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신학을 만든 이유
상태바
이야기 신학을 만든 이유
  • 김홍한
  • 승인 2016.02.16 14: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순수하고 간절한 기도의 결과는 주님께서

이야기 신학이 150호를 맞이했다. 50호 때, 100호 때에는 일부 독자들의 옆구리를 찔러서 축하메시지를 받아 실었는데 지나고 보니 쑥스러운 일이다.


처음 이야기 신학을 발행할 때, 150부를 만들어서 120부를 우편발송했다. 그 후, 반응이 없는 이들을 정리하다 보니 35명의 독자만 남았다. 그 중에는 새로 독자가 된 이들도 몇 명 있다. 적극적으로 우편발송 독자를 줄였다. 필요하지 않은 우편물은 쓰레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편발송 독자는 줄었지만 전자우편 독자는 110여명으로 늘었다.

이야기 신학을 만든 이유가 있다. 처음에는 생활에 도움이 될까 해서였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는 별로 없어서였다. 지금은 그냥 내가 좋아서 한다. 읽어주는 독자가 그냥 고맙다. 누군가가 내 글을 읽어 준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개중에는 이렇게 저렇게 내가 쓴 글을 인용하기도 하고 주보에 소개하기도 하고 홈피 등에 올리는 이들도 있는데 더욱 고마운 일이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이보다 맛있게 먹는 이가 더욱 고마운 이다. 가르치는 선생보다 눈 반짝이면서 배우는 학생이 더 고마운 이다. 양육하는 부모보다 건강하게 잘 자라는 자녀가 얼마나 고마운가? 설교하는 목사보다 진지하게 경청하는 성도들이야말로 고맙고 고마운 이들이다. 글 쓰는 이보다 그 글을 읽어주는 이들이 정말 고마운 이들이다.”

보잘 것 없는 이야기 신학을 읽어주시고 격려해 주시는 분들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다양한 영성

현각이라는 중이 있다. 미국인으로 1964년생이다. 예일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두루 공부한 수재다. 가톨릭 신부가 되고자했으나 불교에 심취하여 우리나라에서 중이 되었고 우리나라 국적도 취득했다. 그는 너무 유명해졌다. 그것이 큰 부담이 되었는지 그의 스승 숭산이 입적하자 얼마 후 이곳을 떠나 독일로 가서 선방을 차렸다.

현각은 가톨릭에서 불교로 개종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가톨릭이 진리에서 멀어졌기 때문인가? 그러면 불교는 진리와 멀어지지 않았다는 것인가? 신앙이란 개종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예수나 석가처럼 자신의 종교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는 유대교를 극복하셨고 석가는 브라만교를 극복하셨다. 현각도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는 말했다.

“석가모니는 불자가 아니었다. 예수도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분들은 종교를 만들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개신교의 가르침은 많은 부분 예수 이후에 생긴 것들이다. 종교가 종교다워지려면 보편적 윤리, 사랑하고 베푸는 마음을 실천해야 한다.”

현각이 왜 가톨릭을 버리고 불교를 택했을까?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선택의 문제도 아니다. 운명이고 숙명이다. 그의 성품이, 그의 영성이 불교적 성품이고 불교적 영성이기 때문이다. 현각이 개종한 것처럼 기독교인 이었다가 불교로 개종한 이들도 적지 않다. 공산주의자가 되어 무신론을 외친 이들도 있으며 심지어 무당이 된 이들도 있다.

목사들 중에는 꼭 불가의 선승같은 목사도 있다. 그가 목사이기는 하지만 그의 영성이 그래서 그렇다. 어떤이는 체 게바라 같은 혁명 투사의 기질이 있는 이들도 있다. 역시 그의 영성이 그래서 그렇다. 어떤이는 완고한 유가 선비같은 목사도 있다. 역시 그의 영성이 그래서 그렇다. 꼭 보험 영업사원 같은 이도 있다. 신들린 무당같은 이도 있다. 상담교사 같은 이도 있다. 탁월한 조직가가 있는가 하면 외로운 늑대 같은 이도 있다. 그러니 기독교 안에 불교적 영성, 유가적 영성, 무속적 영성, 자본주의적 가치관 등이 모두 들어 있다.

사람의 영성은 참으로 다양하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지 130여년, 이제 비로소 한국 기독교에 다양한 영성들이 나름대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가짜 지성인

오늘날, 예수를 믿되 기독교에 실망해서 교회를 다니지 않는 지성인들이 많다고 한다. 엉뚱한 소리다. 그들이 말하는 “교회가 타락했다”는 말은 깊은 성찰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막연히 그렇다는 말이다. 지엽적인 사건, 자신의 비위에 상하는 현상 등을 일반화 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말하는 타락한 교회를 바로세우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기가 섬길만한 바른 교회를 찾지도 않았다. 혹 몇 교회 기웃거리다가 “역시 없다” 하고는 포기했을 뿐이다. 그들에게서 헌신이라는 것은 찾을 수가 없다.

그들은 예수를 믿지도 않거니와 더욱이 지성인도 아니다. 그들이 교회를 멀리하는 이유는 우선 헌금이 아깝고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이며 무엇보다도 목사의 지도를 받는 다는 것이 자존심 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핑계를 “교회가 타락했다”라고 매도하며 자신이 신앙생활 하지 않는 것을 합리화한다.

그들은 자칭 의인이다. 비난할 줄만 알지 회개를 모른다. 그들은 개혁을 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다. 개혁은 비판과 함께 대안을 내 놓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 깊은 성찰이 없기 때문이다.

선량한 목사들이 소위 “교회에 다니지 않는 비판적 지식인교인”에게 속지 않았으면 한다. 그들은 “가짜 지성인들”이다.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려고 접근한다면 스스로만 비참해질 뿐이다. 혹 교회에 출석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결코 목회에 도움이 되지를 않는다. 머지않아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우며 교회를 떠날 것이다. 그것이 그대로 교회와 목회자에게 상처가 된다.

2010년 내가 새교회를 시작하면서 이런 자세로 했다.

새교회야 친절하지 말라.
친절한 것은 간사한 것,
내가 언제 친절하더냐?
그저 투박한 통나무처럼 되라.
사람들이 오히려 너에게 친절하리라.
새교회야 너는 사람을 쫓아내는 교회가 되어라.

복 받겠다고 하는 이는 쫓아내라. 내가 줄 복이 없다. 너희가 믿는 예수는 지지리도 복이 없던 이였다.
봉사하겠다고 하는 이도 쫓아내라. 그런 자는 틀림없이 교만하고 또 교만하다. 그 교만은 죽어야만 치유될 수 있다.

나는 이런 교회가 좋고 저런 교회가 좋다 하는 이도 쫓아내라. 틀림없이 주인노릇 하고자 하는 이일 것이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쫓아내어 텅 빈 교회가 되었을 때 비로소 빈 무덤으로 부활하리라.

새교회야 너는 친교하지 말아라. 친교 한다고 하는 짓들이 쓸데없는 잡담과 먹고 즐기는 오락뿐이다. 오히려 너는 고민하고 갈등하게 하라. 고민하고 갈등하지 않는 이는 내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

많은 무리는 제자가 아니다.(요6:60-71)

예수께서 갈릴리를 두루 다니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덤으로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었다. 가난한자, 병든자, 희망이 없는 자들이 예수를 따라 다녔다. 불쌍한 그들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많은 이들을 먹여 주셨다. 그러자 많은 무리가 더욱 예수를 따랐다.

“많은 무리”가 따랐다. 많은 무리가 따른다는 것은 진리와는 관계가 없다. 많은 무리는 이익을 따르는 자들이다. 소인배들은 진리를 보고 진리의 소리를 들으면 비웃어 버린다. 소인이 비웃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 하시면서 당신께서는 막상 돼지들을 향하여 진주를 던지신다. 먹이를 줄때는 환장하고 달려들던 돼지들이 진주를 던지니 외면한다. 오히려 먹을 것이 아니라고 투덜거린다. 열두제자만 남고 모두 다 떠나 버린다. 그리고 끝내는 열두 제자도 떠나버리고 예수홀로 십자가에 달리신다.

예수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감동하여 따른 것이 아니고 예수의 병 고침의 소문에 따른 것이다. 방황하는 대중들이 지푸라기라도 잡고픈 마음으로 따른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이, 전하는 이들 중에 많은 이들이 기복신앙이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말하고 예수 믿어서 복 받으려고 온다. 예수 믿으면 물론 복 받는다. 그러나 그 복은 세상의 복이 아니다. 하늘나라의 신령한 복이다. 진주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늘나라의 신령한 복에는 관심이 없다. 육의 양식에만 관심이 있고 영의 양식에는 관심이 없다. 진정 예수의 가르침은 도무지 관심 밖에 있다. 관심이 없으니 아무리 들어도 은혜가 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그 따르는 무리의 많고 적고는 관심이 없다. 그 무리는 불쌍히 여겨 구원해야 할 대상이지 진리를 가르쳐줄 대상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를 진리의 말씀으로 접하지 못하고 분위기로 믿는다. 소귀에 경 읽기다. 소 같은 인생들, 많은 무리가 바로 소이다. 많은 무리는 진리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먹고 마시고 쉬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많은 무리가 따른다면, 그것도 일시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따른다면 그것은 거짓가르침이다. 참 가르침으로는 무리를 오래 붙들어 둘 수 없다. 오히려 붙어 있던 이들도 떨어져 나간다. 세속적 기복주의 가르침, 출세 지향적 가르침이라야 대중을 붙들어 둘 수 있다. 참 가르침이 있는 곳에는 앞에 두서넛, 뒤에 두서넛(前三三, 後三三)이다.

순수하고 간절한 기도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중국고사가 있다. 중국에 태행산과 왕옥산이라는 산이 있다. 그 두 산 사이에 조그마한 마을이 있었는데 첩첩 산중이라 교통이 많이 불편했다. 그 마을에 우공 이라는 90세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 노인은 집에 앉아 산을 쳐다보다가 태행산과 왕옥산이 없으면 교통이 편리하리라고 생각하고 두 산을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노인은 매일 산의 흙을 파서 바다에다 버렸다. 모두들 비웃었다. 그러나 노인이 말하기를 내 자식, 손자, 또 손자, 손자의 손자… 가 계속하여 흙을 옮기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에 천제께서 감동하여 산을 옮겨 주었다는 이야기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고사는 천제께서 도와주셔서 의미가 있다. 천제의 도움이 없다면 우공이산의 고사는 어리석음과 무모함의 고사가 될 것이다. “천제의 도움”이라는 것은 종교다. 하늘의 뜻과 섭리가 있다면 태양이라도 날려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파리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다.

간절히 기도하고 철저히 믿는다고 해서 그 기도와 믿음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쫓아 낼 수 없다”(막9:29) 하시고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마17:20)고 말씀하시지만 우리의 믿음이 아무리 큰들, 우리의 기도가 아무리 간절한들 안 되는 것은 안 된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이 거짓이란 말인가? 거짓이라 생각했다면 복음서기자들은 아예 성경에서 제하고 기록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기도가 항상 부족하고 항상 적음을 제 스스로 알라는 주님의 가르침이다. 우리 중에 어떤 이들은 제 스스로의 믿음과 기도를 최고의 수준이라 자부하는데 그것을 경계하심이다.

내가 시골교회에서 담임전도사로 시무하던 때 교우중 하나가 가벼운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했기에 문병을 갔는데 거기에서 교통사고로 머리와 다리를 다쳐서 입원해있는 17-8세의 남자아이를 만났다. 그는 머리를 다쳐서인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아픈 다리를 끌고 계속 밖으로 돌아다녔다. 사흘째 밤낮으로 그러했단다. 부모는 계속 아이를 부축해 따라 다녔고 지치고 지쳐서 죽을 지경이었다. 아이의 아비는 “이제 그만 해라!” 소리 지르며 울음을 토해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기도해 주겠노라고 했다. 그들은 흔쾌히 응했다. 밖으로 나가겠다고 소리 지르는 아이를 제어하면서 그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였다. 그런데 목이 메어 한마디의 기도도 할 수가 없었다. 눈물만 비오듯 쏟고 웅얼웅얼 기도하는 흉내만 냈다. 어떻게 기도를 끝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도를 끝냈을 때 같은 병실에 있는 이들이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모두 나를 매우 한심한 사람으로 바라 보는듯 하여 너무도 민망하여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했다.

나는 내가 기도하여 그 아이의 병이 나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냥 너무 불쌍해서 기도해 주고 싶었을 뿐이다. 내 기도로 그 아이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은 나에게 없었다. 그러나 나의 기도는 정말 순수했고 간절했다.

결과를 기대하는 믿음과 기도는 참 믿음과 기도가 아니다. 결과는 주님께서 만드실 일이다.

- 논어 읽기 -

자장 22장 

(위나라 공손조가 자공에게 묻기를 “중니(공자)는 누구에게서 배웠습니까?” 자공 왈 “문왕과 무왕의 도가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고 사람들 가운데 있습니다. 현자는 그 큰 도를 인식하고 있으나 현명치 못한 자는 그 작은 도를 인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문왕과 무왕의 도를 갖고 있지 않은 이는 없습니다. 공자선생님께서 배우지 않음이 있겠습니까? 역시 어찌 정해진 선생님이 있겠습니까?”)

공자께서는 자신은 生而知之하지 않고 好學했다 하고, 述而不作이라고 하지만 일정한 스승이 없으니 공자야 말로 생이지지한 분이라 할 수 있다. 꿈속에서 주공을 뵙지 못함을 한탄하고 있으니 말대로라면 꿈속에서 주공에게 배웠다는 것일 수도 있지만 - 신비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은 공자이니 - 그만큼 주공을 사모했다는 것이지 실제로 꿈속에서 주공에게 배웠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공자에게 스승이 있다면 信而好古(옛것을 믿고 좋아하다.- 술이 1장)했으니 옛것이 모두 스승이다.

스승이 누구냐는 것은 참 중요하다. 또한 그 스승으로부터 認可를 받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석가에게도, 예수에게도, 공자에게도 그분들은 인가한 스승은 없다. 혹 있었다 하더라도 그 스승을 훨씬 능가한 분들이기에 스승이 더 이상 스승이 아니고 오히려 제자가 된다.

23장

(숙손무숙이 조정에서 대부에게 말하기를 “자공이 중니보다 현명하다”고 했다. 자복경백이 이를 자공에게 말하니 자공 왈 “궁궐의 담장에 비유하여 말한다면 나는 벽이 어께높이여서 집과 방의 좋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의 담장은 수 길이라 그 문안에 들어가지 않고는 알 수 없어서 종묘의 아름다움을 볼 수가 없고 백관의 풍부함을 볼 수 없는데 그 문을 찾아 그 영역에 들어간 이가 적습니다. 그러니 그분(숙손무숙)의 말이 틀린 말도 아닙니다.”)

* 宮牆(궁장/ 궁궐 담장) , 窺(엿볼 규), 仞(길 인)

자공의 대답이 참으로 현답이다. 자공의 공자에 대한 소개가 마치 전설상의 명의 편작이 그의 큰형을 진짜 큰 의사로 소개하듯 하다. 위문왕이 중국의 명의(名醫) 편작(扁鵲)을 불러 "당신의 세 형제가 모두 의술에 능하다고 하는데 당신의 생각엔 누가 가장 훌륭한가?" 편작왈 "큰 형님이 가장 뛰어나고 그 다음이 둘째 형님이며 소인이 가장 부족합니다" 했다. 문왕이 다시 묻기를 "그런데 어째서 당신의 명성이 가장 높은가?" 편작왈 "큰 형님은 환자의 병세가 나타나기도 전에 그 원인을 제거해 치료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무슨 병을 미리 치료해 화근을 막았는지 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작은 형님은 병이 발생하는 초기에 치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의술을 그저 작은 병을 치료할 만한 정도로만 여깁니다. 이에 비해 저는 병세가 아주 위중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병을 치료합니다. 사람들은 제가 환자에게 침을 놓고 피를 뽑아내며 큰 수술을 하는 것을 지켜보게 됩니다. 그래서 저의 의술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잘못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24장

(숙손무숙이 공자를 헐뜯으니 자공왈 “헛일을 하는 것이다. 중니는 헐뜯을 수 없다. 다른 현인들이야 구릉과 같아서 넘어갈 수 있지만 중니는 해달과 같아서 넘어갈 수가 없다. 사람이 비록 스스로 절교하려 해도 어찌 일월에게 영향을 줄 수 있겠는가. 자신의 無知만 많이 드러날 뿐이다.”)

* 毁(헐뜯을 훼), 踰(유/ 넘다)

숙손무숙이 감히 공자를 헐뜯는다. 마치 도도히 흐르는 황하에 오줌을 눋는 듯 하고, 빠르게 지나가는 기차에 개 짖는 듯하다. 황하에 오줌 눋는다고 황하수가 더러워지겠는가? 개가 짖는다고 기차가 멈추겠는가? 오늘날에도 공자, 석가, 예수를 헐뜯는 이들이 더러 있다. 자기의 무지와 오만함만 드러낼 뿐이다.

25장

(진자금이 자공에게 왈 “선생께서 겸손하셔서 그렇지 중니가 어찌 선생님보다 현명하겠습니까?” 자공왈 “군자는 한마디 말로 知와 不知가 드러나니 말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님은 따라잡을 수가 없다. 마치 사다리로 하늘에 오를 수 없는 것과 같다. 선생님께서 나라나 가문을 맡아 다스렸더라면 세우고자 하시면 세우고 이끌면 행하고, 어루만지면 따라오고, 움직이면 조화를 이루니 그 생애가 영화롭고 돌아가시면 애통하였을 것이니 어찌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진자금이 자공을 너무 존경해서 감히 자공보다 큰 이를 상상할 수 없어서인지, 아니면 자공에 대한 아부의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공자도 자공보다는 덜 현명할 것”이라고 말한다. 진자금이 공자를 헐뜯은 것은 아니지만 바다와 같은 공자를 보지 못하고 황하 같은 자공만 본 것이며, 태양에 가려진 낮의 하늘만 본 것이지 광대한 밤하늘을 보지 못한 것이다. 역시 자신이 바다를 보지 못함을 드러내는 것이고 밤하늘의 광대함을 보지 못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강원도 산골의 소년이 바다를 보았다. 집에 돌아가서는 친구들에게 바다가 얼마나 큰지를 이야기 한다. 그러자 한 소년이 대꾸한다. “바다가 제아무리 크기로 우리 집 뒷산에 삼밭만큼 크겠는가?” 했다.
======================================================
대전 유성구 원내로 39번길 59 <새교회> 우)34227
☎ 010-3243-2665 E-mail: khhyhy@hanmail.net
후원계좌 / 농협 453047-52-043161 김홍한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