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 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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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한
  • 승인 2016.03.16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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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하나님은 역사를 거꾸로 돌리시는가?

아! 개성

개성이 어디인가? 고려 500년의 도읍지다. 개성의 관문인 벽란도에는 중국인, 일본인은 물론 서역인, 동남아인들까지 세계각지의 상인들이 북새통을 이루었다.

조선이 건국되고 개성은 선죽교에 남아있는 정몽주의 혈흔과 함께 망국의 흔적으로만 남았다. 조선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평양도 버렸고 동시에 대륙을 잊었다. 평양을 한갓 기생의 도시로 만들어 버리고 멸시와 천대로 일관했다.


한국전쟁당시 개성은 무자비한 톱질전쟁의 와중에 뜻있고 의기 있는 이들은 다 죽었다. 500년 도읍지의 영광은 고사하고 개성상인의 영악함마저도 사라졌다. 그리고 개성은 정치도 없고, 문화도 없고, 경제도 없는 군사도시가 되었다.

그런 개성이 되살아났다. 극심한 군사적 대치를 뚫고 그곳에 평화공존의 공간이 만들어 졌다. 그곳은 옷 만들고, 냄비 만들고, 가방 만드는 공단이 아니다. 그곳은 평화의 공장이었다. 그런데 제국주의 망령의 하수인들에 의해 개성이 또다시 황폐한 곳이 되었다. 6백 여 년을 기다리다가 겨우 일어서서 한반도 평화의 처음이 되었는데 그 처음을 짓밟았다.

아! 아! 개성이여, 한반도 평화의 공장 개성이여, 남북한 모든 이들이 지성으로 키우고 보호해야 하건만 이렇게 허무하게 네 새싹이 짓밟힐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이 땅의 엘리트라 자부하고 올곧은 지성인이라 자부하는 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으며 유구한 역사의 선조들의 靈들은 영영 잠들었단 말인가?

개성을 살려 내자. 개성은 되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끝내는 되살아 날 것이다. 단순히 공단으로 되살리자는 것이 아니다. 개성은 통일 조국의 불씨, 통일 조국의 수도가 서울이 안 된다면, 역시 평양이 안 된다면 개성보다 좋은 곳이 또 어디 있으랴?

어찌하여 하나님은 역사를 거꾸로 돌리시는가?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는 사회가 의로운 사회다. 우리는 그동안 사건은 있는데 책임지는 이 없는 모습을 수없이 목격해 왔다. 누군가가 책임을 진다하더라도 그가 진정 책임자 인가 의심이 드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데 나는 이 “책임소재”에 대해서 의문이 든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에서 어떤 일이던지 개인이나 특정 기관, 집단이 온통 책임을 뒤집어 쓸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대통령이 역사의 큰 오점을 남기는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고 한다면 그것이 대통령 한 사람의 잘못인가? 참모들은 책임이 없는가? 장차관은 책임이 없는가? 여당 정치인들, 야당정치인들은 책임이 없는가? 그들을 선거에서 뽑아준 국민들은 책임이 없는가? 거슬러 올라간다면 우리의 선조들은 책임이 없는가? 함석헌은 말하기를 “개인의 활동이거나 단체의 활동이거나 그것이 역사 위에 남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민족의 이름으로 남는다.”고 하였다.

개성공단 폐쇄, 남북관계의 파탄, 국정교과서, 일본군 종군위안부문제, 테러방지법, 대통령은 마땅히 이런 모든 것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려야 한다.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외면하던지 아랫사람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지도자는 지도자의 자질이 없는 것이다. 지난 호에 요왈편을 마지막으로 <논어>연재를 마쳤다. 거기 요왈편 1장에서 탕왕은 말하기를 “세상에 죄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제 잘못입니다(萬方有罪, 罪在朕躬)” 했고 무왕은 말하기를 “백성들이 과오가 있다면 그것은 나 한사람에 있는 것이다.(百姓有過, 在予一人)”했다. 그래서 탕왕이다. 그래서 무왕이다.

대통령의 무책임함과 한심함은 그렇다 하더라도 대통령을 방파제 삼아 실제로 이 일들을 만들어내고 몰아붙이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대통령이 그렇게 하도록 힘이 되어준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대통령의 독단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어찌하여 청와대의 수재들 중에서, 장차관 중에서, 새누리당의 의원들 중에서 대통령의 독단에 “안 됩니다.”하는 이가 없는가? “했다고? 했는데 대통령이 받아들이지를 않는다고?” 변명이다. 한 번 간해서 안 되면 두 번 하고, 두 번 해서 안 되면 세 번하고, 세 번 해도 안 되면 네 번하고.... 그러다가 쫓겨 나던지 스스로 그만두던지 할 때까지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우리나라 고위 관료들 중에서 올곧은 주장을 굽히지 않아서 경질된 이가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거의 없다. 역시 해도 해도 안 되기에 스스로 그만둔 이가 있다는 소식도 들은 적이 거의 없다. 공부는 많이 했는지 몰라도 소신이 없다. 의기심도 없다. 호연지기도 없다. 오로지 출세 지향적이요 자리에 연연하는 소인배들뿐이다.

조선시대가 참으로 한심하고 또 한심한 것이 부지기수 이지만 그래도 조선왕조 500년을 지탱하게 한 힘이 있다면 죽기까지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올곧은 선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을 때, 죽음으로 항거한 사육신이 있었다. 성삼문이 죽음을 앞두고 말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 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이 말이 조선을 지탱한 힘이었다.

소돔성이 멸망한 것은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열 명은 고사하고 한 두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의인이 한 두 명 이라도 있었더라면 그 도시가 멸망당할 만큼 타락하지 않는다. 역시 무수한 권신과 간신배가 우글거리며 국정을 농락하더라도 한 두 명 올곧은 신하가 나라를 지킨다. 모두가 의인일 수 없다. 모두가 충신일 수 없다.

나름대로 한국현대사를 보면서 느끼는 바가 있다. 1945년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정치는 차근차근 발전해 왔다. 돌아보니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라는 황당한 독재자의 등장도,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도 눈 꾹 감고 감수할 수 있고 전두환의 깡패 짓도 역사 발전의 한 과정이라 감수했는데, 그리고 이후로는 민주화의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 왔는데 어찌하여 오늘날에 다시금 정치가 이리도 후퇴할 수 있단 말인가? 개구리가 도약하기 위해서는 몸을 움츠려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것은 이명박 정권으로 족한 것이다. 이것은 도약하기 위한 움츠림이 아닌 고꾸라짐이다.

박근혜대통령과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이들을 우리는 흔히 보수주의자라고 하지만 그들은 보수가 아니다. 진정한 보수는 타협이라는 것을 모른다. 스스로 옳다 하는 가치를 위해서 목숨을 거는 이들이 보수다. 순교니 순국이니 하는 것은 언제나 보수주의자들에게서 나왔다. 그런데 지금의 박근혜대통령 주변에는 그런 이가 없다. 대통령에게 죽겠다는 각오로 직언하는 이가 없다. 새누리당에 당론을 거스르고 義를 쫓는 이가 없다. 사육신은 고사하고 한사람 성삼문이 없다.

아! 하나님은 어찌하여 우리의 역사를 되돌려 놓으시는가? 아직도 우리는 독립할 힘이 없어 외세에 굴복해야 하는가? 이건 외세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굴복함이다. 그래서 더욱 원통하다.
아직도 우리는 통일을 꿈꾸고 통일을 말하고 통일을 시도해선 안 된단 말인가? 그래서 평화와 통일의 작은 불씨인 개성공단 마저도 스스로가 꺼버린단 말인가?
아직도 우리는 민주주의를 할 자격이 없어서 독재를 격어야 하는 것일까? 얼마나 더 민주화를 열망하는 이들이 피를 흘려야 한단 말인가?
아직도 우리 가난한 민중들은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되는가? 아직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임금협상 조차 할 수 없는 비정규직에 머물러야 한단 말인가?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은 역사를 거꾸로 돌리시는 분이 아니다. 이것은 봄이 오고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려니, 꽃샘추위 치고는 좀 가혹한 추위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나의 소망

우리나라가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할 날이 올까? 이 땅에서 미군이 철수 하는 날이 올까? 성능이 어떠한지,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르는 무기들을 얼만지도 모르는 값으로 사들이는 일들이 없어질 날이 올까?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 삼았던 것을 진심으로 사과하고 또 우리는 용서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우리나라가 베트남에게 양민 학살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배상까지도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남과 북이 정치적 통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자유왕래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남과 북의 청춘남녀들이 연애하고 결혼도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삼성이 만든 전자제품이 외국에서의 판매가격보다 국내 판매가격이 저렴한 날이 올까? 현대가 만든 자동차가 외국수출용보다 내수용의 품질이 더 우수한 날이 올까?
결혼하여 가정을 꾸미는 이들에게는 우리사회가 아담한 집 한 채를 선물로 마련해 줄 수 있는 날이 올까?
어린 학생들의 학교생활이 즐거운 날이 올까? 밤을 새워가며 장편소설을 읽고 감동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날이 올까?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을 때 그 대답으로 정치인들의 이름이 다수 거론되는 날이 올까?

내가 꾸는 꿈은 우리나라가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다. 초강대국인 미국과 대등한 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주권국가로서 자존심을 가질 수 있음을 바란다.
일본을 이기자는 것이 아니다. 땅도 더 넓고 인구도 더 많은 일본이다. 아주 가까이 있어 좋던 싫던 국제사회를 함께 살아가야 할 나라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일본과 화해하자는 것이다.
베트남에 사과하는 것은 굴욕이 아니다.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용기다. 베트남에 대하여 사과하지 않고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뻔뻔한 일이다.

삼성, 현대 등의 대기업들이 우리나라 기업일까? 우리나라에서 시작한 기업임에는 틀림없으나 지금도 우리나라 기업이라는 데에는 회의가 든다. 우리 국민들은 그 기업들이 우리기업이라고 자긍심을 갖는데 그들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이 대기업이 되기까지는 국민들이 품질도 떨어지고 값도 비싼 그들 제품을 “국산품 애용은 곧 애국”이라는 생각으로 구매했다. 그들은 국민의 애국심을 이용하여 대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국민을 배신했다. 세계적 기업이 된 오늘날, 그들은 마땅히 국민에게 보답해야 한다. 그런데 보답은커녕 국민에게 악덕상술을 발휘하여 바가지를 씌우고 있다. 외국인들에게는 더 좋은 물건을 더 싼 값에 판매하고 있으니 말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마치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에게 은혜보답은커녕 사기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 삼성이니 현대니 하는 대기업들에게 기대를 하지 말자. 오히려 그들이 망해야 중소기업이 산다. 대형마트가 망해야 골목상권이 살아난다. 망하게 할 수 없다면 쫓아내자. 쫓아 낼 수도 없으면 외면하자. 소위 경제민주화, 경제정의를 외치는 이들조차도 대기업제품을 선호하고 대형마트를 이용하는 것은 그것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답답한 노릇이다.

우리나라의 주택보급률은 100%를 넘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주택들을 짓고 있다. 국민들에게 좀 더 좋은 주택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건설업체들과 부동산투기자, 임대업자의 이익을 위해서다. 그러니 주택은 남아도는데 주택 값은 터무니없이 비싸다. 그러니 서민들은 평생을 저축해도 번듯한 집 한 채 마련할 수 없다. 그래서 말인데 결혼하여 가정을 꾸미는 이들에게 국가가 아담한 집 한 채를 선물로 마련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어림없는 말이라고? 그러나 하고자 하면 못할 리 없다. 하지 않는 것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 학생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우리의 교육현장은 학문과 우정과 낭만이 있는 곳이 아니라 과도한 경쟁만 있다. 배워야 할 것도 너무 많다. 특히 영어공부와 수학공부에 진이 빠진다. 영어는 간단한 회화를 할 수 있으면 족하고 수학은 곱셈, 나눗셈, 이차방정식, 삼각함수 정도면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노자 읽기

노자는 패배자의 학문이다.

노·장사상은 몰락한 귀족들이 다시금 권력을 잡는 것이 불가능함에 체념하고 세상을 등진 사상이다. 그래서 한쪽으로 치우친 사상이라 할 수 있다. 불교는 세상의 덧없음, 인생의 덧없음을 알고 처음부터 세상을 등지는 가르침이다. 세상을 등진다는 의미에서 노·장과 불교는 비슷하다. 실제로 불교가 중국에 들어가서는 노·장사상과 만나서 중국불교가 되었다.

노·장사상과 불교사상은 세상을 등지는 가르침이기에 세상의 지도이념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노·장사상과 불교사상은 나라의 지도이념이 되지를 못했다. 불교가 크게 왕성한 시대에도 나라를 다스리는 이념은 유학으로 하였다.

노·장사상은 매우 매력적인 가르침이기는 하지만 세상을 이끌 수 있는 힘이 없다. 노·장계통의 사람들이라고 처음부터 세상을 등지고자 한 것은 아니다. 무도한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들도 나름으로는 시도를 했겠지만 권력다툼에서 실패하고 물러난 것이다. 그리고 나름대로 명분을 찾은 것이 “안 되는 줄 알아서 피했다.”, “세상이 무도해서 피했다.”, “세상이 더러워서 피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사회의 비주류, 밀려날 가능성이 가까운 이들에게서 노·장의 사상에 관심을 갖는 모습을 볼 수 있다. 敗北者(패배자)의 학문이기에 우리 사회의 지도이념이 될 수 없고 그만큼 책임의식을 찾기 어렵다.

노자는 진정한 승자의 가르침이다

그렇다고 해서 노자의 가르침이 무가치하다는 것은 아니다. 패배자의 학문이기에 승자의 학문인 유가보다 더 가치가 있다. 이 세상에는 승자보다 패배자가 훨씬 많다. 그리고 승자라는 것이 모든 면에서의 승자일 수 없다. 달리기의 승자와 도박에서의 승자가 모든 것의 승자일 수 없듯이 말이다. 어떤 승자도 영원한 승자는 없다. 그도 언젠가는 정점에서 내려와야 하는데 그것을 깨닫는 순간 노자의 가르침이 펼쳐진다.

강자의 눈으로는 절대 보지 못하는 것, 강함을 지향하는 자의 눈에는 결코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들을 노자는 보여준다. 강자의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 가르침이기에 노자는 역설이다.

노자의 가르침에는 정점에 오르기 위하여 아등바등 하는 이들을 비웃으며, 또한 그들의 다툼을 즐기면서 세상을 자유롭게 살아가는 여유가 있다. 그런 면에서 노자는 진정한 강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렇게 살라 한다.

산 정상에 오르면 주변이 다 보인다. 그러나 산 정상에는 오래 머물 수 없다. 정상에는 머물기 위해서 오르는 것이 아니라 정상을 맛보기 위해서 오른다.
정상에 오르면 덤으로 얻는 것이 있다. 전체를 보는 것이다. 전체는 보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정상을 맛보고 전체를 보았으면 이제 내려와야 한다. 정상은 한 점 이지만 그 밑에 펼쳐지는 골짜기는 무한히 크고 넓고 깊다. 그것을 보기 위하여 정상에 오르는 것이다.

진화론의 핵심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강자생존”으로 이해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짐승중의 최강자는 호랑이였다. 그러나 호랑이는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춘지 오래이지만 약자였던 토끼, 고라니 등은 여전히 살아있지 않은가? “약육강식”은 맞는 말이지만 “강자생존”은 틀린 말이다. “강자생존”이 아니라 “적자생존”이다. 노자는 세상을 이기자는 강자생존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에 맞추어 사는 적자생존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진정한 승자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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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보다 약 100여년 후의 사람으로 양주가 있다. 그는 노·장의 사상을 계승한 사람가운데 하나인데 "털 하나를 뽑아 온 천하가 이롭게 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拔一毛而利天下不爲)“라면서 인위적인 무엇을 거부하는 극단적 자연주의다. 그러나 그것은 극단적 이기주의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표현이 극단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사상은 인간의 사회성을 부정하기에 역시 사회를 이끌 수가 없는 것이다. 노·장과 대척점에 있는 이가 墨子(묵자)다. “내 머리 끝서부터 발끝까지 갈아서라도 세상이 이롭다면 나는 하겠다”는 사람이다. 노자와 장자가 개인주의, 자유주의 사상이라면 묵자의 사상은 사회주의, 낭만적 공산주의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성현들의 가르침이 세월이 지나면서 타락하고 변질하듯이 노장의 가르침도 역시 그러하다. 노자는 無爲自然을 가르쳤다. 죽음이 가까우면 피하지 아니하고 자연의 이치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타락하고 변질되자 죽지 않겠다고 不老長生을 꿈꾸고, 신선사상을 발전시켰으며, 빨리 가겠다고 축지법을 꿈꾸고 숫한 도술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현실과 유리된 황당한 신비주의로 혹세무민하는 면이 없지 않다.

서론은 이제 그만하고 <노자> 1장을 시작한다.
道可道非常道 : “도”라고 말 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름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나는 나다”고 하셨고 예수께서는 “아버지”라 했다. 아버지는 이름이 아니다. 나의 뿌리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희미다. 보아도 못보니 夷(이)다. 들어도 못들으니 希(희)다. 작아서 못 얻으니 微(미)다.(노자14장)
“야훼”도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다. “신이시여 임하소서”라는 뜻으로 신의 임재를 기원하는 뜻이다. 신이 임하신다면 보통 두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야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도나이”도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다. “주님”이라는 뜻이다. “알라”도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다. “The God"라는 뜻이다.

道는 진리에 이르는 방편으로서의 길이다. 길이되 몸이 가는 길이 아니라 머리가 가는 길이다. 구지 머리가 가는 길이라고 한 것은 몸이 가는 길과 구별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 길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가야 할 길이지만 눈에 보이는 길이 아니다.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

名可名非常名 :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名)이라는 것은 별것이 아니다. 개울가에서 벗들과 놀고 있는 어린아이를 저녁때(夕)가 되어 어미가 부르는 소리(口)다. “개똥이”라 불러도 좋고 “쇠똥이”라 불러도 좋다. 그런데 그 이름이 언제부터인지 사람의 본질처럼 되었다. 그래서 어른의 이름은 함부로 부르면 안 되는 것처럼 되었다. 어른뿐 아니라 벗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면 안 되는 것처럼 되었다. 그래서 이름대신 호를 부르고 자를 불렀다. 요즈음도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 직책을 부르고 직위를 부른다.
이름을 자기로 아는 사람들이 있다. 이름은 남이 부르기 위하여 붙여 놓은 것이다. 마치 감옥에서 죄수에게 붙인 죄수번호와 같다. 나의 본질은 이름이 없다. 사람의 이름도 그러하고 사물의 이름도 그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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