은 꿈이 아니라 욕망이다. 꿈은 하나님이 꾸어주셔야 꿈이다. 하나님으로부터 꾸어와야 꿈이다. 나의 한글풀이로 “꿈”은 “꾸어옴”의 준말이다.

이루어질 수 있는 꿈, 더욱이 타락한 꿈은 결코 꿈이 아니다. 그저 천박한 욕망일 뿐이다. 이루어질 수 있는 꿈은 꿈이 아니다. 그 꿈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또 다른 꿈을 꾸어야 하니 그것은 일시적인 목표일 지언정 꿈은 아니다. 진정한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루어 질 수 없다. 그래서 영원하고 진정한 꿈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진정한 꿈이란 무엇인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그것은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는 도무지 이루어 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루려고 해야 하는 것이 사명이고 끝내는 이루어지리라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 나라는 가는 것이 아니고 오는 것이다. 무지하고 무능한 이들이 하나님 나라를 가는 줄 아는데 하나님 나라는 가는 것이 아니고 도래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나라는 한 번 에 오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거듭거듭 오는 것이다. 이미 왔다 하면 거짓이다. 이미 이루었다 하면 우상이다.

공산주의는 노동자 농민이 다스리는 평등과 평화의 사회를 꿈꾸었다. 너무나도 훌륭하고 너무나도 당연한 꿈이다. 그런데 그 꿈을 이루었다 했다. 끊임없이 이루어야 할 것을 이미 이루었다고 했으니 거짓이다. 그래서 망했다. 그런데 아시는가? 망한 것은 제도로서의 공산주의지 이상으로서의 공산주의가 아니다. 이상으로서의 공산주의는 결코 망할 수 없다.

종교가 꾸는 꿈

종교가 타락하면 사람이 타락하고 도덕이 타락한다. 정치도 타락한다. 그러면 꿈도 타락한다. 꿈조차 타락했다면 이미 망한 나라요 망한 민족이다.

혹자는 유교 하면 사대주의라 비판하고, 불교 하면 숙명주의라 비난하며 기독교 하면 친미 반공을 연상한다. 그런데 너무 단순한 생각이다. 어디 유교가 사대사상을 가르쳤는가? 한반도의 자존심 없는 유학자들이 사대사상을 가진 것이지. 불교가 어디 숙명사상을 가르쳤는가? 한반도의 불교승려들의 옹졸함이 숙명사상에 빠져든 것이지. 기독교가 어디 친미 반공을 가르쳤는가? 한반도의 무지한데다가 자존심까지도 없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그리한 것이다.

신라가 불교 때문에 망했다고? 엉뚱한 소리다. 잘못이 있다면 천박한 중에 있고 절에 있지 어찌 불교에 있느냐? 조선이 유교 때문에 망했다고? 유교에서 사대사상을 배웠다고? 역시 엉뚱한 소리다. 잘못이 있으면 고린내 나는 유학자에게 있지 어찌 유교에 잘못이 있겠느냐? 오늘날 한국역사의 왜곡됨에 기독교의 잘못이 있다고? 역시 엉뚱한 소리다. 잘못이 있으면 목사에 있고 교회에 있지 어찌 기독교에 있느냐?

기독교라면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야지 어찌 미국을 따르는가? 미국이 기독교냐? 반공이 기독교냐? 자본주의가 기독교냐? 썩어 문드러지고 욕망이 가득한 목사요 그 목사가 이끄는 교회가 오늘날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를 욕망의 화신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썩은 목사들은 성서해석조차도 그렇게 한다. 눈이 썩었으니 성서를 보아도 그렇게 본다. 돈 놓고 돈 먹는 노름방 같은 자본주의를 기독교의 경제원리라고 한다. 선량한 개인들을 구조악으로 묶고있는 사탄의 공중권세에게 복종하란다.

목사와 교회의 잘못을 무엇으로 바로잡을까? 목사와 교회의 잘못은 역시 예수 복음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예수 복음만이 절대 진리라고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복음에서 나왔는데 그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어디에서 구원을 바란단 말인가?

도무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는 것이 종교다. 그 꿈을 꾸는한 종교는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다. 하나님이 꾸어주시는 꿈을 꾸자, 하나님으로부터 꾸어온 꿈을 꾸자.

인생들이 꾸는 꿈

종교는 마땅히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꾼다고 하겠지만 불쌍한 인생들은 무슨 꿈을 꿀까? 불쌍한 인생들에게까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라한다면 어려운 일이다. 대중은 손에 잡히는 것을 원한다. 그래서 거짓된 성직자들은 민중들을 향하여 말한다. “구체적인 꿈을 꾸라”고,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라고”

불쌍한 인생들 개개인에게 어떠한 목적을 강요하는 것은 거짓이다. “목적”이라는 것 자체가 거짓이다.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 진정 예수가 오신 뜻을 모르는 이들은 “예수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한다” 예수께서 그 소리를 들으면 크게 화내실 말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는데 예수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면 예수께서는 목숨을 거두러 오신 분이란 말인가? 이익사회, 세상사회에서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위해서 죽는다. 목자가 양을 잡아 먹는다. 그러나 진리의 세계에서는 반대다. 자식을 위해서 부모가 죽는다. 제자를 위해서 선생이 죽는다. 목자가 양을 위해서 죽는다. 세상을 위해서 예수께서 죽는다.

한여름에도 얼음이 언다는 밀양 천황산 석굴 속에서 허준은 스승의 유해를 만난다. 스승이 제자에게 자신의 몸을 내 주었다. 스승의 유언대로 허준은 스승의 유해를 3일 동안 해부해 봄으로 비로소 사람을 알게 되었다. 스승의 유해를 매장하면서 허준은 울부짖는다.

“천지신명과 스승님은 제 맹세를 들어주소서. 만일 이 허준이 베풀어 주신 스승님의 은혜를 잠시라도 배반하거든 저를 벌하소서.... 또 이 허준이 의원이 되는 길을 괴로워하거나 병든 이를 구하는데 게을리 하거나 약과 침을 빙자하여 돈이나 명예를 탐하거든 저를 벌하소서 이 고마움을 영원히 잊지 않으오리다.”

그 스승에 그 제자다. 참 스승은 제자에게 모든 것을 준다. 역시 참 제자는 스승에게서 받은 은혜는 스승에게 갚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갚는다. .... 예수께 목숨을 바치지 마라, 예수로부터 받은 은혜는 예수에게 갚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갚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목숨을 바치라고 하는 것은 가짜다. 사람은 때로는 너무 어리석다. “돈 바쳐라”그러면 “저건 가짜다” 하고 돌아서지만 “목숨을 바쳐라” 그러면 “저것이야말로 진짜다” 하고는 환장하고 달려드는 경우가 있다. 종교가 신도들을 향해서 목숨을 바치라 한다. 국가가 국민을 향해서 목숨을 바치라고 한다. 그 때 벅찬 감동으로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이들이 있다. 거짓이다. 속는 것이다. 어떤 조직이 조직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라고 한다면 거짓이다. 진리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게 하는 것이니 삶보다 더 중한 것이 없다. 종교도 진리도 사람이 사람답게 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다. 때로 사람은 사람답기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지만 그것은 온전히 자발적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어야지 강요되거나 조작되거나 유도되거나 할 때 그것은 거짓이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여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의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 하셨다. 예수를 위해 살지 말고 너희 자신들을 위해 살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요구하시지 않는 목숨을 누가 감히 요구하는가? 틀림없이 거짓이다.

그냥 산다

왜 예수님을 믿을까? 왜 하나님을 공경해야 할까? “왜?” 하고 묻지를 마라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에는 목적이 없다.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는 것은 그분이 주님으로 믿어지니 믿는 것이지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분이 허락하시고 또 내가 그렇게 부르고 싶어서 부르는 것이지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다. 만일 예수를 주님이라 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는데 어떠한 목적이 있다면 예수님과 하나님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사랑에도 목적이 없다. 부모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여인을 사랑하는 것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지 목적이 있을 수 없다.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다.

그러고 보니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김상용 시인은 길지 않은 그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를 “왜 사냐건 웃지요.”로 마무리한다. 나는 왜 사냐고 묻는 다면 “그냥”이라고 대답한다. 예수님을 왜 믿느냐? 해도 “그냥”, 하나님을 왜 믿느냐고 해도 “그냥”, 왜 목회를 하느냐고 해도 “그냥”, “그냥”, “그냥”, “그냥”.

“生命”을 왜 “生命”이라 했을까? 生命은 (生)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러니 生命은 天命이다. “왜 사냐고?” 天命이니까 산다.

생명의 우리말은 삶이다. “삶”은 “사람”의 준말이요 “사람”은 “사랑”과 같은 말이다. “왜 사냐고?” 사람이니까 살고 사랑하니까 산다.

노자 읽기

논어 연재를 마치고 노자 읽기 두 번째, <노자>는 <논어>에 비하면 양이 매우 적다. 내용은 적지만 그 내용이 함축적이고 역설이 많아 생각의 비약을 하지 않으면 얻을 것도 없고 남는 것도 없다. 그러나 생각의 비약을 하다보면 자칫 억지해석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노자의 가르침 자체가 억지가 적지 않으니 해석하는 이도 억지를 쓸 수밖에.

소위 합리적이라는 것이 정말로 합리적일까? 역설이라는 것은 불합리 하지만 오히려 본질을 들추어내기에 역설이다.

지난 호에 노자 1장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을 다루었다. 1장의 남은 부분을 이어간다.

無名天地之始 :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 천지의 시작이다
有名萬物之母 :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 만물의 어머니다
태초에는 당연히 이름이 없었을 터이니 “無名天地之始”이다.

상대가 있으면 구별하게 된다. 구별되면 부르게 된다. 그래서 有名이다. 이름을 누가 부를까? 만물을 낳으신 어머니가 부른다. 만물이 또한 어머니를 부른다. 그래서 “有名萬物之母”다.

故常無欲以觀其妙(고상무욕이관기묘) : 그러므로 언제나 무욕하면 그 오묘함을 볼 수 있다.
常有欲以觀其徼(상유욕이관기요) : 언제나 하고자 함이 있으면 그 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徼/ 구할요
此兩者同(차량자동) : 이 두 가지는 근원 같으나
出而異名(출이이명) : 나타나 이름이 다르다
同謂之玄(동위지현) : 같이 이를 신비롭다고 말한다

無慾하면 오묘함을 볼 수 있고 유욕하면 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욕이라 함은 자연 상태다. 자연 상태이면 그 자체가 오묘함이다. 유욕이라 함은 목적이 있는 것이다. 목적이 있으면 의지가 집중된다. 집중하면 길이 보인다.

무욕한 이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고 유욕한 이는 하나님께 요구하는 사람이다. 온전히 무욕한 이는 없다. 그리고 온전히 자연을 벗어난 이도 없다. 사람은 무욕과 유욕의 중간존재다.

玄之又玄(현지우현) : 신비롭고 또 신비로우니
衆妙之門(중묘지문) : 모든 신비의 문이다

사람은 하나님도 모르고 자신도 모른다. 그래서 아득하다. 아득하여 가물가물 한 것이 “玄”이다. “검다”와 “가물가물하다”는 같은 말이다.

사람만큼 알기 어려운 존재도 없다. 사람이 사람을 아는 것이 모든 학문의 기본이다. 사람을 어떻게 아는 고 하니 자신을 알면 사람을 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원이라 했는데 사람도 모르고 사람 자신도 모르는데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무어라 말할 수 도 없는 하나님을 어찌알까? 그래서 玄之又玄이다.

그래도 알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이고 사람이고 자기 자신이다. 어쩔 수 없이 저 자신을 살펴야 한다. 저 자신을 아는 것이 바로 모든 신비를 푸는 열쇠고 문이다.

* 이야기 신학 독자들에게 작은 실천운동을 제안합니다. 함께 동참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대기업 상품 보다는 중소기업 상품을 이용합시다.
대형유통회사 보다는 동네 가게를 이용합시다.
작은 실천이 많은 것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선거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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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유성구 원내로 39번길 59 <새교회> 우)3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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