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전 이몽룡은 실존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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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 이몽룡은 실존인물이었다?
  • 류기석
  • 승인 2009.10.09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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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석천정(石泉亭) 성이성 생가 계서당(溪西堂)에 들다.

경상북도 봉화군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사이에 두고 문수산과 구룡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높고 험준한 산맥들로 이루어져 개발이 더딘 천혜의 자연경관을 간직한 곳이다. 또한 조선시대부터 유교적인 전통질서 속에 자리잡은 종가와 덕망있는 선비들을 길러낸 양반의 고장이기도 하다. 이곳은 산속 오지라 변화의 바람이 작고 사람들의 성향도 대체로 보수적이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의 전통과 문화유산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봉화읍의 작은 고개하나만 살짝 넘으면 닭실마을이라는 전통마을을 만날 수 있는데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외따로 떨어진 촌락이나 보잘것없는 마을에서도 글 읽는 소리가 들렸으며, 해어진 옷을 입거나 좁은 창을 내고 살지언정 모두 도덕과 성리학을 말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마을은 풍수지리상으로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으로 닭이 알을 품은 듯한 지세라고 하여 닭실 이라는 지명이 나왔다.

닭실에 처음 들어온 안동 권씨는 충재(沖齋) 권벌(1478∼1548)의 5대조였지만 마을이 번창하기 시작한 것은 권벌 이후였다고 한다.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권벌은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참여한 사림파의 일원으로, 나중에 의정부 우찬성을 지낸 사람이다. 그러나 기묘사화와 을사사화 때 파직당하고 귀양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현재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유적들도 기묘사화로 파직당한 권벌이 낙향해 머무르는 동안 일궈놓은 것이다. 

닭실마을 인근에는 자연미가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정원을 간직한 정자가 두 곳 있다. 첫째는 청암정(靑巖亭)으로 기존의 자연요소인 청암(물과 바위)을 최대한 살린 정원으로 고도의 은유를 통해 사유하는 공간이요. 둘째는 석천계곡에 있는 석천정(石泉亭)으로 인공을 최소함으로 뛰어난 자연경관을 갖춘 정원이다. 이번 여행학교에서는 그동안 지나쳐왔던 석천정을 답사하기로 했다.

이곳은 봉화읍에서 불과 자동차로 5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다. 우선 봉화읍을 지나면 사거리가 나오는데 부석사 방향으로 500m만 직진하면 우측편에 석천정 간판이 보인다.

그곳에서 하천을 조금만 거슬러 오르면 주차장이 있고, 차량은 진입할 수 없는 계곡 옆 오솔길로 향하게 된다. 이곳 석천계곡을 따라 솔밭 사이를 걸어 15분쯤 걷다보면 풍광이 수려한 곳에 기와를 얻은 화장실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잠시 볼일 등을 보고는 우람한 소나무사이로 거대한 기암이 누워있는 장관을 느끼면 이어 저편 너머로 쉴새없이 흐르는 계곡가에 자리 잡은 석천정의 건물을 만날 수 있다. 이 건물은 충재 권벌의 장남 청암 권동보가 선조의 뜻을 받아 1535년에 지었다고 하는데 건물 규모가 34칸에 이를 정도로 매우 크다.

개울가에 축대를 쌓은 다음 그 위에 정자를 지어 빼어난 경치를 감상하도록 지어졌다. 석천정의 특이 점은 계곡 쪽에 담을 세우지 않고 누각을 그대로 세워 계곡과 담사이의 경계가 없다. 그대신 일열 횡대로 창문을 줄지어 달아낸 것을 보면 그곳의 경치를 최대한 끌어 들이려 했던 옛 선비들의 풍류도를 짐작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다보니 맑았던 계곡물도 이제는 탁하게 오염돼 흐르고 있어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이어 돌(石)과 샘(泉)이 어우러진 석천의 위태롭게 연결지어진 나무다리를 건넜다.

석천정 옆에는 작으마한 고택이 한채 있었고, 그곳에 살고 계시는 할머니 한분이 집안에서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밖을 주시하고 계셨다. 석천정 출입문이 굳게 잠겨 있어 그러시는 모양이다. 건물은 정면3칸, 측면 2칸의 건물과 2칸 반, 1칸의 건물이 서로 이어진 평면 구조의 지붕으로 팔작지붕과 맞배지붕 두 부분으로 각각 달리 구성했다.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울창한 송림과 바위로 둘러진 석천계곡을 산책하다가 모진 세월과 함께 쇠락해져가는 석천정을 뒤로하고는 부석사 방향, 915번 지방도로를 따라 가계천과 나란히 10분쯤 달려 물야면 가평리 삼거리 계서종택을 알리는 이정표 앞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멀리 북서쪽을 향해 바라보니 멀리서도 한눈에 이곳이 풍수지리상 명당인 것을 알 수 있는 계서종택이 보였다.

계서종택의 보수공사로 인해 대문이 잠겨있어 좌측에 있는 출입문을 통해 마당에 들어서니 정제된 종택의 기풍을 느낄수 있었다. 안채와 연결지어진 또다른 대문앞에 들어서니 작업중이던 창녕 성씨 계서 성이성 종가의 종손 성기호(67세)님이 맞아 주셨다. 

춘양전에 나오는 이몽룡의 실전 인물이 살았던 계서 성이성 선생님의 종택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듣기 위해서 찾아보았다고 하자. 불쑥 찾아나선 낮선 손님임에도 불구하고 부인 강순자(65세)님과 함께 무척이나 반겨 주셨다.

종손 성기호님은 몇 년전 도시에서 공직생활 등으로 건강이 안좋았으나 퇴직후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일에 푹 빠져 살다보니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봉화 산골의 농촌은 아직도 물과 공기의 오염에서 벗어나 있어 그곳에 가서 살기만 하더라도 건강이 지켜지는 모양이다.

잠시 고택과 청백리 계서 성이성선생에 대한 고문서 사본을 참고하시어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다. 부인께서는 차와 함께 감홍씨를 정성스럽게 준비하여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드리운 대청마루로 내다주셨다. 현재 계서종택은 주변마을과 붙어있어 조화를 이루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봉화군의 적극적인 예산지원을 받아 체계적인 복원을 이룰 것이라는 귓뜀도 덧붙이셨다. 머지않아 계서종택이 문화축제와 관광 체험장으로 휼룡히 자리잡아 갈 것을 기대해 본다.

계서종택을 자세히 소개하자면 조선 중기의 문신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이 거주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쓰던 곳으로, 광해군5년(1613년) 건립하였다. 부속 문화재로 안채, 사랑채, 사당이 있다. 경사진 산록에 건물을 남향으로 배치하여 우뚝 솟아 보이는데, 왼쪽으로 10m 떨어진 곳에 사당을 배치하고 주위에 와편담을 설치하였다.

건축형태는 정면 7칸, 측면 6칸의 ‘ㅁ’자형이며 사랑채와 중문간(中門間)으로 이어졌다. 안채는 정면 5칸으로, 측면 3칸은 대청이며 좌우 2칸은 안방과 상방이 대칭으로 놓여졌다. 안방과 상방 뒤에는 마루방을 각각 반 칸씩 설치하여 반침으로 사용한다. 안방 부엌은 마당 쪽으로 길게 뻗어 중문간이 있는 앞채와 직각으로 만나며, 상방 앞의 부엌은 반 칸을 내밀어 사랑채 부분과 1m 정도 틈을 두었다.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으로 후대에 증·개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면 3칸과 좌측면 2칸에 ‘ㄴ’자형 마루를 설치하고 기둥 바깥으로 헌함(軒檻:대청 기둥 밖으로 돌아가며 깐 난간이 있는 좁은 마루)을 두었다. 마루 뒤쪽에는 사랑방, 책방, 사랑윗방 등을 배치하였으며 양측면은 널벽으로 꾸미고 널문을 달았다. 전면은 누다락같이 꾸몄으며, 누 아래의 방주(方柱) 사이는 잡석쌓기 위에 토벽을 쳐서 막았고 누 위의 방주 머리에는 주두(柱頭)를 놓았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으로 납도리 3량가 구조이며, 내부에 운궁(雲宮)과 감실(龕室)이 있다. 처마는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고 후면은 홑처마이다. 사당 정면에 있는 사주문은 각기둥의 맞배지붕으로 중방을 기둥 상부에서 연결하여 다락을 꾸몄다. 문간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으로 홑처마의 맞배지붕이며 납도리 3량가이다. 왼쪽부터 2칸은 우물마루를 깔고 고방, 부엌, 방, 대문간, 마구간, 화장실을 두었다.

성이성은 1627년 문과에 급제한 뒤 진주부사 등 6개 고을 수령을 지내고 어사에 세 차례 등용되었으며, 근검과 청빈으로 이름이 높았다. 훗날 부제학(副提學)을 추서받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었다. 계서 성이성은 평생 공사 구별 없이 청렴, 결백하여 검소하게 살았던 인물로 청백리는 대간 및 대신들의 추천에 의해 청렴한 관직자로서 조선시대 전 기간 중 본관 44씨족에서 219명을 배출하였는데 창령 성씨 문중은 5명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중요한 사실은 우리나라 고대소설로 알려진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이 창령 성씨 문중 성이성으로서 실존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성이성의 유년시절과 부 성안의 관직생활, 당시의 시대적 환경과 소설의 작품내용이 모두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요즘 봉화 계서당이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 고대소설 춘향전의 내용은 실화이며 그 주인공은 이곳 계서당의 주인인 성이성으로 이몽룡의 실제인물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춘향전에 관한 연구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연세대 설성경 교수가 최근 이몽룡의 러브스토리라는 주제로 춘향전 이몽룡의 실제 인물이 성이성이라는 연구논문을 발표하면서 학계는 물론 사회에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는 곳이다.

실제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장면은 성이성의 현손인 성섭의 교와문고에 춘향전의 어사출두 장면과 똑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 고조께서 수의어사로 호남지방을 암행하여 안 곳에 이르니, 호남12읍 수령들이 큰 잔치를 베플어 술판이 낭자하고 기생의 노래가 한창이었다. 수의어사가 걸인 행색으로 들어가....지필을 달라하여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반상가효는 만성효요, 촉루낙시는 민루낙, 가성고처도 원성고라.'(동이의 술은 천사람의 피요, 소반의 좋은 아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불의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래소리 높은 곳에 원성의 소리 높더라)..이어 서리가 암행어사 출두를 소리치며 나아가 당일 파출수령 6인과 그 밖의 6인에 대한 서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시는 성이성이 쓴 시로 4대 후손 성섭이 지은 <교와문고 3권>에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이몽룡과 흡사한 성이성의 행적은 계서공파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계서선생일고>, <암행록>, <필원산어> 등의 문헌에 그대로 담겨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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