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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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환상
  • 김홍한
  • 승인 2016.02.1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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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이 내리는 아침, 이야기 신학 151호

러시아의 대 문호 도스토예프스키, 그가 쓴 <까라마초프가의 형제들>, 그 중에 가장 백미라 할 부분이 2부 5편에 나오는 ‘대심문관’이다.

   

15세기 종교재판이 무섭게 진행되고 있던 시기 남부유럽의 에스파냐의 세비야에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번개가 동쪽에서 서쪽까지 번뜩이는 것처럼 권능가운데 강림하신 것이 아니었다. 2천 년 전 갈릴리 호숫가를 거니시던 그 모습으로 오셨다. 세비야 중앙 광장에는 웅장한 화형대가 세워져 있었고 바로 전날 그곳에서는 거의 1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했던 때였다. 화형식은 왕과 대신들, 그리고 귀부인들, 세비야의 수많은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심문관인 추기경에 의해 집행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매우 조용하게 오셨지만 누구든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분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분은 몰려든 대중을 축복하셨고 그의 몸은 물론 옷자락에 닿기만 해도 병이 치유되었다. 어릴 때부터 장님이었던 한 노인이 ‘주님, 저를 치유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주님을 뵐 수 있겠습니다.’ 하자 그의 눈이 떠졌고 그는 주님을 볼 수 있었다. 성당입구에서는 장례를 치르기 위해 성당으로 들어가는 일곱 살짜리 여자아이를 2천 년 전 그 때처럼 ‘달리다 쿰’이라 말하시며 살려내셨다. 그 분을 따르는 민중들은 주체할 수 없는 감격으로 비명을 지르고 흐느껴 울었다.

그 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대심문관이 그 장면을 목격하였다. 구십세의 고령이었지만 큰 키에 꼿꼿한 모습을 잃지 않았고 그 눈에는 불꽃과 같은 광체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바로 어제, 화형식을 집행할 때의 그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추기경 복장 이었으나 지금 그의 모습은 낡아빠지고 허름한 승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소녀를 살리시는 모습을 쭉 지켜보던 대심문관은 그의 수행원들에게 그리스도를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다.

그 날 밤, 대심문관이 감옥으로 그리스도를 찾았다. 그가 그리스도께 한 말은 대충 이런 말이었다. - 작품 속에서는 장황하게 기술되어 있지만 나름대로 짧게 요약했다.-

“도대체 왜 오셨습니까? 우리를 방해하러 오셨습니까? 묶고 풀 수 있는 권리는 당신에 의해서 교황에게 전달되었고 따라서 지금은 모든 것이 교황의 손에 달려 있으니 당신은 올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바로 빵의 이름으로 당신께 반기를 들고 일어나서 당신과 싸워 이길 것입니다. 당신은 천상의 빵을 약속했지만 지상의 빵에 비길 수 없습니다. 당신은 모든 인간들이 확실히 당신 앞에 경배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빵을 거부했습니다. 천상의 빵이라는 이름으로 거부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빵보다 더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빵을 주면 인간은 경배할 것입니다.
당신은 저들에게 자유를 준다고 하였지만 저들은 우리에게 차라리 노예로 삼아도 좋으니 빵을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의 이름으로 빵을 줍니다.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우리는 당신의 편이 아니라 악마의 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비밀입니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당신이 아니라 악마와 함께 했습니다. 내일이면 당신은, 내가 손끝을 까딱 하기가 무섭게 당신이 우리를 방해하러 왔다는 이유로 당신을 태워 버릴 저 장작불에 뜨거운 석탄을 집어넣기 위해 달려들 저 온순한 양떼를 보게 될 것입니다.”

대심문관의 말에 그리스도의 대답은 없었다. 다만 그리스도는 노인에게로 다가가 아흔 살 먹은 그 핏기 없는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대심문관은 문을 열고 그리스도에게 말한다.

“어서 가시오.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시오. 절대로 오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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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약속한 것은 자유이고 천국이고 평화인데 악마가 약속해 주는 것은 세상의 빵과 안정이다. 똑같은 약속을 오늘날 악마의 하수인들이 한다. 경제를 풍요롭게 하겠다고 한다. 국가 안보를 튼튼히 하겠다고 한다. 자유는 불안이요 혼란이니 복종함으로 안정을 얻으라 한다.

대심문관의 이야기가 단지 소설속의 이야기일까?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을 빌어 현실을 고발했다. 주님을 배반하기는 대심문관이나 우리나 일반인데 소설속의 대심문관은 자신이 배반자라는 것을 안다. 대중들에게는 신의 대리자요 신에게는 배신자임을 숨지기 않는다. 그러나 대중들은 역시 자신들도 배신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른다. 그리고는 마치 유다처럼 “나는 아니지요?”한다.

오래전 읽은 <파우스트>가 생각난다. 파우스트, 영혼을 판다. 한때 내가 삶의 괴로움을 질겅질겅 씹고 있을 때, 나의 지식, 젊음, 소신도 팔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물론 그 때도 나의 생각은 소름끼치도록 매우 끔찍한 생각이었다. 혹 악마일 수도 있는 누군가가 내 뜻을 알고 아주 작은 손짓만 했더라도 나는 그의 하수인이 되었을 것이다. 빵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나를 알기에 나는 감히 “나는 아니지요?” 할 수 없다.
다행히 아무도 나를 사 주는 이는 없었다. 그 만큼 나는 가치 없는 인간이다. 때로는 무능함이 자신을 보존할 수 있다. 감사한 일이다.

나에게 기도는 감사의 기도가 아니다. 찬양의 기도도 아니다. 나에게 기도는 하나님과의 싸움이다. 하나님과 싸우는데 총칼로 싸울 수 있다면 그리하겠는데, 주먹으로 싸울 수 있다면 그리하겠는데, 목숨 걸고 싸울 수 있다면 그리하겠는데 그게 안 되니 무기 내려놓고(祈) 목숨 내려놓고(禱) 싸우는 것이 祈禱다.

천사와 악마를 구별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뜻과 사탄의 뜻을 구별할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것을 구별할 능력이 없다. 악마는 늘 천사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고 사탄은 우리가 분별할 수 있는 한 가장 합리적이고 매력적인 제안을 해오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사탄의 손아귀에 우리를 넘겨주지 않으시리라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총을 믿을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긴 있다. 깊은 자기 성찰이 사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 우리의 욕망이 크고 강할수록 사탄의 제안은 거부할 수 없다. 욕망이 있는 곳에 사탄이 있다. 사탄은 사람의 욕망을 먹고 산다.

욕망은 줄이고 꿈과 희망은 크게 펼쳐야 하는데 욕망과 희망과 꿈은 잘 구별되지 않는다. 나의 엉터리 한글풀이로 “꿈”은 하나님으로부터 꾸어온 것이 꿈이다. 하나님이 꾸어 주시는 것이 꿈이다. 제 멋대로 꾸는 꿈은 욕망이다.

깊은 자기 성찰로 자신의 꿈과 희망이 욕망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비로소 욕망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다. 욕망에서 자유 하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깊은 자기 성찰이 바로 기도다.
욕망을 채워 달라는 기도는 사탄을 부르는 소리다. 그 소리에는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고 사탄이 응답한다. “욕망을 채워줄 테니 영혼을 내 놓으라”고 한다. 아시는가? 소위 크게 성공한 이들은 - 그의 직업이 혹 성직자라 할지라도 - 대부분 그의 영혼을 사탄에게 저당 잡힌 자라는 것을....

하늘은 말이 없다. 그래서 기도는 고독한 싸움이다. 자신과의 싸움이다. 하나님이 나고 내가 하나님이다. 그리고 제 말이 아버지의 말씀임을 깨달음이 구원이고 거듭남이다. 내가 악마고 악마가 나다. 그것이 멸망이다.

구원의 환상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과 우리가 기대하는 구원은 다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은 그 내용이 천국이지만 사람이 기대하는 구원은 그 내용이 세상이다.
진정한 구원과 구원의 환상이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위에서 말한 대심판관에게는 예수의 가르침이야말로 구원의 환상이다. “사랑”, “용서”, “자유”와 같은 추상적인 가르침이야 말로 구원의 환상이다. 오히려 악마의 하수인이 되어 자유를 누릴 능력이 없는 나약한 인간들의 자유를 거두어들이고 그들의 부질없는 욕망을 적당히 채워 주면서 그들의 복종으로 세상의 질서를 세우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어디 대심판관만 그러한가? 거개의 인간들의 생각이 그러하다.

성서에 구원의 환상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있다. 베데스타 연못 이야기다.(요5:1-18) 베데스타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이는 무슨 병이든지 낫는다고 한다. 가끔 물이 움직이는 것은 그 연못이 간헐적으로 샘솟기 때문이다. 그것을 당시의 사람들은 신비한 힘으로 보았을 것이고 거기에 무슨 영험한 힘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곳에 사람들이 모였다. 아무런 소망이 없는 이들이 신비한 힘에 기대를 걸고 그곳으로 모였다. 거기에 38년 된 중풍병자도 있었다.
정말 베데스타 연못이 동할 때 제일먼저 들어가는 이의 병이 낫는다 하더라도 그 38년 된 중풍병자에게는 기회가 없다. 제 힘으로 들어갈 수 없는데 어쩌겠는가?
베데스타 연못에는 구원이 없다. 환상일 뿐이다. 그곳에 구원이 있다면 예수께서 그곳에 나타나실 이유가 없다.

옛날은 물론 오늘날에도 숫한 구원의 환상들이 존재한다. 지금 우리가 금과옥조처럼 생각하는 것들이 실상은 거개가 구원의 환상들이다. 교리, 신조, 특정한 성구들이다. 예루살렘 성전도 구원의 환상이었고 모세의 율법도 구원의 환상이었는데 하물며 교리, 신조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베데스타 연못 이야기는 안식일법이 구원의 환상임을 밝히심에 그 뜻이 있다. 안식일법은 변질된 율법이다. 미신은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지만 변질된 율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억압하고 종으로 삼는 악마적인 것이다. 가차 없이 깨부수어야 한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에 대한 숫한 교리와 철학적 논증들, 예수에 대한 각종 신앙고백들은 진리가 아니다. 참고 사항이다. 그들의 신앙고백일 뿐이다. 존중할 것이지 꼭 받아들여야할 것은 아니다. 진리로 강요될 때는 이미 진리로서의 겸허함을 상실한 것이다.

오늘날 구원의 환상은 돈, 안정된 직장, 첨단 의료장비와 기술이다. 미국이다. 과학기술이다. 총선을 앞둔 정치인들에게는 금배지가 구원이다. 북한에게는 핵폭탄과 핵미사일이 구원이고 남한에게는 미국이 구원이다.

최근에 북한이 인공위성을 발사했다. 북한이 왜 핵폭탄과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을 정도의 발사체에 집착할까? 이유는 명백하다. 미국의 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것은 핵무기와 미사일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북한에게 있어서는 핵과 미사일이 구원의 환상이다. 그리고 동시에 실제적이다.

그에 대한 반발로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 가동을 중지했다. 또 그것을 구실로 사드를 배치한다고 한다. 가공할 핵무기를 가진 북한에게 한번 싸워보자고 겁박하는 것 같다. 어떻게 그리할 수 있을까? 미국을 믿기 때문이지만 미국이야말로 구원의 환상이다.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는 과학기술의 시대, 많은 이들이 과학기술에 소망을 둔다. 막연하나마 거기에 구원이 있을까 하고 기대한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최고의 匠人(장인) 다이달로스, 그는 주문자의 의도를 묻지 않는다. 그에게는 윤리가 없다. 주문자가 주문하는 대로 만들면 그만이다. 그의 기술은 철저히 가치중립적이다.

오늘날 과학자들도 역시 그러하다. 핵무기를 비롯하여 온갖 무기를 만들고 첨단 도청장치도 만들고, 생명의 고귀성을 깨뜨리는 생명복제등도 서슴지 않는다. 技術(기술)은 가치중립적이라는 논리를 위안삼아 결과가 눈에 보이는데도 개의치 않는다. 예측할 수 없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데 조금도 고려치 않고 주문자의 돈에 노예가 되어 지식과 기술을 판다. 이들에게는 ‘구원’이라는 개념조차도 없다.

그러면 종교에는 구원이 있을까? 종교는 구원의 길을 가자는 것이지 종교에 구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바른 종교라야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구원의 길을 가자고 하지 권세 있고 타락한 종교는 구원의 길을 제시하기는커녕 악마와 짝하여 구원의 길을 막는다.

새나무, 헌 나무

나는 목수다. 이 나무 저 나무 접하다 보니 비싼 나무도 있고 값싼 나무도 있다. 그런데 값이 비싸다고 좋은 나무가 아니며 값이 헐하다고 나쁜 나무가 아니다. 값은 그 희소성이나 가공하는데 드는 노동력, 등에 의해서 정해질 뿐 사람이 정한 값이 나무의 본래 가치일 수는 없다. 사람에게 귀천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나무에게도 귀천은 없다. 단단한 나무가 있고 부드러운 나무가 있을 뿐이다. 나무색이 옅은 것이 있고 진한 것이 있을 뿐이다. 곧은 나무가 있고 굽은 나무가 있을 뿐이다.

다 좋은 나무다. 그렇지만 헌 나무 새나무는 있다. -이 판단은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판단이다.- 새로 들여 논 나무는 그 빛깔이 참 곱다. 그런데 햇빛을 받고 먼지가 쌓이다 보면 색이 퇴색해서 처음의 고운 빛이 사라지고 마치 헌 나무 처럼 된다. 그러나 비록 색이 바라서 헌 나무 처럼 되었더라도 새 나무임에는 틀림없다.

그럼 헌 나무는 무엇인가? 무엇인가를 만들었던 나무로서 무색이던 유색이던 칠을 한 나무가 헌 나무다. 헌 나무로 멋진 작품을 만들 수는 없다. 칠을 벗겨 내지 않고 다른 칠을 하면 칠이 잘 되지 않을뿐더러 되었다 하더라도 벗겨져서 옛 칠이 드러나기 쉽다.

헌 나무를 새나무로 만들려면 칠을 다 벗겨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칠은 나무의 표면에만 묻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나무속으로 침투해 들어갔기 때문에 온전히 칠을 벗겨 내려면 나무를 깎아 내야 한다. 그러니 칠을 벗겨 내는 수고보다 새 나무를 마련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할 수 있다. 改革이라는 것이 가죽을 벗겨낸다는 뜻인데 헌 나무를 새 나무로 만드는 것에서 개혁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헌 나무 새나무를 통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헌 사람, 새 사람이야기다. 헌 사람이란 이런 저런 칠이 입혀진 사람이다. 습관, 이데올로기, 가치관, 편견 등의 칠이 입혀진 사람이 헌사람이다. 헌 사람이 새 사람 되기는 정말 힘들다.

헌 나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용도에 맞게 제대로 칠해져서 사용되고 있는 나무는 새 나무 보다 훨씬 값어치가 있다. 문제는 용도를 바꾸어 다시금 멋지게 사용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논어 읽기

150호에 게재했던 子張 22장부터 25장까지는 자공이 공자에 대하여 그 극진한 존경을 표하는 내용이다. 22장에는 공자에게는 가히 스승이 있을 수 없음을, 23장에서는 마치 높은 담장안의 종묘와 같이 엿볼 수 없는 신비로움을, 24장에는 해와 달 같아서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음을, 25장에서는 하늘과 같아서 도저히 오를 수 없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특히 24-25장의 내용은 자공의 공자에 대한 존경이 종교적이다. 공자를 도무지 상대화 할 수 없는 지고의 성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중국의 유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종교처럼 이해되어 대체로 “儒敎”라고 불렀다. 아마도 종교성이 강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공자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모양이다. 정작 중국에서는 공자가 신앙의 대상이 아닌데도 말이다. 중국에서도 한때 공자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청나라 말기 중국의 석학 캉유웨이는 중국이 서양에 밀리는 근본 원인을 중국에 종교가 없음이라 생각하고 공자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孔敎”를 만들어 국민들을 정신적으로 지도하자고 주장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공자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을 공자가 알면 한탄할 일이다.

* 이 즈음에서 자공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사마천은 <사기> 중니제자열전에서 자공에 대해서 장황하게 이야기 하는데 그 끝에 이렇게 쓰고 있다.

“자공은 한 번 나서서 노나라를 보존시키고 제나라를 어지럽게 했으며,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晉나라를 강국이 되게 하였으며, 월나라를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였다. 즉 자공이 한 번 뛰어다니더니 각국의 형세에 균열이 생겨 십 년 사이에 다섯 나라에 각기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자공은 또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일을 좋아하여 때를 보아서 돈을 잘 굴렸다. 그는 남의 장점을 칭찬하기를 좋아하였으나 남의 잘못을 덮어 주지는 못하였다. 그는 일찍이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재상을 지냈으며 집안에 천금을 쌓아 두기도 하였다. 그는 제나라에서 삶을 마쳤다.”

국제 감각이 뛰어나고 언변은 더욱 뛰어난 자공은 노나라가 위험에 처하여 공자가 걱정하자 천하를 돌며 국제 판도를 바꾸어 노나라를 구한 이야기다. 그리고 자공은 재정능력이 뛰어나 많은 재물을 모았는데 그 많은 재물로 공자 일행의 소요경비의 상당부분을 감당했다. 공자가 죽자 다른 제자들은 삼년상을 치렀는데 자공은 육년상을 치렀다. 또한 훗날 공자가 유명해 진 것은 자공이 공자를 위와 같이 끔찍이도 공경했기 때문이다.

자공은 뛰어난 정치력과 훌륭한 학식과 인품, 게다가 많은 재물을 베풀음으로 감히 그보다 더 훌륭한 인물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의 칭송을 들었다. 그 칭송은 “공자도 자공보다는 덜 현명할 것이다”는 말로 드러난다.

이상에서 볼 때 자공은 매우 이상적인 인간이다. 그러나 나는 그를 좋게만 볼 수는 없다. 그가 천하를 돌며 국제 판도를 바꾸었다는데 그 과정에 숫한 전쟁이 있었고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 또한 그가 엄청나게 많은 재물을 모았다고 하는데 과연 그 과정에 부정과 불의가 없었겠는가?

* <이야기 신학>을 시작하고서 이제까지 <논어>를 연재했습니다. 몇 번 다른 글에 밀려 빠진 적도 있었지만 꾸준히 해 왔습니다. <논어>에 나름대로 해설을 붙여 연재했지만 <논어>자체의 내용이 워낙 훌륭하다보니 마땅히 독자들은 꼼꼼히 읽었어야 하는데 <논어>를 성실히 읽은 사람은 적은 것 같아 아쉬움이 있습니다.

어느덧 <논어>가 끝날 때가 되었습니다. 다음호에 堯曰편으로 논어 연재가 끝납니다. 하여 다음호는 <논어> 특집으로 꾸며볼까 합니다. 뭐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연재했던 것 중에서 되새겨 볼까 합니다.

<논어>를 마치고는 <노자>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글쓴이 김홍한님은 대전 유성구의 새교회를 섬기고 계시다.

[대전 유성구 원내로 39번길 59 <새교회> 우)34227
☎ 010-3243-2665 E-mail: khhyhy@hanmail.net
후원계좌 / 농협 453047-52-043161 김홍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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