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語> 연재를 끝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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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 연재를 끝내면서
  • 김홍한
  • 승인 2016.03.08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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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한목사의 이야기 신학

<論語> 연재를 끝내면서

이야기 신학 1호부터 <논어>를 연재했는데 오늘로 <논어> 연재를 마친다. <논어>라 하면 일단 고리타분한 옛 가르침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아서 유감이다. 나도 <논어>를 접하기 전에는 그러한 선입견이 있었다. 그러나 직접 <논어>를 접하고는 단박에 그 선입견에서 벗어나 그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아! 참으로 멋진 가르침이다.”

<논어>의 가르침에 감탄하면서 적어 놓은 것들을 정리하여 <이야기 신학>에 연재한 것이다. <논어>에 대한 이런 저런 해설서들과 주석서 들이 많이 있으나 거기서 거기다. 마치 성경에 대한 주석서들의 내용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모두 덮고 내 느낌대로, 내 이해대로 썼다. 정통 유학을 공부한 이들이 보면 틀림없이 천박한 해석, 얄팍한 지식이라는 지적도 많이 할 것이다. 그러나 반면 그들이 미처 보지 못한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자부한다. 그들은 유교로 <논어>를 보았지만 나는 그들과는 다른 시각, 틀에 박히지 않은 시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논어>는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물씬 풍겨난다. 그러면서도 깊이를 모를 그윽함이 있다. 자공이 공자를 宗廟에 비유했고 해와 달에 비유했는데 깊이 동감한다.

논어 이야기

“<논어>는 이러한 이야기를 한다, 이러한 책이다.”고 규정하기가 어렵다. 뚜렷이 규정하기가 어려울 때는 좋은 방법이 있다. 아닌 것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남는 것이 있다. 논어가 말하지 않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다.

사람들이 재미있어하고 흥미로워 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여자이야기, 전쟁이야기, 돈 버는 이야기, 입지전적 이야기 등이지만 논어에는 그러한 이야기가 없으니 그런 면에서 논어는 참 재미가 없는 책이다. 항상 무엇엔가 미혹되어 있는 이들에게 논어는 보아도 보이지 아니하고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고 먹어도 맛을 모른다.

논어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논어는 忠과 孝를 많이 이야기 하는 줄 알지만 논어에는 충과 효에 관한 이야기가 별로 없다. 忠과 孝는 훗날 유가의 가르침이 지배이데올로기로 굳어지면서 강조된 것이다. 그리고 공자가 가르친 忠이 우리가 흔히 아는 나라에 충성하는 그 충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孝를 이야기 한다 하지만 공자는 아버지 숙량흘 과 어머니 안씨 이야기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儒家는 가족을 매우 중시하는 가르침이라 논어에도 그러한 내용이 많이 나올 것이라 생각하는데 孔子는 아내에 대해서도 한마디 언급함이 없으며 아들에 대해서도 한 이야기가 없다. 아들 백어 와의 대화가 있지만 다른 제자들과의 대화와 다를 것이 전혀 없으니 그냥 스승과 제자와의 이야기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공자는 周易의 대가라서 주역의 10익을 썼다 하는데 정작 논어에는 주역의 내용이 전혀 없다. 음양이야기도 없고 卦(괘) 이야기, 爻(효)이기도 없다. 占(점)치는 이야기도 없다. 따라서 과연 주역의 10익이 공자의 저술인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논어에는 설화나 전설 같은 신비한 이야기가 없다. 혹 신화적 인물을 다루어도 비신화화 하여 이야기 한다. 불교나 기독교의 경전에는 무수히 나오는 기적이야기, 신들의 이야기 등도 전혀 없다.

몸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 요즈음 사람들이 마치 복음처럼 생각하는 건강에 관한 이야기도 없다. 장수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

마음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 공자보다 조금 먼저 태어나 큰 가르침을 펼친 석가모니는 마음(心)이야기를 참 많이 했는데 공자는 이상하리 만치 마음이야기가 없다.

미래에 대한 꿈을 심어주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는 그러한 내용이 없다. 요즈음의 책들이 필수라고 여기는 그러한 희망과 비전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소위 우리가 말하는 꿈과 비전이라는 것이 자기 욕심의 표현이요 크게 출세하고자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이니 공자는 그러한 천박한 꿈과 비전을 말 할리 없다. 석가도 그러하고 예수도 그러하다. 석가의 꿈과 비전은 해탈성불의 세계요, 예수의 꿈과 비전은 하나님 나라라면 공자의 꿈과 비전은 平天下일 것인데 그것은 온 세상에 仁義道德이 실현된 세상을 말하는 것이지 알렉산더나 칭기츠칸 같은 영웅들이 야망을 가지고 힘으로 통일한 평천하가 아니다.

중국은 龍의 나라, 가는 곳 마다 용 그림이 있고 수없이 많은 용 이야기들이 있고 주역에도 용이라는 단어가 참 많이 나오지만 논어에는 그 흔한 용 이야기가 없다.

논어에는 서민들의 이야기가 없다. 서민들은 그냥 소인일 뿐이다. 공자는 역사의 주체, 문화의 주체를 君子에게서 찾는다.

논어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이 없다. 사회적 약자인 소위 소인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부자들의 시혜차원에서 다루어질 뿐이다. 그런 면 에서 논어는 정의나 평화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적다.

경제 운영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다.

자연이야기도 없다. 돌, 나무, 물, 불, 하늘 등의 자연에 관하여 이야기 한 바가 거의 없다. 태양이야기 달 이야기도 없다.

성경을 통해서 하늘을 본다면 논어를 통해서 나를 돌아본다. 여러 각도에서 나 자신을 본다. 논어를 공부하면서 나 자신을 많이 다듬었다는 생각이다. 내 생각도 많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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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마지막 편인 요왈편이 1장으로 끝나면 어울릴 텐데 2장과 3장이 덧붙여 있다. 물론 2장과 3장의 내용도 매우 훌륭한 내용이지만 앞의 어느 곳에 들어가면 될 것을 굳이 논어의 맨 마지막에 덧붙인 것은 왜일까? 필자의 짧은 소견으로는 훗날 자장의 문인들이 첨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이제 마지막 요왈편을 싣는다.

堯曰 1장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요임금 왈 “아! 너 순이여! 천지역수가 너에게 있으니 중심을 잡아라. 세상이 곤궁하면 하늘의 녹이 영원히 끊어진다.” 순임금 역시 이 명령을 우임금에게 내려 주었다. 탕왕왈 “나 소자 리는 검은 황소를 제물로 감히 천지신명께 고하오니 ‘세상의 죄를 용납지 않겠으며, 제신의 뜻을 막지 않겠으며, 하늘의 마음을 받아 간직하겠습니다. 제게 죄가 있다면 세상을 맡기지 마옵소서. 세상에 죄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제 잘못입니다.” -무왕이 말하였다.- “주나라에는 하늘로부터 하사받은 것이 있으니 선한사람이 많다. 비록 많은 친척이 있다하더라도 仁한 사람만 못하니 백성들이 과오가 있다면 그것은 나 한사람에 있는 것이다.” 저울과 계량을 엄중히 하고 법도를 자세히 살피며 폐한 관직을 세우니 사방의 정치가 행해진다. 망한 나라를 다시세우고 끊어진 혈통을 다시 잇고, 숨어있는 백성들을 다시 드러내니 천하 백성의 마음이 돌아온다. 소중히 여길 것은 백성, 식량, 상사, 제사이다. 관대한즉 무리를 얻고 백성에게 믿음을 주니 백성이 임무를 맡기고 민첩한즉 공을 세우고 공평한즉 백성이 기뻐한다.)

* 咨(자/ 감탄사), 躬(궁/ 自身), 允(윤/ 참으로), 履(리/ 은나라 탕왕의 이름), 玄牡(현모/ 제사에 쓸 검은 황소), 皇皇后帝(황황후제/ 天帝를 뜻함)簡(간/ 대쪽에 쓴 글), 朕(짐/ 신분에 관계없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 천자가 자기를 지칭하는 말), 大賚(대뢰/ 하늘로부터 크게 하사받음), 權量(권량/ 무게를 재는 추와 양을 재는 되), 繼絶世(계절세/ 후손이 없는 가문을 다시 이어줌)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天之曆數가 너에게 있다고 하였다. 천지역수란 ‘천명을 받아 제위(帝位)를 잇는 순서’이니 이제 순임금이 제위를 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천명이니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늘이 말을 할까? 一夫 선생은 <正易>에서 “天地无言(천지는 말이 없다)”을 말하고 또 “天地有言(천지가 말을 한다)”도 말한다. “天地无言”이란 보통 사람은 들을 수 없음이고 “天地有言”이란 성인은 들을 수 있음을 말할 것이다. 그래서 성인의 말씀은 天命이다. 성인의 말씀이 천명이기에 공자는 “畏聖人之言(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한다.)” 이라 했다.

하늘(天)은 時間이고 땅(地)은 空間이다. 천지역수가 네게 있다는 것은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允執其中(윤집기중/ 중심을 잡아라)하라는 것은 時中之道를 잡으라는 것이다. 時中之道를 잡은 이가 天命을 받은 이고 天地의 소리를 들은 이다. 天地의 소리란 하늘과 만백성의 소리다.

천하를 얻고자 하는 큰 욕심이 있는 이들이 제가 천명을 들었다고 제멋대로 떠들어 댈 수 있다. 이러한 이를 경계하는 말이 “하늘은 말이 없다.(天地无言)”이다. 그러면 정말 천명을 들은 이(天地有言)”가 누구일까? 필자는 탕왕과 무왕의 말에서 그 증거를 본다. 탕왕은 말하기를 “세상에 죄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제 잘못입니다(萬方有罪, 罪在朕躬)” 했고 무왕은 말하기를 “백성들이 과오가 있다면 그것은 나 한사람에 있는 것이다.(百姓有過, 在予一人)”했다. 세상의 모든 죄를 스스로가 짊어지는 이가 천명을 받은 증거이다. 천하를 얻고자 하는 이는 도둑놈이다.

똑같은 모습을 예수에게서 본다.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 말씀하시기를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두루 마리를 말아서 시중들던 사람에게 되돌려 주고 자리에 앉으시자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예수에게 쏠렸다. 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하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4:18-21) 그리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28)했다. 이 예수를 지칭하여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고 했다.

2장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자장이 공자에게 묻기를 “어찌하여야 정치에 종사 할만합니까?” 공자왈 “다섯 가지 미덕을 존중하고 네 가지 악행을 물리치면 가히 정치에 종사 할만하다.” 자장왈 “다섯 가지 미덕이란 무엇입니까?” 공자왈 “군자는 베풀되 낭비하지 않으며, 노역을 시키되 원망이 없으며, 갖고자 하되 탐욕이 없으며, 태연하되 교만이 없으며, 위엄이 있되 사납지 않은 것이다.” 자장왈 “은혜를 베풀되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공자왈 “백성들로 하여금 이 이익 되는 바로 이익이 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은혜를 베풀되 낭비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노역할 수 있는 자를 택하여 노역하게 하니 누가 원망하겠느냐, 인하고자 하는 이는 인을 얻으니 누가 탐욕 하겠느냐? 군자는 무리가 적음이나 대소에 상관없이 감히 태만하지 않으니 이 또한 태연하되 교만하지 않음이 아니냐? 군자는 그 의관을 바로하며 그 용모를 존귀히 하여 사람들이 엄연히 존경과 경외를 표하니 이 또한 위엄이 있되 사납지 않음이 아니냐?” 자장왈 “4악이란 무엇인가요?” 공자왈 “가르치지 아니하고 -죄가 있다고 -죽이는 것을 虐(학)이라 하고 경계하지 아니하고 성과를 요구하는 것을 暴(폭)이라 하고 명령을 어설프게 하고 그 기간을 정하는 것을 賊(적)이라 하고, 이왕 사람들에게 줄 것을 출납을 게을리 하는 것을 有司(유사)라 한다.”)

* 屛(병풍 병, 가리어 막다), 瞻視(첨시/ 용모)

공자는 정치에 있어서 다섯 가지 미덕을 존중하고 네 가지 악행을 물리치라한다.

다섯 가지 미덕/

惠而不費(베풀되 낭비하지 않는 것)란 오늘날로 말하면 선심성 행정을 경계하는 것이다.

勞而不怨(원망이 없는 노역)이란 투명한 세금과 공정한 징병제도의 확립을 말하는 것이리라.

欲而不貪(갖고자 하되 탐욕이 없음)은 위정자의 정경유착을 경계함이요 공직자의 부정부패를 경계하는 것이다.

泰而不驕(태연하되 교만하지 않음)는 공복으로서의 애민과 봉사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威而不猛(위엄이 있으되 사납지 않음)은 법질서를 확고히 하되 공권력의 횡포를 경계함이다.

四惡을 물리친다 함은

不敎而殺謂之虐(가르치지 아니하고 -죄가 있다고 -죽이는 것을 虐(학)이라 한다.)

不戒視成謂之暴(경계하지 아니하고 성과를 요구하는 것을 暴(폭)이라 한다.)

慢令致期謂之賊(명령을 어설프게 하고 그 기간을 정하는 것을 賊(적)이라 한다.)

猶之與人也, 出納之吝, 謂之有司.(사람들에게 줄 것을 출납을 게을리 하는 것을 有司라 한다.)

이러한 모습들을 우리나라는 현대사 속에서도 경험하였으니 과거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이들이 사회악 일소라는 명분으로 깡패소탕, 부정 공무원 해직 등의 조치들과 1980년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가 역시 사회악 일소라는 명분으로 자행한 삼청교육대 사건 등이 대표적인 虐(학)이라 할 것이다. 또한 정적 제거의 목적, 반대파 길들이기의 목적, 민심 달래기의 일환으로 수시로 행해졌던 특별감사나 세무감사 등을 暴(폭)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비합리적이고 즉흥적이고 인기에 영합하기 위하여 어설프게 추진한 대형국책사업들로 인하여 인적, 물적 피해는 물론 국론이 분열되고 정신적인 피해까지 막심한 결과를 초래했던 평화의 댐, 새만금 간척사업 등이 賊(적)이라 할 수 있다. 네 번째 것은 안연 12장에서 이야기한 바가 있다. 공자가 자로를 칭찬하면서 하는 말이 “子路無宿諾(자로무숙낙/자로는 승낙한 것을 미루지 않는다.)” 이라 하였다.

出納之吝(출납지인)이란, 말단관원인 창고지기가 상부의 결제가 나서 마땅히 지급해야 하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며 유세를 부리는 것이다. 그것을 기다리는 이의 절박한 심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조그만 권세로 잔뜩 유세를 부리는 것이 가증스럽다. 아마도 자로 같은 이가 관리로 있다면 이러한 폐단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신속한 소송판결’과 ‘승낙한 것을 미루지 않는 것’과 같은 일은 공자가 말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부분적인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왜일까? 공자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그곳의 군주나 대부 등으로부터 자문에 대한 사례나 여비를 받아서 일행의 호구지책을 해결했을 것인데 그 군주나 대부의 명령을 받아 집행을 해야 하는 하급관원들이 공자와 그 일행을 업신여기거나 뇌물을 바라고 지출을 차일피일 미루는 일이 자주 있었을 것이다. 그 때마다 공자는 참으로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러한 사소한 일을 일일이 명령을 내린 이 에게 다시금 이야기하기도 민망한 일이고 참고 견디자니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조그만 권세를 가지고 횡포를 부리는 이들이 적지 않으니 그러한 가운데 민중의 삶은 골병이 든다.

3장  : 「, . , . , . 」

(공자왈 “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 예를 알지 못하면 설수 없다,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

공자는 50에 지천명했으니 50에 군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는 30에 立했으니 30에 예를 알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는 계씨 8장에서 “畏聖人之言(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한다.)” 했는데 그 성인의 말씀이 바로 하늘의 말씀이고 하늘의 말씀이 성인의 말씀이다. 하늘은 꼭 성인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

논어읽기 후기

필자가 논어이야기를 하니 혹자가 말하기를 “목사가 논어를 볼 시간이 있으면 그 열정으로 성경을 보아야 하지 않느냐?”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그 보다 내가 성경을 더 많이 안다. 논어를 공부하면서 기독교의 가르침이 더욱 선명해 졌기 때문이다.

물속에 있는 물고기는 물을 잘 모른다. 혹 물밖에 나오면 자신이 물속에 있었음을 즉각 알고는 죽겠다고, 살려달라고 파닥거린다.

필자는 물과 뭍을 오고가는 개구리다. 이제 물가에 있는 바위에 올라 창공을 본다. 저 멀리 鵬(붕)새가 날아간다.

인류 역사상 붕새가 된 성현들이 얼마나 될까? 좁은 내 머리로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유명하여 드러난 이도 있겠지만 드러나지 않은 이들이 있을 것이기에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논어에서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글이 두 가지 있다. 옹야 20장에 “敬鬼神而遠之(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는 것)”이 知라는 것인데 필자는 그것을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나 신의 조화를 기대하는 것은 미신이라는 뜻”으로 이해하였다. 공자는 신을 공경하되 결코 신에게 아첨하지 않고 어찌 보면 신과 대등하려고 하는 인간으로서의 최고의 자존감을 본다.

또 하나는 헌문 40장에서 문지기가 자로에게 공자에 대하여 묘사하는 “是知其不可而爲之者(불가한줄 알면서도 그렇게 행하는 사람)”이다. 공자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행하기에 꿈을 먹고 사는 이상주의자이다. 꿈을 먹고 살기에 공자는 항상 젊은이다.

일부 어떤 이들이 공자를 신격화 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어리석은 일이다. 공자를 몰라서 하는 짓이다. 무지한 중생들이 공자가 너무 훌륭한 분이니 막연히 그리하는 것이다. 공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인간이었다. 다만 철저히 인간의 獸性(수성)을 제어하고 제안에 천명을 이루고자 했던 참인간 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예수님도 스스로를 언제나 人子(사람의 아들)라 하였다.

참인간이기에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참으로 사람답고자 하는 것이 바로 하늘가는 길이다. 논어에서 필자는 사람다움을 배웠다.

글쓴이 김홍한 님은 대전 유성구 원내로 39번길 59 <새교회> 를 담임하면서 목회를 하고 있다. 후원계좌는 농협 453047-52-043161 김홍한 이다. 참고바란다.[편집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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